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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둘 갑작스런 '갑상샘암' 선고와 투병 생활로 망가진 몸. 그로 인해 바뀌어버린 삶의 가치와 행복의 조건. "갑상샘암은 암도 아니잖아"라며, 가족조차도 공감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이야기. 죽음의 문턱에서 깨달았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갈망하던 내일'이란 것을. 꿈이 있다면 당장 시작하라! '내일'이면 늦어버릴지도 모른다. - 기자 말

직장을 나오고 월급은 끊겼지만 매달 나가는 지출은 그대로였다
▲ 돈 직장을 나오고 월급은 끊겼지만 매달 나가는 지출은 그대로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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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22일 갑상샘암 수술을 받은 날이다. 그 힘들었던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벌써 2년여가 흘렀다. 지난 2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바로 내 '명함'이라고 할수 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개인의 존재는 아주 미미하다. 단지 어느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누구인지가 중요하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고 그러다보니 힘들고 지쳐도 그 명함을 잃지 않기 위해 나와 가족을 등한시 하며 살아 왔다. '갑상샘암'은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앞만 보고 달려온 나를 잠시 멈추게 하고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진정한 인생의 행복을 찾게 해준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만약 그 일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난날의 그 생활을 해왔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내 곁에서 그대로 있을 것만 같았던 어머니는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내일 모레면 여든을 바라 보는 나이다. 평생을 고생만 하고 살아온 어머니. 자식이 힘들게 버는 돈, 병원비로 쓰는 것마저 아까워서 아파도 제대로 된 검사 한번 받지 않고 진통제로 버텨가면서 하루 하루 살고 계셨다.

직장에 다닐 때는 한 집에 살아도 어머니와 얼굴 마주치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늦게 들어오면 어머니는 이미 주무시고 계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몸이 힘들다보니 어머니가 어디 아픈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살았다. 기침을 하거나 어디가 불편한 모습이 보이면 '제발 참지 말고 병원가라'며 짜증을 내기만 했었다.

홀로서기를 시작하고 어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건강에도 신경을 더 쓸 수 있게 되었다. 평소에 어디가 불편한지, 병원은 제대로 다니시는 건지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병원을 예약하고 모시고 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가 포기하고 살던 고질병을 고치기 위해 대학병원까지 모시고 갔고 고질병들은 하나씩 좋아지고 있다.

갑상샘암 수술을 받은 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직장을 쉬게 되었다. 모처럼만에 여유를 가지고 인생을 살다보니 평소에 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의 꿈과 나의 가족들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직장에 복직을 하고 1년 만에 나는 독립 선언을 했다.

대기업 사원에서 미래가 불투명한 '사업가 지망생'으로 신분을 바꾸겠다고 하니 어머니는 크게 걱정하시면서 반대하셨다. 하지만 내가 죽을 고비를 넘겨오는 것을 옆에서 봐온 어머니기 때문에 '이제는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고 살겠다'는 아들의 뜻을 끝까지 말리진 못하셨다.

지난 3월 8일. 3108일간을 근무해온 직장에서 나왔다. 매달 꼬박 꼬박 나오던 월급은 없어졌지만 매달 나가야 하는 지출은 그대로였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든 살겠지만 어머니를 모셔야 하기에 마냥 천천히 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독립을 하고 몇 달간 내 한 달 수입은 월급의 절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2010년 급한 돈이 필요해 퇴직금 마저 중간정산을 받았다. 그리고 5년이 채 안 되는 근무기간 동안의 퇴직금을 받았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지만 막상 이렇게 회사를 나오고 보니 그 퇴직금 중간정산이 후회가 됐다. 그래도 이 돈이 내가 홀로서기 할 동안의 시간을 벌어줄 돈이기에 아주 소중했다.

직장을 나오는 시점에 얼마 안 되지만 적금도 하나 만기가 되었다. 그 적금과 퇴직금을 몽땅 찾아 CMA 통장에 넣어두고 매달 모자란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 통장 잔고가 줄어들고 있었다.

줄어드는 통장잔고를 보고 있지만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돈이 떨어지면 시간을 쪼개 편의점 아르바이트라도 할 생각으로 홀로서기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은 시장이 아주 크진 않지만 투자 시간대비 효율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컴퓨터와 인터넷만 있으면 업무를 볼수 있다보니 자유롭다. 그렇기 때문에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충분히 업무를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지 않았다.

마음을 편히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이기 때문일까? 독립생활 8개월째 드디어 월 수입이 직장 다닐 때의 월급을 훌쩍 뛰어 넘었다. 물론 이 수입이 지속적으로 계속되어야한다. 들쑥 날쑥 다시 수입이 줄어들 순 있겠지만 콘텐츠 사업이라는 게 데이터가 축적될 수록 매출이 발생될 가능성도 함께 커지는 것이다보니 더 희망적이라고 생각한다.

블로그 지도에 찍힌 깃발이 늘어날수록 인생의 행복 또한 더 커져간다

어머니와 두번재 여행으로 내장산 단풍구경을 갔다.
▲ 내장산 정상 어머니와 두번재 여행으로 내장산 단풍구경을 갔다.
ⓒ 강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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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샘암 투병 생활을 시작하면서 '블로그'를 시작했다. 그리고 직장에 복귀해서 퇴사를 할 때까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블로그에 찍힌 내 지도는 전부 '부산' 아니면 '경남' 일부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렇게 넓은 세상에 살면서 아주 좁게 살아온 거다. 이제 자유의 몸이 되면 한 달에 한 번은 여행을 떠나자고 마음을 먹었다.

직장을 나올 때 내 지인들은 '해외여행'을 많이 추천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그럴려고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살면서 '제주도' 한 번 가보지 못했고 우리나라 내륙지방도 제대로 돌아다녀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캠핑'을 하면서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 내 블로그 지도엔 전국 8도 중에 전라남도와 강원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깃발이 꽂혀 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단둘이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지난 5월엔 꽃게철을 맞아 태안해안 국립공원을 다녀왔고 이번엔 단풍철을 맞아 내장산 국립공원 여행을 다녀왔다. 평소 집에선 무뚝뚝한 성격이라 어머니와 많은 대화를 나누는 편이 아닌데 바깥에 나가 오랜시간 함께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머니와도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또한 친인척 형제들과 함께 하는 모임도 정기적으로 갖기 시작했다. 그 전엔 몇 년이 지나도 얼굴 한 번 보지 않고 지내왔다. 명절에도 서로 서로 자기네 식구들 챙기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 소통 없이 지내다보니 서로 오해가 생기고 점점 멀어지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암 투병을 시작하면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것을 느꼈다. 놀라서 달려온 우리 친인척 형제들. 그 이후로 2달에 한 번씩 모여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직 '완치' 판정을 받기까지는 3년이라는 시간이 남아있다. 또한 암 경험자는 2차 암 발생율이 높기 때문에 더욱 더 조심하면서 지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 치료를 받을 때와 달리 건강을 생각하는 마음이 나태해졌다는 것을 느낀다. 자제하려던 술도 이제 많이 마시고 있다. 하지만 예전과 다른 건 '행복한 술자리'를 가지는 일이 많다는 거다. 예전처럼 불만에 가득 차서 직장 상사나 또 다른 누군가의 험담을 하면서 쓰디 쓴 술을 마셨던 날과는 다르다.

현재 나는 3가지의 명함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일을 찾아 노력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도대체 니 정체가 뭐냐?'고 묻기도 한다. 내 꿈이 뭔지도 잊고 살아온 내가 이렇게나 하고 싶은 일이 많은 사람이었냐는 거다. 나는 차근 차근 내 꿈들을 다시 이뤄가고 있다. 그것도 아주 행복하게 말이다.

모든 병은 마음에서부터 온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전 어떤 세미나에서 '스트레스 테스트' 하는 화면을 봤다. 그 화면은 내가 직장 다닐 때도 봤던 화면이었다. 그때는 엄청 화면이 울렁거리게 보였는데 신기하게도 이번엔 딱 멈춘 정지화면으로 보였다. 스트레스 지수가 낮다는 거다. 그만큼 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이 삶은 '갑상샘암'이라는 계기가 없었다면 없었을 삶이다.

모든 일은 받아들이기 나름이다. 지나간 일에 연연해 하지 말고 앞으로 다가올 날들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위해 노력한다면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해보지도 않고 '이래서 안돼, 저래서 안돼'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나도 '분석마귀'처럼 현실만을 생각하며 안주했다면 아직도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랬다면 내 가족과의 행복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돈'이 없으면 행복한 삶을 살기에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돈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면 돈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지 돈만을 먼저 생각한다면 행복한 인생을 살기 힘들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한다. '암~ 난 행복하지!'

○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갑상샘암, #가족, #여행, #행복,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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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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