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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 진관동의 구파발은 경계의 땅이다. 서울시와 고양시의 경계고, 북한산과 김포평야의 경계고, 창릉천의 축대를 따라 늘어선 벙커와 대전차 장애물을 기준으로 유사시 적군과 아군이 나뉜다.

북한산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 1번 국도를 차단하는 헌병대 검문소에서 북한산 초입인 응봉에 이르는 길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기관총 진지 여러 개가 북쪽을 노려본다. 길게 늘어선 진지들은 하나로 연결돼 긴 방어선을 이룬다. 능선에서 시선을 아래로 향하면 모든 도로가 기관총 사거리에 들어온다. '여기부터는 서울입니다'라는 표지판 아래로 차들이 급히 오갔다. 거기서부터, 서울이었다.

전쟁 3년간, 3차례 민족 대이동

1951년 4월, 70만의 중공군이 서울 탈환을 위해 서부전선으로 밀고 내려왔다. 전선은 임진강에서 의정부까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유엔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지금의 구파발에 다시 방어선을 쳤다. 허겁지겁 쫓기듯 급조된 참호들은 금방이라도 깨질듯 위태로웠다.

방어선 남쪽의 사람들은 짓다 만 흙벽돌집을 버리고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서울이 무너지면 전선이 속절없이 남으로 밀려갈 것을 사람들은 이미 두 차례의 피난을 통해 직감하고 있었다. 그렇게 단군 이래 최대의 민족 대이동이 전쟁 3년간 세 차례나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1·4 후퇴, 그리고 춘계 대공세였다.

돌이켜보니 피난민을 소재로 한 전쟁영화는 기억에 없었다. 후대의 사람들이 기념하고 기리고 싶어 하는 것들은 모두 전장에 있었다. '왜 이런 전쟁을 해야만 했을까'를 묻는 그 성찰마저도 군인들을 통해 묻고 들었다.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비참한 기억은 도서관의 자료와 다큐멘터리 속 증언으로 조용히 남았다.

죽어가는 이를 보고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애써 외면해야 했고, 정부의 행정력보다 사적인 인맥이 큰 힘을 발휘했으며, 전선의 움직임에 따라 정처 없이 떠도는 생활상이 자료 속엔 그득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고, 보고도 지나쳐야 했다. 생존은 그저 각자의 몫이었다.

전쟁은 그렇게 수백 년 간 자리 잡고 살던 각자의 고향을 뿌리째 들어냈다. 1999년 국방군사연구소의 <한국전쟁피해통계집>에는 남북 모두 320만여 명의 피난민이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떠돌았다 쓰여 있다. 모두가 죽지 않으려 해주에서 서울로, 함흥에서 통영으로, 평양에서 제천으로 내려왔다.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이들은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다. 남에서 남으로 피난한 이들도 사정은 같았다.

전선의 움직임과 좌우익간의 보복과 살육으로 쑥대밭이 된 저마다의 고향은 이미 이전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천만 명이 가족과 찢어졌다. 어쩌면 그때 모두가 고향을 잃었는지 모른다. 명절 때마다 한강의 다리를 건너 꾸역꾸역 남쪽으로 줄지어 달려가는 그 고향이란 게, 정말 우리가 알던 그 고향인 걸까.

타향살이가 숙명이 된 한국인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빌딩에서 바라본 목동아파트 2·3단지 전경(자료사진).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빌딩에서 바라본 목동아파트 2·3단지 전경(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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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 타향살이는 한국에 태어난 모든 이들의 숙명이 됐다. 전쟁이 끝나고 자리 잡은 근본 모를 고향은 그마저도 돈을 벌기 위해 떠나야만 하는 곳이 됐다. 국가는 지방의 젊은이들이 서울로 와 일해주길 원했고, 저곡가 정책으로 농가를 몰아세우며 도시로 떠밀었다. 1970년부터 10년간 300만 명의 사람들이 시골에서 서울로 몰려들었고 20년 뒤 100만 명이 추가로 상경했다. 많은 이들에게 서울은 떠나온 곳이었다.

소설가 김훈이 에세이 <바다의 기별>에 적은대로 "서울은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니"었다. 서울은 타향이었고 가진 것이 없을수록 타향에서 타향으로 떠돌아야 했다. 판자촌 사람들은 도시정비 사업에 떠밀려 정처 없이 떠돌았고, 소자본 임차인들은 건물주의 투기로 각자 상수동으로 연남동으로 짐을 쌌고, 공부를 위해 상경한 지방의 학생들과 간신히 둥지를 튼 신혼부부들은 집주인의 요구에 의해 서울 변두리로 떠나야 했다.

올해 8월 4일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인포그래픽스 '서울시민은 현 주택에서 얼마나 오래 거주하나'에 따르면 서울사람들은 평균 4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다녔다. 서울시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시내 5052개 상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상가임대정보 및 권리금 실태조사'에 따르면 자영업자의 평균 임대기간은 1.7년이었다.

누군가가 떠난 자리에는 재개발과 도시정비 사업으로 또 다른 이의 타향살이가 시작됐다. 그 안에서도 누군가는 세를 줬고, 세를 들었고, 가게를 열었고, 떠났고 새로 들어앉았다. 타향살이를 시작한 세대가 자식을 낳고 대학에 보낼 정도의 시간이 흘렀지만, 서울에 태어난 그 자식들마저 서울은 고향일 수 없었다.

서울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그래서 잠재적 피난민이다. 서울은 누구에게도 진정한 고향일 수 없었다. 서울의 집값이 폭등하고 땀흘려 일하기보다 돈이 돈을 버는 것이 지상의 목표가 되면서 타향이 새로운 고향이 될 거라는 희망은 그만큼 멀어졌다.

전 생애에 걸친 피난 생활은 오히려 더 고단해졌다. 개인과 가족의 사적인 삶이 피난길이었기에 밥벌이를 위해, 또는 밥벌이를 준비하기 위해 뛰어들어야 하는 사회 역시 전쟁터가 됐다. 피난민의 생존경쟁엔 전방과 후방이 없었다. 모두가 한강에 배수진을 친 듯 살았다.

아이들은 그런 어른들의 전투적 삶을 하나 둘 내면화했다. 가정과 사회는 그것을 말리기보다 오히려 독려하고 자극했다. 모든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고 가르쳤고, 중학교로, 고등학교로 가는 길목마다 그것이 인생에 전부인 듯 압박했다. 부모 세대는 학교에서 인생에서 앞서가야만 하는 이유를 아이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려줬지만, 그만큼 "왜 사니?"라는 물음에는 취약해졌다.

돌아갈 곳 모르는 젊은이들, 찾아갈 곳은?

아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의 낙오에 감정을 이입하지 않는 데 익숙해졌고, 스스로가 체득한 경쟁논리 속에 짓눌려 괴로워했다. 그렇게 커왔고, 또 그렇게 자라난다. 강남 학원가의 불야성과, 노량진 고시촌의 서글픔과, 한강의 수온을 알려주는 레저용 어플리케이션은, 그래서 청춘들의 스마트폰과 성적표 속에서 아슬아슬 공존한다. 서울에서 태어난 세대에게조차 서울은 고향이 아니니까. 돌아갈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마지막으로 찾아갈 곳이라곤, 고작 한강의 차가운 물속일 수밖에 없는 거다.

작년 여름, 여의나루 공원에서 누군가 강물에 몸을 던졌다. 토요일 저녁이었다. 바로 뒤에선 시민 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잔디밭에선 아이들이 뛰어 놀았고 연인들이 달달한 말을 주고받으며 키스를 했다. 구조대가 한 시간에 걸쳐 시신을 찾아 건져 올리는 순간, 음악회 무대에서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아이들이 웃었고 가족들이 박수를 쳤다.

전형적인 행복의 그림이 그려지는 가운데 온 세상이 죽은 이더러 잘 죽었다고 축하하는 기묘한 모양새가 연출됐다. 강물위로 건진 시신을 목격한 이들은 그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각자 살아있다는 사실에, 웃고 있다는 지금에 안도하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60년 전 과거와 지금은 과연 다른가, 같은가. 생존을 위한 생존 잇기의 끝에는 결국 생존만이 남는 것을 알면서도 피난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구파발 방어선의 남쪽에서, 그리고 한강에서.


태그:#피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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