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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 구미대교 쪽에서 바라본 금오산
 경부고속도로 구미대교 쪽에서 바라본 금오산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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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구미의 금오산성(경상북도 기념물 67-1호)은 976m의 험준한 산 정상부와 계곡을 이중으로 둘러싼 석축 산성이다. 이 성의 최초 축성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려 때 왜적의 침탈을 피해 백성들이 들어가 성을 쌓고 지켰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고려 말기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특히 이 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왜적에 대항하는 중요 거점지로 활용되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금오산성 사적비>의 표현)'

하지만 금오산 주등산로 입구에 세워져 있는 사적비를 읽은 후 금오산을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도 추측하자면, 사적비가 세워진 1991년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석 뒷면의 문장에 눈길을 준 사람은 별로 없었을 듯하다. 그 탓에, 금오산은 유명해도 금오산성은 그 빛을 많이 잃었다.

 
금오산 주등산로 입구에 세워져 있는 금오산성 사적비. 배설 장군 등 금오산성을 축성하는 데 공을 이룬 사람들의 이력과, 산성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나치는 사람들 중 이 사적비의 내용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금오산 주등산로 입구에 세워져 있는 금오산성 사적비. 배설 장군 등 금오산성을 축성하는 데 공을 이룬 사람들의 이력과, 산성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나치는 사람들 중 이 사적비의 내용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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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성 사적비> 읽은 후 등산하는 사람 거의 없어

금오산성은 1410년(태종 10)에 개수된 이후 180여 년 동안 버려진다. 전쟁 없이 긴 세월을 보낸 탓에 국방을 소홀히 한 폐해가 금오산성에도 밀어닥쳤던 것이다. 그 결과 <칠곡문화대전>은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임진왜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5년(선조 28)에 이르러 비변사가 '금오산성과 인동의 천생산성을 수축하여 대진(大鎭)을 만들 것과, 이 중책을 선산부사 배설로 하여금 전담하도록 도체찰사 이원익의 의견을 물어서 처리함이 옳다고 임금에게 진언했다'고 기록한다. 왜란이 발발한 지 4년이 지나서야 금오산성은 배설(裵楔)에 의해 중수되었다는 말이다.

배설은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이었다. 당시 금오산성의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선산(구미 포함), 개령, 김천, 지례 네 개 군에 이르렀다. 배설이 중수를 마치자 금오산성은 1597년(선조 30)부터 경상도 체찰사의 본영으로 사용된다. 이는 금오산성이 '왜군의 북진을 막고 임란 7년을 종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금오산성 사적비>의 표현이 역사적 사실임을 증언한다. 그 이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국방 정책이 강화되자 금오산성에는 3500명이나 되는 병력이 상주한다.

금오산성의 북문인 대혜문
 금오산성의 북문인 대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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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성의 내성 흔적이 주등산로 일부에 남아 있다. 그러나 복원이 되지 않아 대부분 무너지고 망실된 모습을 보여준다.
 금오산성의 내성 흔적이 주등산로 일부에 남아 있다. 그러나 복원이 되지 않아 대부분 무너지고 망실된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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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금오산성에서 가장 규모가 크게, 아니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유적은 북문인 대혜문(大惠門)이다. 대혜문에 닿는 길은 크게 두 갈래이다. 하나는 사적비에서 천천히 걷는 길이다. 크게 가파르지 않고 시간도 대략 20분 가량 소요되어 누구나 부담없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면 2분 만에 대혜문에 당도한다.

금오산성 북문에 '큰 은혜'를 뜻하는 이름이 붙은 까닭

성문 이름이 어째서 '큰 은혜'인지 궁금하다. 민간의 전언에 따르면, 대혜문 이름은 이 북문에서 약 20분 걸으면 닿는 대혜폭포에서 유래했다. 이 폭포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금오산을 울린다"고 하여 명금(鳴金)폭포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그보다는 "폭포에서 흘러내린 물이 선산 일원의 농민들에게 큰 혜택을 준다"는 뜻에서 대혜폭포로 일반화되었다.

금오산성을 중수한 배설도 대혜폭포의 의미에 근거하여 성 안에 혜창(惠倉)을 설치했다. 백성들과 군사들을 먹일 양식 저장 창고를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또 배설은 대혜문에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닿는 내성(內城) 안 곳곳에 사람들을 위한 일곱 우물과 말들을 위한 아홉 연못을 팠다. 물이 계곡을 타고 그냥 흘러가도록 두어서는 외적에게 장기간 포위되었을 때 농성(籠城)을 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배설이 판 우물과 못을 "구정칠택(九井七澤)"이라 불렀다. 구정칠택의 물은 넘쳐흘러 대혜폭포의 줄기를 우렁차게 가꾸었다.

대혜폭포 옆 거대한 바위에는 배설 장군이 금오산성을 쌓고 성 안에 샘과 못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 옆으로 오르면 도선대사와 길재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도선굴이 있다. 지난 11월 20일,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예술인 자격으로 대구공정여행A스토리협동조합의 11월 30일 금오산 역사기행 사전답사를 이끌면서 금오산 곳곳의 역사유적에 대해 해설을 했다.
 대혜폭포 옆 거대한 바위에는 배설 장군이 금오산성을 쌓고 성 안에 샘과 못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 바위 옆으로 오르면 도선대사와 길재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도선굴이 있다. 지난 11월 20일, 한국예술인복지재단 파견예술인 자격으로 대구공정여행A스토리협동조합의 11월 30일 금오산 역사기행 사전답사를 이끌면서 금오산 곳곳의 역사유적에 대해 해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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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문화대전>은 "금오산성의 수축은 당시 선산부사 배설에 의해 완성된 듯하며, 승병대장 유정도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한 것을 알 수 있다"면서 "배설은 산성을 수축하고 진중에 아홉 개의 샘과 일곱 개의 못을 팠다. 이는 대혜폭포 아래 도선굴로 가는 길목 바위에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이라고 각자한 글귀에서 확인된다"고 말한다.

'승병대장 유정이 금오산성 수축에 조력하여 국난에 크게 공헌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때, 금오산성 중수를 완성하고 구정칠택을 만들어 선산 일대 백성과 군사들에게 임진왜란 극복의 토대를 제공한 배설의 공로는 그 이상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삼국지>의 촉장 마속이 마실 물 없는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가 제 군사들을 위장 사마의에게 몰살시키고, 자신은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킨 옛일을 감안하면, 금오산성 중수는 물론이려니와 배설이 구정칠택을 만든 것은 뛰어난 지혜의 발휘라 하겠다.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구정칠택을 판 사람은 누구일까?

그러나 금오산 주등산로 입구의 <금오산성 사적비>가 외면 당하듯, 대혜폭포 옆 거대 바위의 배설 관련 각자 또한 한문 표기인데다 잘 드러나지 않는 높은 곳에 새겨져 있어 보통사람들에게는 눈에 띄지도, 뜻이 파악되지도 않는다. 게다가 문제는 그 정도에서 멈추지도 않는다. 대혜문 및 내성 흔적의 출입구, 그리고 내성 안 유적지 그 어느 곳의 안내판에도 배설의 이름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금오산 거의 정상 가까이에 있는 분지에는 1991년까지도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며 살았다. 이곳은 겨울 기온이 영하 30도에 이르는 고냉지이지만 물이 많아 산 아래 마을보다도 살기에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 이전부터 이곳에는 산성이 축성되었고, 임진란 때 배설 장군이 중수했으며, 한때 3500명의 군사들이 상주했다.
 금오산 거의 정상 가까이에 있는 분지에는 1991년까지도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며 살았다. 이곳은 겨울 기온이 영하 30도에 이르는 고냉지이지만 물이 많아 산 아래 마을보다도 살기에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고려 이전부터 이곳에는 산성이 축성되었고, 임진란 때 배설 장군이 중수했으며, 한때 3500명의 군사들이 상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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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누가 금오산성을 중수하고 칠정구택을 팠을까? 금오산성 대혜문과 내성 안 유적지를 방문하고도 답사자들은 그 사실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해 본다. 세계사적 또는 국사적 인물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국가와 사회 공동체를 위해 피땀흘려 살다가 죽은 이들을 이처럼 묻어버려서는 우리 공동체가 건강성을 간직할 수 없다.

우리나라 땅은 광개토'태'왕 혼자서 넓혔고, 우리나라 문화는 세종'대'왕 혼자서 일구었고, 임란 왜군은 '성웅' 이순신 혼자서 다 물리쳤고, 독립만세운동은 유관순 '누나' 혼자서만 한 것으로 아이들이 기억한다면, 어떻게 역사교육이 제대로 설 것이며, 민족정기는 어떻게 바로 세워질 것인가? "1등이 아니면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라는 왜곡된 선전문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역사교육을 계속할 것인가?

우리 역사교육 "1등이 아니면 기억하지 않습니다" 수준

내 집안의 선조, 내 마을의 옛어른, 내가 사는 지역사회의 선현들 중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아이들은 그들을 준거인물로 삼아 올곧게 자라날 수 있다. 병사가 있어야 군대가 존재할 수 있고, 일개 병사의 죽음도 결코 대장군의 죽음 못지않게 가치있는 전사라는 인식이 일반화될 때 비로소 우리 사회의 공동체 정신도 흔들림없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아이들은 자라서 하나같이 왕이 되고 대장군이 되어야 한다. 그야말로 어불성설 아닌가!

서유교는 처음으로 금호강에 다리를 놓아(그것도 사비로) 영남대로를 걸어 서울로 가는 수많은 경상도 사람들이 옷을 벗지 않고도 강을 건널 수 있게 했다. 이서는 해마다 홍수로 고통받는 대구사람들을 위해 사비를 들여 물길을 바꾸었다. 그러나  대구 북구 팔달교 옆 서유교 비(왼쪽)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은 듯 놓여 있고, 대구 수성구 상동 이서공원에는 '이서 공원' 표지석도 없다.
 서유교는 처음으로 금호강에 다리를 놓아(그것도 사비로) 영남대로를 걸어 서울로 가는 수많은 경상도 사람들이 옷을 벗지 않고도 강을 건널 수 있게 했다. 이서는 해마다 홍수로 고통받는 대구사람들을 위해 사비를 들여 물길을 바꾸었다. 그러나 대구 북구 팔달교 옆 서유교 비(왼쪽)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은 듯 놓여 있고, 대구 수성구 상동 이서공원에는 '이서 공원' 표지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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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도 이런 사례가 있다. 서유교(徐有喬)와 이서(李漵)에 관한 푸대접이 바로 그것이다. 서유교는 부산, 대구 등 경상도 사람들이 영남대로를 통해 한양에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하는 금호강에 사상 최초로 돌다리를 놓은 인물이다. 그것도 사비를 들여서 그렇게 했다. 서유교 덕분에 경상도 선비와 상인들은 처음으로 옷을 벗지 않고도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다.

서유교는 1849년부터 1851년까지 2년 동안 대구판관으로 재임했다. 하지만 서유교의 공로를 기리는 조그마한 비석은 그가 다리를 설치했던 곳 인근의 팔달교 아래에 숨은 듯 놓여 있다. 팔달교 입구의 넓은 잔디밭은 거대한 '바르게 살자' 비석이 차지하고 있고, <判官徐有喬永世不忘碑(판관서유교영세불망비)>는 '바르게 살자' 뒤편 비탈진 기슭에, 그것도 잡목들로 접근로가 가려진 곳에 일부러 감추기라도 한 양 외로이 서 있다. 그 탓에, 웬만한 답사자는 현장에 가서도 비석을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서유교영세불망비가 왜 이 곳에 세워져 있는지에 대한 안내판도 없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맹세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이서 또한 그에 못지않게 홀대받고 있다. 이서는 대구판관으로 일하던 1776년, 대구 사람들이 해마다 겪는 홍수로 큰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역시 서유교처럼 사비를 들어 물길을 바꾸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기려 비를 세웠다. 하지만 그 비는 현재 엉뚱한 곳으로 옮겨져 있고, 비석 둘레에 꾸며진 상동교 옆의 소공원 입구에는 이서에 관한 안내판 대신 '바르게 살자'는 빗돌이 눈에 두드러지는 목을 차지한 채 번쩍이고 있다.

배설, 서유교, 이서 모두 잊혀진 이름

게다가 배설은 '잊혀진 이름' 정도에서 그치지도 않았다. 영화 <명량>은 명량해전에 참군하지도 않은 배설을 왜와 내통한 첩자로서 이순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하자 도주하다가 아군의 화살에 맞아 죽은 인물로 그렸다. 서사구조상 그런 반동(反動)인물의 배치가 꼭 필요했더라도 가공의 장수를 한 명 등장시켰으면 될 일인데, <명량>은 굳이 역사의 실존인물을 극단적으로 왜곡함으로써 배설을 '두 번 죽이는' 잘못을 저질렀다. 산성을 중수하고 칠정구택을 준설하는 공로를 세우고도 정작 금오산성에서는 잊혀진 배설이 <명량>을 통해  터무니없는 악역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빨리 구미시는 금오산 내의 각종 안내판에 배설의 이름을 밝혀두어야 한다. 배설이 금오산성을 중수한 일은 개인의 문집도 아닌, 엄연한 국가기록물 <조선왕조실록>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 아닌가! 자라나는 아이들이 전국 곳곳의 역사유적지 안내판을 보면서 "나도 저런 인물이 되어야지!"하고 생각하도록 준비하는 일, 그것은 우리 기성사회 성인들 본연의 책무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다 본 금오산성 대혜문 일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다 본 금오산성 대혜문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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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금오산, #금오산성, #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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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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