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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 후타오샤(호도협)의 마지막 마을 다쥐에서
▲ 구름의 남쪽, 그곳으로 윈난 후타오샤(호도협)의 마지막 마을 다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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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 다리의 얼하이후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일상
▲ 구름의 남쪽, 그곳으로 윈난 다리의 얼하이후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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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이륙했다.

나는 지금 구름(雲)의 남쪽(南),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찾아가고 있다. 처음부터 나는, 운남성의 윈난(雲南)이라는 이름에는 어쩐지 바람과 황토 냄새가 묻어있다고 생각했다. 이번 여행을 생각할 때마다 앞산 봉우리에 구름이 걸려있고, 그 아래로 붉은 황톳길이 바람결에 따라 마을 초입까지 이어지는 풍경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비행기가 점차 고도를 높인다. 구름이 가까워지고, 하늘에서 보는 세상이 언제나처럼 낯설어진다. 내가 1년 365일을 24시간씩 살아온 세상이 빠르게 작아지며 한 손에 쥐어질 듯 간단히 조망된다. 건물과 가로수와 도로 표지판에 가려 그 모습을 조금만 드러내던 산들이 산자락을 길고 또렷하게 내보인다.

북경에서 환승하는 쿤밍으로 가는 길
▲ 세상으로부터 줌아웃(zoom-out) 북경에서 환승하는 쿤밍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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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달린다.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들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분명, 내 자신이 소인국의 거인이 된 느낌과는 다르다. 내 삶을 저 아래 그대로 남겨두고 줌아웃(zoom-out)하여 나 홀로 서서히 빠져나오는 느낌이다. 그곳 삶 속에서 쉼 없이 분투하고 있는 나를 남겨 두고 나의 삶 밖으로 빠져나온 또 다른 나… 그런 느낌.

다시 3시간 후에는 줌인(zoom-in)하여 중국이라는 또 다른 삶의 미시적 장면 속으로 돌아가겠지만, 문득, 내 여행도, 내가 여행을 갈구하는 이유도 내 미시적 삶 속에서 줌아웃하고 싶은 본능적 움직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말하자면, 내게 여행이란 내가 속한 내 주변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나 자신을 멀리 빠져나와 낯설게 나를 바라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베이징에서 중국 국내선 항공편을 한 번 갈아타고 쿤밍(昆明) 공항에 도착했다. 사람이 많았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타는 사람도 많았고, 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많았고, 출입국 수속을 위해 줄을 선 사람도 많았다. 그랬다. 아내와 내가 선택한 여행지는 중국이었고, 그러므로 어디에나 사람이 많았다.

쿤밍 공항에 도착하고서야, 여기도 중국 땅임을 인식하다.
▲ 또 다른 세상으로 쿤밍 공항에 도착하고서야, 여기도 중국 땅임을 인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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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성이 대륙의 남서쪽 변방에 위치하고, 소수민족이 가장 많이 살고, 차마고도(茶馬高道)의 출발지이며, 티베트 고원 아래 구름의 남쪽에 자리 잡은 땅이라고 해서 이곳 역시 중국이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 것이다.

픽업 나온 게스트하우스의 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온다. 당연히도 붉은 황톳길 대신 회색의 도로가 직선으로 내달리고, 여기저기 공사 중인 고층빌딩들이 현대화의 상징처럼 구름을 두른 산봉우리를 대신하고 있다. 어디에도 황토 냄새가 묻어나지는 않았다.

윈난 리장의 아침
▲ 이른 아침, 도시의 얼굴 윈난 리장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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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곳 쿤밍에서 다리(大理), 다시 리장(麗江), 그리고 후타오샤(虎跳峽)을 거쳐 샹그릴라(香格里拉)까지 17일이라는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북쪽 고산지역으로 다가갈 생각이었다. 그 어디쯤에서부터 내가 상상해온 '구름의 남쪽' 풍경과 냄새와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혹은 만나지 못하게 될지 생각해보기에 도시의 밤은 이미 너무 깊고 어두웠다.

첫날밤을 보낼 게스트하우스는 도심 중앙으로부터 남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위치한 신흥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만큼 '운남하늘 게스트하우스'는 깨끗했다. 주인장은 타국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많은 한국 분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한때 오래된 여행자였고, 여행을 하다 이곳 운남이 좋아져서 정착하였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지난겨울 라오스 방비엥에서 차와 술을 얻어 마시며 일주일 가까이 시간을 보냈던 '시실리 게스트하우스' 주인장과는 '형-동생'하는 사이란다. 이렇게 좁다. 여행할 세상은 멀고 넓지만 여행자들의 세계는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가깝고도 좁다고 느낄 때가 많다.

얼마 전에는 자전거를 타고 라오스에 다녀오기도 했다니, 대단한 체력이다. 힘들겠지만, 다르겠지 그리고 많이 느끼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거실 책장을 둘러보다 내 눈길이 한 곳에 문득 가닿았다.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 라는 제목. 967일 낯선 여행길에서 만난 세상 사람들, 이라는 부제를 단 아내와 나의 첫 책이 김훈 선생님의 <남한산성> 옆에 놓여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나의 첫 책
▲ 졸저, 길은 사람사이로 흐른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나의 첫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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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은 언젠가 여행을 떠나던 날 어느 선배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여행길에서 만난 한 아가씨의 연락처를 책 안쪽 표지에 적어두었는데, 안타깝게도 책을 잃어버렸으며 지금의 책은 그 이후 다시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내 책이 그 아가씨와의 인연을 연결해주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그 대신 길 위에서의 추억을 연상시켜주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신기하고 반갑고 부끄럽고 고마움을 느낀다. 내 손에서 떠나보낸 '길 위에서 쓴 나의 이야기'를 길 위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반갑고, 지금의 나는 내 글 속의 나와 얼마나 같고 또는 달라졌을 지를 가늠할 수 없어 부끄러우며, 일상에 포박당하지 않고 여전히 여행자로 길 위에 서있는 내가 한편 고마운 것이다.

홍등에는 여행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무엇인가 있다.
▲ 윈난의 밤 홍등에는 여행자의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무엇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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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나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도저히 세상의 현실을 현실로 살아갈 수가 없어 방황하다, 길을 떠났다. 그리고는 967일. 다시 돌아온 현실은 트랙을 한번 벗어난 자에게 내어줄 관대한 가슴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세상의 안과 밖 그 사이 어디쯤에서 부유하며 견뎌내야 할 시간만이 내 앞에 놓여있었다.

나는 다시 현실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대학수능시험에 응시했고 다행히도 나이 마흔에 교육대학의 늦깎이 대학생이 될 수 있었으며, 지금은 제주도의 작은 초등학교 교사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고맙다. 교사로서의 작은 일상이 있어 고맙고, 그 일상 속으로 사라지지 않고 다시금 여행자로 살 수 있는 용기가 내게 있어 더욱 고마운 것이다.

윈난에서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제 구름의 남쪽을 찾아갈 시간이다. 다시, 여행자가 되어. 


태그:#윈난 여행, #리장, #다리, #쿤밍, #중국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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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제주에서 살고 있다. 나이 마흔이 넘어 초등교사가 되었고, 가끔 여행학교를 운영하고, 자주 먼 곳으로 길을 떠난다. 아내와 함께 한 967일 동안의 여행 이야기를 묶어 낸 <길은 사람 사이로 흐른다> 이후, <시속 4킬로미터의 행복>, <아이들, 길을 떠나 날다>, <여행자의 유혹>(공저), <라오스가 좋아>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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