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0개의 2인용 식탁이 한 데 모여 하나의 식탁이 됐다. 열다섯 개의 와인 잔, 열다섯 쌍의 포크와 숟가락, 열다섯 개의 냅킨이 차례로 올랐다. 손님이 모두 도착하지 않은 실내는 쌀쌀한 외풍이 가득했다. 이윽고 한 사람씩 문을 열고 각자 원하는 자리에 앉았다. 장대익 교수의 <다윈의 식탁>. 도착한 사람마다 외투를 벗는 대신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자연스레 대화 주제가 좁혀 들어갔다.

식탁 위에서 펼치는 논쟁, 그 알찬 식사

<다윈의 식탁>의 저자 서울대 자율학부교수 장대익교수가 27일 서울시 마포구 한 식당에서 독자들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다윈의 식탁>의 저자 서울대 자율학부교수 장대익교수가 27일 서울시 마포구 한 식당에서 독자들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책은 다 읽고 오셨어요?"
"전 3년 전에 읽었어요. 오늘 이 자리 덕분에 한 번 더 읽었고요."

대학생, 대학원생, 생활 경제 상담가, 번역가, 초등학교 선생님, 회사원, 취업 준비생...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편집자를 비롯한 출판사 식구 세 명도 함께 했다. 왁자한 수다가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 회색 재킷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중년의 신사가 문을 빼꼼 열었다. 이날 식탁을 차린 이는 <다윈의 식탁>의 저자 장대익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였다. 

지난 27일 오후 7시 30분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구석에 자리한 파스타 가게에서 열다섯 사람이 만났다. 한두 번 강연장에서 스쳐 만났거나, 대부분은 초면에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하나. 머릿속에 저자가 던져 놓은 각자의 질문을 '묻고, 다시 답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대는 바로 '식탁'이었다. 장대익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독자와 이런 방식으로 만남을 해볼 생각을 하곤 있었지만, 실제로 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외국의 저자들이 독자와 만날 때 자기 책을 읽어주는 모습이 부러웠는데요, 그래서 저도 한 대목 읽어보고자 합니다."

장 교수가 읽어내려간 부분은 책 <다윈의 식탁> 268페이지부터 등장하는 '식탁하다' 부분이었다. '식탁하다'는 그가 직접 만든 용어다. 교수가 책 내용을 읽어내려 가는 동안 토마토 파스타와 샐러드, 피자 등 준비한 음식이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약간의 긴장으로 몸이 굳어 있던 독자들도 외투를 하나씩 벗고 식탁에 팔을 괴거나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전략) 가끔 엉뚱한 추론을 해봅니다. '인간의 언어가 식탁 때문에 진화한 것은 아닐까'라고요. 개미도 먹이를 공유하긴 하지만, 식탁을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일 외계인 행동생태학자가 제 3자의 눈으로 호모사피엔스의 식탁 풍경을 관찰한 후 보고서를 썼다면, '인간에게 식탁의 의미는 소통'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 이것이 저의 어설픈 '식탁론'입니다. '논쟁'이라는 딱딱한 용어 대신에 '식탁'이라는 정겹고도 생생한 용어를 쓴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다윈의 식탁/ 일부 210p~268p>

'반전'과 '이야기'가 있는 과학책

서울대 자율학부교수 장대익교수의 저서 <다윈의 식탁>.
▲ 장대익 교수의 <다윈의 식탁> 서울대 자율학부교수 장대익교수의 저서 <다윈의 식탁>.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책 <다윈의 식탁>은 사실과 소설의 요소를 버무린 '팩션(faction)'이다. 진화 생물학의 아버지 윌리엄 해밀턴 박사가 세상을 떠나자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제이굴드, 리처드 르원틴, 에드워드 윌슨 등 세계 곳곳의 진화 학자들이 그의 장례식에 '우연히' 모여 진화론 대논쟁을 펼친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저자는 책 속에서 이 논쟁을 기록하는 '서기'를 맡았다. 책을 읽다 보면 책 속에 등장하는 세계적 진화 학자들이 모두 만나 정말 논쟁을 나눈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저자가 그려낸 이들의 논쟁은 치열하고, 생생하다.

"반은 제가 경험한 사실이고, 반은 제가 읽은 논쟁의 상당 부분입니다. 반응은 반반이었습니다. 사기당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좋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책이 신문에 소개되기 전에 서점에 책이 깔리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건강 코너에 배치됐다고 하더군요. 다윈의 식탁이라고 하니 자연 생식에 관한 이야기인가 했겠지요."

책을 기획하고 출판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이 쏟아졌다. 그의 '식탁론'은 단순히 음식을 위해 마련한 식탁이 아니었다.

"식탁이라는 말을 쉽게 논쟁이라고 생각하긴 어렵죠. 엘클락시코(레알 드리드와 FC바르셀로나의 경기로, 세계 축구의 정상인 두 팀이 벌이는 경기)처럼 스포츠를 재밌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재밌는 방식 중 하나는 '라이벌'입니다. 과학계도 마찬가지죠. 리처드 도킨스와 굴드처럼 지식 라이벌들의 끝장. 이런 맛있는 논쟁을 일반 사람들도 쉽고 생생하게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유리잔의 와인이 반쯤 줄어들었을 때 즈음, 식탁 위에선 갖가지 주제의 논제들이 풍성하게 차려지기 시작했다. 각자의 전공과 일상에 따라 질문은 다양했고, 답도 여러 줄기로 뻗어 나갔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 실존의 문제부터 우리 삶과 맞닿은 행복의 문제까지. 사회 복지부터 심리학, 경영학, 경제학 등 다양한 학문의 범주 위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널뛰기했다.

이날 식탁에 참가한 한 사회복지학도는 "사회 복지를 공부하면서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가 '선택'과 '적응'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에 적응하기도 하고, 적응을 어려워하기도 하지요. 다윈의 진화론을 접한 일부 사람들은 '그렇다면 적응을 못 한 사람들은 도태되는 것인가'하고 생각하기도 해요"라고 전했다. 장 교수의 답은 간단했다.

"다윈은 그런 이야기를 한 적도 없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다윈의 '자연 선택이론'은 사회가 도태되는 사람을 내버려두라고 하는 학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이해하고, 그걸 참조해서 왜 사람은 타자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지, 고립되면 왜 힘들어하는지 파악하게 합니다.

이런 이해의 바탕 위에서 함께 연민을 느끼고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학문적으로도 인간의 소셜마인드(사회적 특성)가 어떻게, 왜 진화해왔는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장 교수의 답에 다시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사회 복지를 공부하다 보면, 이 학문이 서비스 제공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관계 맺기'가 곧 행복한 삶의 요소라고 밝혀지고 있고요. 노인, 가정, 청소년, 모든 사회 요소들은 고립되지 않는 걸 추구합니다. 그렇게 노력해야 복지가 올바로 가는 것 같아요."

"융합이라는 말은 '결혼'과 같다"

<다윈의 식탁>의 저자 서울대 자율학부교수 장대익교수가 27일 서울시 마포구 한 식당에서 독자들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다윈의 식탁>의 저자 서울대 자율학부교수 장대익교수가 27일 서울시 마포구 한 식당에서 독자들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이날 식탁의 또 다른 주제인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즉 학문의 융합에 관해 다른 각도의 질문이 날아오기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모두 일명 '문과인'으로 살아왔다는 한 회사원은 "연말에 제 서재를 봤더니 자연과학 책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제가 대학을 졸업한 지 이제 15년입니다. 그 당시만 해도 다양한 학문의 통섭과 융합, '학제간 연구'라는 게 키워드였는데 지금도 이름만 바뀌었지, 큰 변화는 없는 것 같습니다"라고 토로했다.

한국 인문학계에서 수년간 유행처럼 돌고 있는 학문 간 융합, 통섭이라는 이슈가 큰 의미 변화 없이 껍데기만 남았다는 비판이었다. 장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융합이라는 소리가 안 들어가면 연구 펀드(투자) 받기도 힘들죠. 문제는 진정성인데, 일단 모여서 펀드를 받고 나면 다시 쪼개져서 연구하다가 각자의 연구를 묶어 내는 식이 많습니다. 융합이라는 말 자체가 구호가 되고 유행이 된 것 같아요.

전 융합이라는 말은 '결혼'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20여 년 동안 다른 라이프스타일을 살아온 사람이 만나서 어렵게 맞춰가며 살아가듯이, 학문도 서로 맞추려면 힘들죠. 그래서 가짜도 많고요. 저도 통섭이라는 말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진화론-창조론, 갈등 해결할 열쇠는?

일상에서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을 겪을 때마다 겪는 답답함을 호소하는 독자도 있었다. 3년 전부터 진화 생물학과 인지 과학론을 공부해왔다는 정계은씨(32)는 "다윈의 이론을 깊이 공부 하지 않고 섣부르게 저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라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 2012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2명 중 1명이 창조론을 믿는다고 답했다. '조물주 없는 진화론'을 믿는 사람은 15%뿐이었다. 장대익 교수는 이 같은 통계가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화론은 학교에서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재작년 시조새와 말의 진화론을 다룬 교과서 내용을 종교 단체에서 빼려고 했는데, 그걸 막아내기도 했지요"라고 답했다. 또 "한편 과학 서적 판매율을 보면 또 진화론과 뇌과학 분야가 제일 높습니다. (진화론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학교에선 이상하게 교육받고 마는 사람도 있죠"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화론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한 대학원생이 덧붙여 말했다.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 우리나라에선 이를 다 아우를 수 있는 의제와 교육이 부족한 것 같아요. 아까 맛있는 만남을 강조하셨는데, 한국 공교육에선 이를 맛보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죠. 오늘처럼 이런 식탁에도 참여하고, 책도 읽으면서 개인이 애쓰는 방법밖에 없는지... 우리가 알아서 노력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면 답답하기도 합니다."

융합과 통섭을 외치고, 다양한 학문을 '퓨전'하자고 외치면서도 실제 교육, 연구 현장에선 제대로 맛보기 힘든 현실. 장 교수가 천천히 입을 뗐다.

제대로 된 과학 교육 절실한 현실

<다윈의 식탁>의 저자 서울대 자율학부교수 장대익교수가 27일 서울시 마포구 한 식당에서 독자들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다윈의 식탁>의 저자 서울대 자율학부교수 장대익교수가 27일 서울시 마포구 한 식당에서 독자들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맛있는 만남도 있고, 맛없는 만남도 있지요. 대부분의 공교육은 맛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문학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과학을 좋아하고. 그 두 가지를 함께 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는 굉장히 편향적으로 교육받아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건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손 놓고 있을 게 아니라, 가정과 학교, 개인이 과학 책도 많이 읽고, 이를 삶 속에 의미있게 접하도록 노력해야겠지요. 대부분의 독자층은 일단 책 주제가 '과학'이고 '다윈'이라고 하면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과학이 얼마나 맛있는지, 얼마나 삶의 의미와 맞닿아 있는지 보여주고 싶어요. 호기심을 채우는 정보 정도가 아니라 인간을 이야기하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이 과학임을 말하고 싶습니다."

세 시간에 가까운 시간동안 온갖 이야기들이 식탁을 오갔다. 음식은 식어 버렸지만, 소통이 오간 자리는 얼굴이 불그스레해질 정도로 달아올랐다. 이날 식탁에 참가한 박미정씨는 "기대 이상이었다. 직업이 생활경제를 교육하고 상담하는 일이라 사람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해서 관련 학문에 관심이 많았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옆자리에서 함께 식사를 나눈 정계은씨 또한 "'식탁하다' 기획은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장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훌륭했다. 솔직히 교수님이 더 많이 말씀을 하시긴 했지만. 다음엔 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식탁이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기본적으로 '우연'을 바탕으로 한다. 세상의 우연과 우연이 모여 하나의 식탁을 차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내며, 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움직이고 진보한다. 이날의 식탁도 그랬다. 이날 식탁의 초대자인 장대익 교수가 말했다.

"저를 모르는 분과 아는 분 모두 있었지요. 저자와 독자와의 만남의 새로운 실험을 해본 것 같습니다. 이런 모임을 자주 가져볼까 합니다. 페이스북에서 번개를 해볼 수도 있고. 좋은 기회였습니다."


다윈의 식탁 - 논쟁으로 맛보는 현대 진화론의 진수

장대익 지음, 바다출판사(2015)


태그:#장대익, #다윈, #진화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