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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살 때부터 25살까지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다. 그래서 내게 노인은 '이미지'(독거노인, 초라한 노후, 혹은 가스통 지고 집회 현장에 출몰하는 어버이연합 등)가 아니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다.

할머니는 40살에, 할아버지는 60살에 중풍이 왔다. 할머니의 말버릇은 "늙으면 죽어야지"였고 더 심각한 뇌출혈을 맞은 할아버지는 아예 언어를 잃었다. '음, 아, 억, 얏' 이런 소리가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할머니는 신경질과 한숨을 입에 달고 살며 '입맛이 없다'를 연발했다. 할머니는 한숨을 자주 내뱉으며 호박잎을 데치곤 했다. 할아버지는 몇 년 가까이 울부짖기만 했다. 개소주를 달라고 하고, 나을 수 있다고 믿으며 절룩거리는 다리를 이고 운동하던 할아버지. 이것이 내가 유년 시절에 만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노년이다.

그래서였을까. 노년과 관련된 인터뷰를 한다고 할 때 바로 아픈 몸, 고통, 죽음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노년을 앞둔 사람들이 그것을 시간,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 고민하고 상상하는 '현실'로 생각할 줄 몰랐다. 30대인 나이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목격한 노년의 잔상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48세인 영숙님은 노년을 상상할 때 떠오르는 키워드는 '시간'이라 말했다.

"시어머니가 80세인데 정말 집에 딱 들어선 순간부터 저를 졸졸 따라다니시면서 이런저런 얘길 하시는 거예요. 유일한 친구가 TV인 정도니까 온종일 얼마나 외로웠겠어요. 그걸 보면서 남편이랑 우리는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고민했죠. 누가 올까, 언제 올까 그렇게 기다리면서 살지는 말아야지. 그림이라도 배워야겠다 싶었어요."

시간에 대한 고민은 곧장 '10억은 있어야지 덜 비참하다'는 상업화된 담론에 묻힌다. 지금이라도 어서 돈을 더 벌지 않으면 노년이고 뭐고, 자식들은 덜 찾아오고 비참한 삶이 이어질 것이라는 공포심을 조성하는 사회 분위기는 여전하다.

비참한 노인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 '무례하다'

"아무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죽음에 대해서도 노년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실패, 두려움, 포기에 가깝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역설적으로 삶을 공포스럽게 만든다. 다친 몸, 비참한 노인, '병든' 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무례하다."
 "아무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죽음에 대해서도 노년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실패, 두려움, 포기에 가깝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역설적으로 삶을 공포스럽게 만든다. 다친 몸, 비참한 노인, '병든' 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무례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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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죽음에 대해서도 노년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실패, 두려움, 포기에 가깝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역설적으로 삶을 공포스럽게 만든다. 다친 몸, 비참한 노인, '병든' 이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무례하다.

"일찍 죽고 싶다, 오래 살아서 무얼 하느냐"는 누군가의 한탄을 듣고 있으면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올라온다. 불안과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럴 때면 뇌출혈로 몸이 세 번, 네 번 뒤틀려도 살고 싶어 하던 할머니의 눈빛이 떠오른다. '죽음 앞에, 삶 앞에 누구도 처연하고 통달한 듯 '쿨'한 수긍은 불가능하구나' 하고 몇 번이고 곱씹던 날들이 떠오른다.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고 싶지 않다'는 말도 비슷한 이유로 불쾌하다. 진짜 존재하는 사람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연결 짓는 자기 비하, 한탄, 자기 연민은 모두 무례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상처는 무례함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맞벌이 부모님을 대신해 할아버지와 우리를 돌봤던 할머니가 나중에는 신경증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할머니에게 도란도란 모여 함께 호박잎을 데쳐 먹는 '호박잎 모임'이라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노년이란 시기가 비어 있고 불안한 시간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작고 큰 모임과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자신을 다독이는 시간이라고 누군가 힌트를 주었다면 우리는 달랐을 것이다.

노년 담론, '돈' 아닌 '시간'에 대한 이해로 확대해야

할머니는 꽤 화통하게 웃는 사람이었는데 병에 걸리고는 웃지 않았다. 뇌출혈에 대한 이해도 그렇다. 할아버지는 도통 이상한 말을 하고, 가끔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했는데 뇌 손상에 정신 이상이 동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당혹스러움을 조금 다르게 경험했을 것이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죽음이 피하고 멀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닿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 한마디만 건네줬어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그토록 두렵게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의 몸을 이해하고 할머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나의 유년시절 또한 달라졌을 것이다.

부모는 죄책감으로 돈과 현실에 메이고, 아이들은 그 불안 속에서 숨죽이고, 노인은 두려움과 무료한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는 공간이 바로 이 사회 속 가족의 민낯이다. 지금껏 한국 사회가 그 모든 복지를 가족에게 전가한 대가다.

그 불안정성을 이고 살았던 부모 세대는 현실이란 이름 앞에 돈이 없으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했고, 자녀들은 그 불안 속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가능하지 않다. 노인들은 기다림과 억울함으로 병들어간다. 개인과 가족들이 아파할 동안 과연 이 사회는 무엇을 하였는가.

'비참한 노후가 되지 않으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활발하다. 하지만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부재하다. 노년 담론은 돈이 아닌 시간에 대한 이해로 확대해야 한다. 모두가 도달하게 될 노년이란 시·공간을 함께 축복한다는 것이 가능한 사회로의 이행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모두가 원하지만 혼자 하긴 어려운 일들, 노년을 새로 쓰고 다시 그리기. '멋진 할머니'를 꿈꾸는 것이 낯설지 않은 사회 분위기와 복지 시스템. 이런 것들이 정녕 몽상가의 꿈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강해진다.


태그:#죽음, #시간, #노년, #질병,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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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회는 1987년 태어나 세상의 색깔들이 다채롭다는 것, 사람들의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 그 사실이 만들어내는 두근두근한 가능성을 안고,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공존하는! 세상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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