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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당시 많은 승객들을 구조한 김동수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세월호 침몰 당시 많은 승객들을 구조한 김동수씨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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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화살같이 흘러 어느덧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됐다.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는 됐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고,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중 일부는 깊은 트라우마로, 유가족들은 소중한 가족을 잃은 깊은 슬픔으로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당시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 성인 남녀 20여 명을 구조해 '세월호 의인'으로 불리는 김동수(50)씨도 '지옥 같은 형벌'을 받고 있다. 세월호 침몰과 함께 선내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의 눈빛이 지금까지 잔상으로 남아 그를 고통스럽게 한다.

심지어 김씨는 지난달 세월호 사고로 얻은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자해를 시도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의 말로 표현하자면 "당시 몸 따로 마음 따로" 움직였다고 한다. 수많은 목숨을 구했지만 그에게는 아직까지 원만한 치료나 의미 있는 포상은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에게는 살아 숨 쉬는 것이 형벌이다. 그를 보고 한 누리꾼은 "진정 이게 국가인가. 국가가 국민을 버리면 국민도 국가를 버릴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지난 7일 제주 함덕 <제주신문> 편집국에서 만난 김동수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아무것도 못했다고 한다.

"일을 하려고 해도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어요. 산불 감시요원이라도 하면서 자연 속에서 근무하며 스스로 치료를 해 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자리가 없다고 해요. 평소 술 한 잔 기울이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날 이후 술도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있어요. 술김에 '큰 일'을 저지를 것 같아서 그래요."

그의 통화 연결음과 전화 벨소리는 고 김광석의 '일어나'였다. 거친 삶 속에서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노랫말이었다. 그는 "국가가 나를 위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절망하면서도 가족과 스스로를 위해 살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다.

"구하지 못한 권혁규군, 지금까지 제일 미안해요"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좀 더 많은 승객들을 구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그는 괴로워했다.

"지난해 딸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딸과 같은 또래 학생들이라 딸 생각이 나서 단원고 학생들을 구조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했어요. 처음에는 선내 커튼 줄로 구조하는데 몸에서 자꾸 커튼 줄이 빠져서 나중에는 수도호스, 소방호스 등으로 바꿔가며 안으로 들어가 승객들 몸을 묶어 구조했어요. 그때 학생들이 '아저씨, 이 아이부터 구해 주세요'하는 거예요."

김동수씨
 김동수씨
ⓒ 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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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로 부모와 함께 이삿짐을 싣고 이주해 오던 권지연(5)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세월호 참사로 권양은 고아가 됐으며, 아빠(권재근)와 오빠(권혁규)의 시신은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지연이의 오빠가 제일 앞에 있었어요. 끌고 나오려고 별 수단을 다 동원해서 결국 업고 나오는데 소방호스 줄이 커서 그만 그 사이로 빠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제대로 못 구했어요. 구하지 못한 그 아이가 지금까지 제일 미안해요."

김동수씨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듣고 있던 기자도 함께 눈물이 맺혔다. 세월호 침몰의 상처는 그렇게 많은 이들에게 '아픈 연대의식'을 심어주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정부의 지원과 특별법 시행은 시원치가 않다.

"논술 선생하고 있는 집사람이 그러는데 교육 받고 있는 아이들이 '선생님 남편 무슨 상 받았어요?' 물어본다고 해요. 그래서 아무 상도 안 받았다고 했더니 아이들이 이상하다는 투로 '도둑을 잡아도 상을 주고 불을 꺼도 상을 주는데 왜 아무것도 안 주느냐'고 물었다고 하네요."

"트럭 대출 빚 다 갚고 집도 사려고 했는데..."

그는 세월호 침몰 당시 자신과 가족의 생계수단이자 희망인 4.5t트럭에 농협의 방호벽 자재를 가득 싣고 제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 역시 일절 없었다.

"다른 화물 기사분들 육지에 넘어가서 하루에 500~700km 운행하고 돌아올 때 전 1500km 운행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어요. 한 달에 400백~500백만 원 벌었어요. 트럭 대출 빚  값아가며 이제 1년이면 할부도 끝나고 그 다음에 돈 모아서 집도 사려고 했는데..."

화물 기사 일을 하기 전, 김씨는 활어 횟집과 유통 사업을 했다. 하지만 회를 거의 원가에 저렴하게 파는 그에게 주변에서는 '장사하면 안 되겠다'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처남이 하고 있는 화물 운수업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4년 6개월 동안 화물 기사로 일했다.

모두가 두려움에 떨며 세월호를 빠져 나올 때 조금이라도 승객들을 더 구하고자 했고, 살아왔지만 아직까지도 세월호의 유령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도 어쩌면 이런 순수함이 원인이 되지 않았나 싶다.

신문사 편집국까지 직접 찾아온 김동수씨. '이제는 운전이 두렵다'며 함덕 집까지 데려다 줄 수 있냐는 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댁까지 모셔다 드렸다. 그는 차 속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집사람이 도에 의상자 신청을 하러 간다고 해요(김씨는 지난 1월 의상자 신청을 했지만 서류 조건이 까다로워 신청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결국 심사 대상에서도 빠졌다.- 편집자주) 아이들에게(김씨에겐 딸이 두 명 있다) '차라리 그때 내가 죽었으면 너희들에게 혜택이 있었을 텐데 미안하다'고 말해요. 나는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도 우리 딸들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김씨를 만나고 돌아오던 그때 제주도 함덕 하늘은 시리도록 맑고 푸르렀다.

○ 편집ㅣ홍현진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역일간지 <제주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태그:#김동수, #세월호, #제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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