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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건너편에 한 아이와 할머니가 유독 눈에 띕니다. 할머니는 행여 아이의 손이 차가워질까봐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다른 한 손으론 아이의 가방과 우산을 들고 있습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지만 허리마저 굽은 할머니는 비는 아랑곳 하지 않는 듯합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보니, 어린 시절 내 손을 꼭 잡아주며 웃으시던 할머니가 떠오릅니다.

할머니는 6남매를 낳았고, 4남매를 병으로 잃고, 작은 삼촌마저 교통사고로 보냈습니다. 마지막 남은 자식이 바로 우리 어머니입니다. 내가 유일한 손녀라서 그런지 많이 이뻐해 주셨던 할머니는 가끔씩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사탕과 과자를 잔득 사다주셨고, 늘 손을 꼭 잡아주고 저를 한두 번 더 멀찍이 바라보다 가셨습니다.

친구가 되어 주고, 어머니가 되어 주신 나의 할머니

나를 한두 번 더 바라보다 가셨던 할머니.
 나를 한두 번 더 바라보다 가셨던 할머니.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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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애틋하게 저를 바라보다가 가셨던 이유를 커가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사다주신 사탕과 과자가 종종 사라지곤 했는데, 한번은 장롱 안에서 다 녹은 초콜릿과 과자, 사탕을 발견하곤 바로 어머니가 그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과 조금 다른 어머니였습니다. 죽을고비도 많았는데, 친구들과 놀다가 눈가를 다쳐 피를 많이 흘리며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찾았지만, 어머니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 '이불을 꿰매고 있으니 다 꿰맨 후 문을 열어 주겠다'고 합니다.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들었고, 간신히 문을 열어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뒤늦게 아버지가 온 후 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수술 후 눈을 떴을 땐 할머니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점차 내 어머니는 다른 어머니들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만들었고, 여러차례 고비를 넘기며 어른아이가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방 한 칸에 아버지, 어머니, 할머니와 나, 이렇게 4식구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할머니에게 물어보았습니다.

"할머니, 엄마는 이상해요. 말도 잘 안 통하고 고집이 세고 아이 같아요."

할머니는 어머니를 전쟁 때 낳았는데 피난가면서 고열로 많이 아팠지만 치료를 잘 못해 뇌에 이상이 생긴 거 같다고 하셨습니다. 할머니의 설명을 들으니 어머니가 이해되었고, 할머니가 곁에 계시니 괜찮았습니다. 할머니는 친구가 되어 주었고, 때로는 어머니가 되어 주었습니다.

어릴 때 공부를 잘 했던 저는 각종 상장을 할머니에게 갖다 드렸고 뛸듯이 기뻐하시는 모습에 뿌듯했습니다. 어디에서 이렇게 야무지고 똑똑한 게 나왔냐며 볼을 어루만져 주시고 안아주셨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어 더없이 기쁜 날들이었지만,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돌아가시고 저는 가장이 되었습니다.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하고 방학 때면 공장에서 일을 하였고, 일찌감치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할머니는 항상 나를 응원해 주시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2년간 낮에는 직장생활을 하고 저녁에는 대입반에서 공부를 하며 돈을 모아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입학식에 할머니는 꽃을 사가지고 와서 축하해주며 내 손을 꼭 쥐고 대견하다며 칭찬해 주었습니다. 마치 <집으로>라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할머니와 함께 했던 모든 추억이 떠오릅니다.

새벽마다 할머니가 간절하게 올리던 기도

나를 아끼시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나를 아끼시던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 CJ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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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신이 온전하실 때 할머니가 매일 하던 기도가 귓전에 맴돕니다. 매일 새벽 일어나자마자 자다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던 할머니입니다. 하나뿐인 손녀에게 병으로 병원생활을 하는 어머니에 이어 자신마저 짐이 될까봐 자다가 죽고 싶다는 기도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바람과 달리 할머니는 이내 거동을 못하게 되었고, 병원과 집을 오가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할머니는 하루를 굶으셨다며, 내가 죽으려고 했는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병원에서 간호하는 나에게 고맙다며 나를 안쓰러워 하셨던 할머니셨습니다. 하지만 늙는다는 것은 인간의 뇌를 파괴시키고 동물의 뇌만을 남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긴 병에는 효자가 없다고 합니다.

3년이란 시간 동안 할머니의 모습은 점차 변해갔고 모든 정을 떼어 갈 정도로 할머니는 저를 모질게 대했습니다. 그렇게 냉정하게 정을 떼어서인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간 후 저는 쉽게 할머니를 잊을 수 있었습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3년은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의 5분의 1도 안 되는데, 마지막 순간의 힘겨웠던 기억이 더 많았습니다. 구수한 내 아이의 똥냄새와는 달리, 할머니의 똥을 치우며 불쾌했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내리사랑이란 말이 그래서 있구나를 절감하게 됩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 이상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할머니를 간병하던 힘겨운 일들보다 할머니가 보내주셨던 애틋한 사랑만이 가슴에 남아 있는 듯합니다. 40대가 된 저는 여전히 어머니의 정신과 약을 타다 드리고 요양병원에 면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여전히 마음을 잘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어머니도 내게 사랑을 주셨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족이란 그렇게 좋은 것 나쁜 것을 함께 하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함께 했을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을 살면서 배우게 되었고 할머니의 사랑이 없었으면 내리사랑도 배우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내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웃으면 말해 봅니다. 많이 많이 사랑하고 항상 네 편이 되어줄 거라고. 다정히 웃으며 두 손을 꼭 잡아주시던 할머니의 웃는 모습이 떠오르는 날입니다.

○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가족사랑, #간병,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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