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노을 역의 배우 최성원이 15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노을 역의 배우 최성원에게 물었다. 드라마 이후 인기를 실감하는지 물음에 그는 "오늘처럼 머리에 힘 주고 나가는 날엔 전혀 못 알아보신다"고 재치 있게 답했다. ⓒ 이정민


많은 사람들이 덕선(혜리 분)의 남편 찾기에 한창일 때 노을(최성원 분)은 묵묵히 자기 몫을 해냈다. 분량도 적었고, 별다른 극적 사건에 휘말리지 않았던 그지만 "동룡이형(이동휘 분)은 키 크고 나이 어린 여친이 있지"라는 대사 하나로 배꼽을 쥐게 하는 등 촌철살인 유머를 선보였다. 회가 거듭될수록 시청자들 사이에선 '노을의 대사는 절대 허투루 들을 수 없다'는 평이 나오곤 했다. 단벌 운동복과 운동화로 사철을 버틴 노을은 분명 <응답하라1988>(이하 <응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드라마 종영을 이틀 앞둔 지난 15일 배우 최성원을 만났다. 노을이의 바가지 머리가 아닌 한껏 왁스로 꾸민 머리, 게다가 키도 훤칠하다. 다만 특유의 눈썹 모양, 그러니까 '4시 40분형'(뭔가 억울해 보이는) 눈썹에서 노을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자꾸 눈썹이 아래로 자라 정리해줘야만 한다"고 받아치며 그가 웃었다.

노안 같지만 노안 아닌 너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정봉 역으로 출연한 안재홍(우측)과 노을 역의 최성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정봉 역으로 출연한 안재홍(우측)과 노을 역의 최성원. 노을은 정봉바라기다. 인터뷰 중 최성원은 "덕선의 남편을 다들 궁금해하시는데 개인적으론 정봉이형이 나중에 커서 뭐가 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 tvN

일단 그의 나이를 분명히 해두자. 극중 노을이는 17세 고등학교 2학년으로 가장 막내였지만, 최성원의 실제 나이는 1985년생이다. 7수생 정봉 역의 안재홍이 1986년생이니 그보다 형이고, 동룡 역의 이동휘와 동갑이다. <응팔> 속 미래의 매형(김주혁 분)이 그를 두고 "말 놓는 데만 10년이 걸렸다"고 할 정도였지만, 실제 그가 노안은 아니라는 얘기.

뭔가 억울해 보이고 주눅 들어 보이는 모습에서 제작진은 그를 노을이로 낙점했다고 한다. <응답하라> 시리즈 오디션 현장에서 신원호 감독의 웃음이 터지면 붙는다는 정설이 있는데, 최성원이 바로 그중 하나였다.

- 오디션 일화는 이미 나온 상황이지만, 뭘 어떻게 준비했는지 궁금하다.
"뭘 준비해 와라 그런 건 없었다. 가니까 지정 대본이 있더라. <응답하라1997>의 칠봉이 대사였다. 미리 대본을 주면 다들 연습을 해오지 않나. 현장에서 보이는 본연의 성향과 천성이 얼마나 제작진이 준비한 캐릭터와 부합하느냐를 보시려 한 거 같다. 대사를 쳤고, 이후 가만히 정면을 응시하라 해서 봤는데 PD님이 웃었다. 다음엔 멋있게 해서 오지 말고 고등학생처럼 하고 오래서 그렇게 갔고, 이후 캐스팅이 됐다."

- 두 번에 걸쳐 본 셈이네?
"그렇다. 아마 다른 배역은 더 많이 봤을 거다. 아무래도 비중이 크니까."

- <응팔> 출연 전까지 여러 오디션에서 낙방했다고 들었다.
"10여 작품에서 떨어졌다. 많이 봤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의지가 박약하고 멘탈이 약해서 자책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다. 성격을 바꾸려고도 무진 노력했는데 잘 안되더라. 영화 <탐정>을 찍고 도전한 오디션에서 모두 떨어져서 기운이 없던 때였다. 사실 <응팔> 오디션도 보러 가기 싫었다. 또 떨어질 거니까. 당일 오전에 몸이 아프다고 핑계를 댈까 싶었다. 막상 붙었을 때도 2주 정도는 실감이 안 났다. 분명히 촬영 임박해서 '미안하다, 다른 배우가 하기로 했다' 이런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면 긍정적 성격은 아닌 거 같다(웃음)."

누나 있는 외아들 감성을 초딩 감성에 버무리다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노을 역의 배우 최성원이 15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신을 두고 "긍정적이지 않다"고 표현했지만, 2003년 대학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기 시작한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끈기와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 이정민


그렇게 해서 낙점된 노을 캐릭터를 위해 그는 누나들을 둔 친구들을 찾아가 인터뷰했다. 자신이 졸업한 초등학교도 찾아가 아이들의 하굣길을 관찰했다. 하지만 막상 친구들은 "고등학생 때 누나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해 본적이 없다"고 말했고, 의외로 초등학생들 모습은 성숙해보였다. 난감했을 터.

- 초등학생들을 관찰한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
"1988년 당시 17살(노을의 나이)이 지금의 13살과 정신세계가 비슷하다고들 하시더라.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을 주로 관찰했지. 성숙해 보여도 아이들인 게, 자극에 대한 반응이 순간적이더라. 그걸 연기에 접목시킨 게 성보라(류혜영 분)의 키스 장면이었다. 담벼락 아래만 쳐다봤으면 딱 잡을 수 있었는데 순간 춥다고 들어가지 않나. 그래서 끝까지 누나의 연애를 몰랐던 거다."

- 실제 형제 관계가 궁금하다. 혹시 외아들? 덕선이가 막내에게만 월드콘을 사준다고 아버지 성동일을 원망하는데도 뻔뻔하게 그걸 받아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맞다. 노을이가 누나들이 있지만 아들이니 공통된 정서는 있더라. 차이가 있다면, 외동은 가만히 놔둬도 모든 게 다 자기 것이지만, 누나가 있는 외아들은 뭔가 받으면 즉시 소비해야 한다!(웃음)"

- 1980년대 후반의 사회상을 나름 공부하는 것도 필요했을 것 같다.
"딱히 시대적 사건을 공부하진 않았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인물들이 사건에 휘말리는 게 아닌 한 발짝 물러서 있는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지 않나. 오히려 노래들이 중요했다. 드라마 대본에 배경음악의 제목과 가수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곤 했는데, 그걸 다 찾아 들었다. 그간 잊고 있던 노래들 혹은 처음 알게 된 노래들을 반복해서 들었다. 전국노래자랑에서 부른 '슬픈 인연' 역시 다들 015B 버전으로 알고 있는데 나미 선배 것이었다. 원곡을 많이 따라 불렀다."

- 적은 대사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은 컸다.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 하나만 꼽아본다면?
"첫 촬영 중반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밥상 장면이다. 더블 액션이라고 하는데 같은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해서 찍어야 하는 때가 있잖나. 대사도 없는 애가 밥을 안 먹는 것도 이상해서 대본에 '최대한 맛있게 먹는다, 하정우 선배의 먹방을 능가하자!'라고 적어놓고 엄청 준비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먹었지. 그리고 다시 찍는데 멘붕이 왔다. 내가 뭘 먹었는지 모르겠는 거다.

옆에서 지켜보던 성동일 선배가 '너 다 기억하냐?' 이런 눈빛이었다(웃음). 그 이후부턴 연기를 분석하는 게 아닌 암기로 했다. 아, 근데 성동일 선배는 대사가 많기도 하지만 기막히게 밥을 안 드시고 시늉만 한다. 근데 그게 꼭 드시는 거 같다! 기술이지. 안 먹었는데 마치 밥 양도 줄어 보인다. 이것이 진짜 연기의 경지인가! 정말 깜짝 놀랐다(웃음)."

7월말 첫 촬영의 기억을 그는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긴장과 떨림의 연속이었다. "이 작품으로 떠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폐만 끼치지 말자"고 다짐했던 그는 마지막 촬영일이었던 지난 14일 홀로 펑펑 울었다. 출연자와 드라마에게 쌓인 정 때문이다. 그는 한 시청자의 말을 기자에게 상기시켰다. '초6 자식과 한 번도 대화를 길게 이어간 적이 없었는데 <응팔>로 그런 기회를 갖게 됐다, 고맙다'는 이 말로 최성원은 처음으로 이야기의 힘을 체감하게 됐다.

"이제부터 버티기의 시작"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노을 역의 배우 최성원이 15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응답하라 1988> 중 기억나는 또 하나의 장면. 최성원은 성보라(류혜영 분)에게 용돈 10만원을 쥐어주며 보내는 순간을 꼽았다. "거친 세상에서 아버지의 뒷모습이 참 작아보였다"고 그가 설명했다. 해당 장면을 방송을 통해 보며 그는 눈물을 흘렸다. ⓒ 이정민


<응팔>을 통해 소위 '뜬' 다른 많은 배우들이 그렇듯이, 최성원 역시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떨어진 배우가 아니다. 국민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지난 2007년부터 꾸준히 무대에 오른 실력파다. 스스로는 "조정석 선배나 강하늘 배우 급이 아니라서 드라마를 이유로 몇 번 작품을 고사하니 이제 대학로에서 연락이 안온다"며 겸손해 했지만, 뮤지컬 <오! 당신이 잠든 사이> <김종욱 찾기> <트레이스 유> 등에서 꾸준히 활약했다.

재밌는 일화 하나. 데뷔 직전 그가 언론에 대서특필 된 사건이 있었으니, 과 선배였던 이효리 덕이었다. 당시 그룹 핑클로 인기 정점을 찍고있던 이효리는 종종 대학 후배와 동료들 도움으로 취재진을 피해 귀가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최성원이었다. "모자이크 된 채로 내 얼굴이 신문에 크게 나왔다"며 그가 전했다.

학교공부를, 특히 수학과 과학은 일찌감치 포기했다지만, 어찌 보면 최성원은 모범생이다. 동료들이 연기를 포기하며 떨어져 나갈 때도 그는 무대를 설치했고 대본 연습에 집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반 아이들 앞에서 웃길 때 처음 카타르시스를 느낀" 이후 배우는 그가 주체적으로 하고 싶었던 유일한 것이었다.

- 사춘기 때 스쳐 지날 수도 있던 배우라는 직업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
"외아들이라 부모 입장에서는 당신이 계획한 뭔가가 있을 거 아닌가. 어렸을 때부터 부모 말씀에 순종적이었다. 그러다 내가 처음으로 먼저 공부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게 연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이후 연기보다 더 강렬하게 날 이끈 게 없었다. 대학 때도 15일인가를 집에 못 간 적도 있다. 표인봉 선배 공연 준비 때였나. 고생스러운데 엄청 좋더라. 내 사고가 깨어있지 못한 건지, 무대에 못 서더라도 그땐 대학 졸업하고 시작해보자는 마음이었다. 내가 좀 순종적이다(웃음)."

- 무대뿐만 아니라 지상파 단막극과 영화에도 몇 번 출연했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건가.
"직장인처럼 돈을 일정하게 벌지 않아도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난 괜찮았는데, 오히려 주변에서 조급하지 않니, 괜찮니 묻더라. 결정적 계기는 어머니 때문이다. 아들이 나온 VOD를 일일이 다운받아 보시더라. 아시다시피 몇 개 안되지 않나. 너무 자주 보셔서 몇 분 몇 초에 내가 나오는지를 외우고 계셨다. 내 행복만 추구할 게 아니라 효도를 위해서라도 드라마와 영화에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버텨왔기에 <응답하라1988> 같은 작품을 만나지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이제부터 버티기의 시작"이란다. 뭔가로 주목받은 후 좋은 모습을 꾸준하게 보이는 게 힘들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매번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순 없겠지만 포기 않고 잘 버티겠다"고 최성원은 각오를 다졌다.

그간 '쫄보'였다고 자신을 표현하던 그의 눈빛이 유난히 빛났다.

 tvN 금토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노을 역의 배우 최성원이 15일 오전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버티기의 시작" 어쩌면 드라마 종영 이후 진짜 험난한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최성원은 현재 영화 출연을 놓고 최종 단계 조율 중에 있다. 드라마 속 적은 대사로 미처 보이지 못했던 또 다른 면모를 펼칠 수 있길 기대해볼만하다. ⓒ 이정민



응답하라 1988 노을 최성원 혜리 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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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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