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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취객을 신고한 지 2년 만이었다. 내가 112에 먼저 전화를 건 것은. '착하게 살자'를 신조로 삼은 기자가 어떤 경위에서 경찰서에 전화하게 됐는지 설명하려면, 먼저 다음의 기사를 읽어주기 바란다(관련 기사 : "김일성 만세글, 찾아주~" 고대 게시판의 호소문).

기자는 2년째 고려대학교에서 단과대 학생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덕분에 고려대 학생사회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상당히 빠르게 접하는 편이다. 지난 9일 정경대학 후문 게시판에 부착된 '김일성 만세' 대자보를 이튿날인 10일 오후 8시경 신원미상의 '남성' 두 명이 훼손했다는 소식 또한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었다.

이 남성들은 대자보를 훼손하는 것도 모자라, 경찰에 신고까지 하고 "여기가 김일성 종합대학이냐", "이따위 대자보가 종일 붙어있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훼손된 대자보는 경찰이 가져갔다고 했다.

 김수영 시인의 '김일성 만세'를 옮겨놓은 대자보는 게시한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훼손됐다.
 김수영 시인의 '김일성 만세'를 옮겨놓은 대자보는 게시한 지 24시간도 되지 않아 훼손됐다.
ⓒ 권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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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해당 대자보가 붙은 정경대학 후문 게시판은 누구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모든 압제와 억압에서 자유로운 학생들의 '언로'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대자보는 작성자의 사유재산으로, 제3자가 대자보를 자의적으로 훼손할 시 재물손괴죄를 적용해 처벌할 수 있다.

이미 지난 2014년, 한 일간베스트 회원이 고려대 학생의 대자보를 찢고 학생을 비하한 죄로 검찰에 송치된 사례도 있다(관련 기사 : '안녕들' 고대 대자보 찢은 일베회원, 기소 의견으로 송치 ). 그런데 대자보를 훼손한 남성들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당당히 경찰에 신고까지 한 셈이다. 어째서 경찰은 이들을 잡아가지도 않고, 오히려 대자보를 압수했다는 말인가?

경찰서에 보관된 대자보, 다시 찾아오기는 했는데...

경찰이 대자보를 가져갔다는 소식을 듣고, 10일 오후 10시 30분경 112에 전화해 대자보의 행방을 물었다. 안암지구대에 문의하라는 소식을 듣고 연락했더니, "해당 대자보는 성북경찰서 보안계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안암지구대에서 연락처를 잘못 안내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성북경찰서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안계 담당자의 연락처를 찾아야 했다. 그러던 와중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다. 보안계는 '간첩 및 좌익사범'을 다루는 부서였다. 교과서에도 실렸고 고등학교 모의고사에도 출제되는 시를 그대로 옮겨적은 대자보일 뿐인데, 해당 대자보를 '간첩을 다루는 부서'에서 압수해 조사하고 있다니?

다행히 현장에 직접 출동했던 형사와 통화하며 의혹이 풀렸다. 형사가 신고를 받고 현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신고 남성'들이 대자보를 뜯어서 손에 들고 있더라는 것이다. 담당 형사는 "본인은 학교 안에 들어간 적도 없고, 이미 뜯긴 대자보를 다시 붙일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갖고 왔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궁금했다.

"형사님, 그 대자보는 시중에 버젓이 돌아다니는 시집에 수록된 시를 베껴온 것일 뿐인데 이게 조사 사유가 되나요?"
"안 그래도 저도 검색해봤어요. 김수영 시인이 1960년에 쓴 시 '김일성 만세'의 한 구절이던데요. 제목이 자극적이라 그렇지..."

'문제가 없으면 대자보를 돌려달라'는 요청에, 형사는 "일단 검토해보고 다음 날 다시 전화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난 11일 오후 4시, 고려대 학생지원부에서 '대자보를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해당 부서 A과장은 "형사가 직접 학교에 찾아와 돌려주더라"는 말과 함께 기자에게 대자보를 건넸다. 이렇게 20시간 만에 '빼앗긴' 대자보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결국 대자보는 돌려받았지만, 이미 심각하게 훼손돼 있었다.
 결국 대자보는 돌려받았지만, 이미 심각하게 훼손돼 있었다.
ⓒ 유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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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시작된 게시판, 외부인이 대자보 훼손하다니

대자보를 작성자에게 다시 돌려주고 나니, 해당 대자보가 붙어있던 정경대 후문은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작성자는 훼손된 대자보에 분노해 지난 11일 새벽 정경대 후문 게시판에 동일한 내용의 대자보를 세 장 더 붙였으나, 한 시간 만에 다시 훼손됐다.

이 사실이 페이스북 '정대 후문 게시판',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 등을 통해 알려지자 열두 시간도 되지 않아 20장이 넘는 '김일성 만세' 대자보가 해당 게시판을 뒤덮었다. 또, 원 대자보에 대한 찬반 의견을 개진하는 대자보들 역시 사이사이에 붙어 있었다.

 지난 11일, 수많은 대자보가 게시된 고려대 정경대학 후문 게시판 앞에서 학생 한 명이 대자보를 읽고 있다.
 지난 11일, 수많은 대자보가 게시된 고려대 정경대학 후문 게시판 앞에서 학생 한 명이 대자보를 읽고 있다.
ⓒ 정대후문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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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학생들에게 정경대 후문 게시판은 각별하다. 2년여 전, 전국을 뒤흔들었던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가 처음 붙은 곳도 해당 게시판이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세월호 참사 등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해당 게시판에는 적게는 수 장에서 많게는 백여 장까지의 찬반 대자보가 붙는다.

고려대 학생들은 이 게시판에서 각자의 고민을 나눈다. 설사 다수의 생각에 반하는 내용의 대자보가 붙더라도, 학생들은 반박 대자보를 게재하거나 포스트잇에 자신의 의견을 담아 대자보 곁에 붙여놓지, 대자보를 훼손하지는 않는다. 어떤 내용의 대자보가 붙어도 학교에서는 절대 관여하지 않는다. 경찰이 대자보를 압수하지도 않는다. 교직원도 경찰도 아닌, 외부인이 대자보를 일방적으로 훼손한 전례는 거의 없다.

김수영이 시를 쓴 1960년과 2015년, 얼마나 다른가

시험 기간임에도 수십 명의 학생이 대자보 훼손 사실에 반응한 것은, 학내 게시판이 오롯이 학생의 '언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통제도 없는 우리의 언로 안에서 끝없이 분노하고, 슬퍼하고, 고민한다. '진리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의 존재 가치를 가장 확실히 드러내는 곳이 학내 게시판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학내 게시판에 대한 어떤 검열도 허락되지 않는다.

반공 포로 출신인 김수영 시인은 왜 '김일성 만세'를 썼을까. '언론자유를 보장한다'면서 검열과 통제를 정당화하는 당대 현실을 비꼬기 위해서일 거다. 시인은 1960년에 시의 제목을 '잠꼬대'로 바꿔 발표하려 했지만 출판사에 의해 반려당했고, 결국 '김일성 만세'는 시인이 사망한 지 40년이 지나서야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김수영 시인에게 권력에 대한 비판은 허락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리고 반백 년이 지난 2015년, 김수영의 시는 다시 한 번 철저히 유린당했다. '김일성 만세'가 최초로 게재된 경희대에서는 교직원이 대자보를 철거했고, 고려대에서는 외부인이 침입해 대자보를 훼손했다.

기자는 이번 대자보 훼손 행위가 단순한 개인의 일탈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대자보 훼손자를 잡아 처벌한다고 우리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거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라는 포스터를 부착한 가구 공방에 10여 명의 경찰이 난입하고, 대통령 비판 유인물을 배포한 시민에게 징역 3년을 구형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력과, 이를 방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속되는 한 우리의 자유는 구조적 억압 아래 한없이 숨죽일 뿐이다.

김수영 시인이 시를 썼던 1960년과 우리가 살아가는 2015년은 얼마나 다른가. 표현의 자유는 권력의 압제 속에 얼마나 자유로운가. '자유, 진리, 정의'를 외치는 대학사회는 정말 권력의 손길에서 안전한가. 오늘은 김수영의 시를 읽어야겠다.

내가 지금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 김수영의 시, '시여, 침을 뱉어라' 중에서

○ 편집ㅣ김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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