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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도심을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변화시키려는 구상을 담고 있는 르 꼬르뷔지에의 파리 부아쟁 계획(Plan Voisin, Paris)
 파리 도심을 완전히 새로운 도시로 변화시키려는 구상을 담고 있는 르 꼬르뷔지에의 파리 부아쟁 계획(Plan Voisin, Paris)
ⓒ FLC/ADAG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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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들이 차량 중심의 도시를 본격적으로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근대 건축의 거장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와 더불어 세계 수많은 건축가들이 모였던 근대건축 국제회의(CIAM)부터였다. 그들은 이 회의에서 새로운 시대의 도시와 건축을 이야기하였다.

1933년 4차 근대건축 국제회의에서 '아테네 헌장'이라는 이름으로 선언된 내용 중 일부는 당시 새로운 시대를 향한 건축가의 접근법을 잘 보여준다. 주거, 생산, 휴식의 기능이 뒤섞여 있던 당시의 지저분한 유럽 도시의 모습을 뛰어넘어 이 세 가지 주요 기능을 공간적으로 분리한 채 도시 기능의 질서를 정립하고, 그 공간을 순환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차량 중심의 고속도로로 연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도시 계획이었다.

베를린의 대표적인 보행자 전용 거리 빌머스도르프 거리 (Wilmersdorf Str.)
 베를린의 대표적인 보행자 전용 거리 빌머스도르프 거리 (Wilmersdorf Str.)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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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보행도시, 보행자 친화도시, 걷기 좋은 도시 등의 용어가 유행하고 있다. 차량이 지배했던 도시 공간을 다시금 보행자가 되찾기 시작하고 있다는 증거다.

보행도시는 보행이 중심이 된 도시다. 도심으로 진입할수록 도로 다이어트를 통해 도로의 차선뿐만 아니라 폭까지 줄어든다. 자연스럽게 도심 내 진입하는 차량은 줄어들고 관련 교통시설도 줄어든다. 그리고 그만큼 보행자를 위한 보행자 전용 공간과 시설이 늘어난다.
하지만 그런 물리적인 변화만이 전부는 아니다.

아래는 독일의 도로교통법(Straßenverkehrs-Ordnung) 중 보행자에 관한 법의 일부 내용이다.

도로교통법 25절 - 보행자
"(3) 보행자는 차량에 주의한 채로 차량의 진행방향을 가로지르는 가장 짧은 방향으로 도로를 건너야 한다. 정확히 말하다면, 교통 상황에 따라 교차로, T자 교차로 혹은 신호등 주변의 (보행) 표시나 횡단보도로 건너야 한다. 교차로나 T자 교차로의 도로를 건널 때는 신호등 주변의 건널목 표시나 횡단보도를 이용해야 한다."


보통 얼룩말 무늬가 없이 횡단보도 구역을 표시하는 점선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베를린의 횡단보도 보통 얼룩말 무늬가 없이 횡단보도 구역을 표시하는 점선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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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독일의 도로에서는 교통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경우 그리고 교차로나 T자형 교차로 등 보행자 건널목이 당연히 있는 장소에서는 정해진 장소로 건너야 하지만, 그 외에는 적절한 주의를 기울인 채 도로를 횡단해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물론 몇 가지 조건들이 더 존재한다. 차량 흐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횡단보도가 30m 이내에 있을 땐 횡단보도를 이용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하다. 벨기에 역시 30m 이내에 횡단보도가 없다면, 도로 횡단이 허용된다. 프랑스는 50m 이내이다. 폴란드와 세르비아는 100m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는 법이 아니기에, 그만큼 각 나라의 기준에 따라 도로 횡단 시설을 적절한 간격으로 설치할 기준이 되거나 보행자가 100, 200m 무의미하게 횡단보도를 찾아서 우회해야 하는 불편을 감소할 법적 근거가 된다.

참고로 유럽의 영국, 웨일스, 스코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는 자동차 전용도로 등을 제외한 모든 도로에서 횡단이 허용된다.

보행자가 우선이 된 세상에서 차량이 길을 건너기 위해 차량 신호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야 하는 모습을 상상한 도시건축가 디루 타다니의 그림.
 보행자가 우선이 된 세상에서 차량이 길을 건너기 위해 차량 신호 버튼을 누르고 기다려야 하는 모습을 상상한 도시건축가 디루 타다니의 그림.
ⓒ Dhiru Thad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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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주변 도로를 막고 사람들이 걸을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보행 체험 행사이다. 고가 도로를 폐쇄하고 공원을 만드는 것은 보차분리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차량과 보행자를 서로 격리하는 것은 아주 소극적인 방식의 보행 환경 개선에 불과하다.

건전한 보행 도시의 미래는 차량을 아예 배제하거나 차량과 사람의 동선을 아예 분리해버리는 보차분리가 아닌 차량과 보행자의 안전한 공존이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도시 전역에서 보행자가 우선이 되고, 보행자가 안심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차량 중심의 도시와 차량 운전자 우선의 도로 이용 관습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너무나 불편해 보일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이 개인 차량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경제생활을 할 수 없다.

결국 보행도시가 된다는 것은 단순 도시 교통 시스템의 개혁을 넘어서 도시의 사회, 문화, 경제적 활동의 변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걸어다닐 여유가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잔치'가 될 가능성이 높다.

4차선 이상의 도심 도로에는 중간에 보행자를 위한 섬이 있는 경우가 많고, 상하행 차선의 흐름에 맞춰 안전하게 도로를 횡단하는데 도움이 된다.
▲ 제 거리의 횡단 보조 시설 4차선 이상의 도심 도로에는 중간에 보행자를 위한 섬이 있는 경우가 많고, 상하행 차선의 흐름에 맞춰 안전하게 도로를 횡단하는데 도움이 된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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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한 달간 서울의 교통사고 사망자는 38명이었고, 그중 보행 사망자는 26명이었다. 2014년 한해 베를린의 교통사고 사망자 52명이었고, 그중 보행 사망자는 21명이었다.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놀랍게도 2013년에 비해 15명 늘어난 걱정스러운 수치였다.

물론 베를린은 서울에 비해 인구가 적다. 하지만 독일에서 가장 많은 약 350만 명의 시민이 사는 가장 큰 대도시이고, 인구당 교통사고 건수는 독일 내 최소를 자랑하는 보행자에게 안전한 도시이다.

또한, 베를린에서 교통사고가 일어나는 주요 장소를 유심히 보면, 카를 리프크네히트 거리(Karl-Liebknecht-Straße), 에른스트 로이터 광장(Ernst-Reuter-Platz), 프린첸 거리(Prinzenstraße), 제 거리(Seestraße), 거대한 별(Großer Stern) 등 차량 운행이 지배적인 장소들이 대부분이다.

교통사고는 개인의 부주의 문제도 크지만, 그 부주의함을 보완해주는 것이 사회 시스템이고 도시 환경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8차선 도로를 건널 생각도 하지 않고, 하더라도 부주의하게 건너지는 않는다.

하지만 동네의 골목 그리고 평범한 도시 내 2~4차선 도로에서 사고가 난다면, 그건 부주의한 차량 운전자와 보행자뿐만 아니라 해당 도로와 주변 환경 디자인 등 도시의 교통 계획의 책임도 존재한다.

도로를 횡단하는 사람들
 도로를 횡단하는 사람들
ⓒ 신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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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행도시는 결코 자동차를 배척하는 배타적 도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다만 도시 환경에서 가장 약자인 보행자를 우선으로 하는 도시여야 한다. 지금 보행도시, 보행자 친화도시, 걷기 좋은 도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세계 수많은 도시의 도전이자 유행이다.

우리는 대부분은 자동차 그리고 대중교통에서 내리는 순간 보행자가 된다. 그리고 좋은 도시는 한정된 자원을 현명하게 나눠 쓰며 공존하는 도시였다. 보행자와 차량이 서로를 배려하며 공존하는 좀 더 건전한 도시로 나아갈지, 아니면 서로 적으로 오인한 채 한정된 도시 공간을 두고 싸우며, 서로가 분리된 도시에서 살아갈지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민들의 손에 달려있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태그:#독일, #베를린, #도시, #보행, #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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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과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1. 유튜브: https://bit.ly/2Qbc3vT 2. 아카이빙 블로그: https://intro2berlin.tistory.com 3. 문의: intro2berlin@gmx.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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