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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이 늘었다. 내뱉지 않으려 노력해봤지만 한숨은 무의식적이다. 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믿진 않지만 내년이면 아홉수라 찜찜한 탓일까. 아니면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입학원서를 넣어야 할 때가 머지 않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면 잠시 쉰다는 핑계로 1년간 일했던 조교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해서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지만 전부 마땅치 않다.

평소 억지로라도 했던 독서도 한동안 그만뒀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쳐다보는 데 일상 대부분을 소비하고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업무적인 사고까지 터져버렸다. 정신은 혼미했고 시간은 그저 그랬다는 듯이 흘러갔다. 사고는 가까스로 수습했다. 지친 정신을 달래려 얼마간의 휴식을 취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달이 지났다.

되찾은 정신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쉬운 깨달음을 하나 툭 던져줬다. 네가 느끼는 의문들의 원인은 모두 불안 때문이라고. 내가 알고 있는, 불안을 견디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독서였다. 마침 여유가 생겨 한동안 잡히지 않던 책을 집어들 수 있었다. 여러 책을 읽어나갔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밟힌 건 <비정규 사회>란 책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내내 내가 겪고 있는 불안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부조리한 세상을 향한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불안은 어떻게 영혼을 잠식하나

<비정규 사회>, 책 표지
 <비정규 사회>, 책 표지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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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학언론사에서 함께 일했던 동기를 오래간만에 만났다. 동기는 방송국에서 프리랜서 FD로 일하고 있다. 동기는 방송국 PD 공채시험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일을 그만두면 보호장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지는 기분이 들어 두렵다고 했다. 불안하다고 했다.

동기의 이야기를 담담히 듣고 있었지만 나도 같은 기분이었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다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고 쓸쓸히 죽어가는, 비극적이지만 특별하지도 못한 그저 그런 미래가 떠올라서다.

<비정규 사회>에서 그리고 있는 한국 사회의 모습도 처참하다. 마땅히 주어진 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을 저당 잡힌 비정규직. 잘릴까봐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제대로 된 공간에서 쉴 수도 없는 비정규직. 정당한 차별을 감내해야 하는 비정규직.

이것이 불안한 현실이며 절망적인 실재다. 디스토피아가 존재한다면 모두가 불안에 사로잡혀 사는, 바로 지금 한국의 모습일 것이다. 세상을 속여 이익을 취하는 부류는 나나 동기가 겪는 불안이 극복될 수 있다며 거짓된 말들을 풀어놓는다. 자기계발이나 힐링 타령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불안은 극복될 수 없다. 불안은 개인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부터 덮쳐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부를 통제할 수 있는 개인이란 존재할 수 없지 않은가. 불안은 다만 완화될 수 있을 뿐이다.

개인의 능력만으로도 성공할 수 있다고, 불안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순간, 그것은 폭력이 된다.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이 한 언론사의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대단한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때는 왜인지 모를 거부감이 몰려왔다. 아마도 천재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소위 '노오오오력하라'는 꼰대에게 소비될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일 것이다. 꽉 막힌 현실까지 뚫어낼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예외다. 그들은 하늘이 콕 집어 지정한 사람이니까.

앞서 언급한 조성진에서부터 피겨스케이팅에서 전설적인 족적을 남긴 김연아, e스포츠 종목 중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독보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는 페이커(Faker) 이상혁까지. 왜 이들을 빗대어 청년들에게 '노력하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며 폭력을 휘두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각박한 현실은 능력주의가 환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는 데 말이다.

지금 연대가 정말 가능할까

앞서 불안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화될 뿐이라고 했다. 불안의 완화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회만이 가능한 일이다. 외부에서 엄습해오는 불안은 사회가 아니고서는 막을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이에게 스스로 불안을 극복하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동이 불안정하고 실업이 만연한 시대일수록 '일자리가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존은 고용과 임금을 통해서만 보장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생존권은 고용되어 있지 않은 사람도 보장받아야 할 독립적인 권리이다."(145쪽)

하지만 세상은 생존권 보장은커녕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며 닦달한다. 여기에다 자본가,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구성된 가상의 신분질서를 만들고, 이를 이용해 사람들을 이간질한다. <비정규 사회>는 말미에서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은 암울하다. '헬조선'이라는 자조 섞인 말 속에 암울한 현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지금 추세라면 개인은 모두 파편화 돼 버리고, 연대의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다. 책은 연대의 희망을 노래하고 있으나 희망의 가능성은 점점 옅어지고 있는 아이러니라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연대는 파편화 된 개인들 모두의 몰락 이후에서야 간신히 피어날 지도 모르겠다. 마르틴 니뮐러가 남긴 말이 폐부를 찌른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비정규 사회>(김혜진 씀/ 후마니타스/ 2015. 9/ 정가 14,000원)

이 기사는 본 기자의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비정규 사회 - 불안정한 우리의 삶과 노동을 넘어

김혜진 지음, 후마니타스(2015)


태그:#비정규직 문제, #노동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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