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로드>의 한 장면. 영화의 제목처럼 부자는 끝없이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끝에 무엇을 만나게 될런지, 끝이 있기는 할런지 알 수 없는 채로.

영화 <더 로드>의 한 장면. 영화의 제목처럼 부자는 끝없이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끝에 무엇을 만나게 될런지, 끝이 있기는 할런지 알 수 없는 채로. ⓒ 누리픽쳐스


한 남자가 있다. 몹시 쇠약해진 몸으로 기침을 하면서 힘겹게 서 있는 한 남자. 그리고 그에게는 한 명의 아들이 있다. 반드시 지켜내야 할 사람, 삶을 이어가야 하는 이유. 아버지(비고 모르텐슨)와 아들(코디 스밋-맥피)은 서로에게 의지하여 또 하루를 살아간다. 아니, 또 하나의 하루를 간신히 버텨낸다.

세상은 이미 폐허가 되어버렸다. 하늘은 햇볕이 들지 않는 회색빛으로 변했고, 땅은 잿더미로 뒤덮여 아무런 생명을 잉태하지 못한다. 나무는 모두 말라 비틀어졌고, 동물들도 거의 멸종된 상태에 가깝다. 이 절망적인 상황의 무게를 더하는 것은, 영화가 도무지 '왜 세상이 이런 꼴로 변했는가'를 보여주거나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유도 모르는 상태로 멸망한, 그래서 결국에는 어찌 고쳐나갈 수 있을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세계. 그야말로 희망이 없는 회색빛 나날을 주인공 부자는 하릴없이 살아간다.

코맥 매카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더 로드>(존 힐코트 감독, 2009년)는 문명이 종말한 뒤의 암울한 세계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원인불명의 재앙이 덮친 세상은 가혹할 정도로 차가워졌다. 햇빛을 비추지 않는 잿빛 하늘은 생태계를 정지시켰고, 많은 것들이 사라진 세상은 바람소리만 남아서 고요하다.

모든 것이 불에 타버린 듯이 잿더미만 남았다. 더 이상 먹을 음식과 마실 물을 구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이 끌고 가는 카트에는 몇 개의 통조림과 비를 막아줄 비닐 포대, 담요가 전부이다. 그리고 무기로 가진 것은 총 한 자루와 세 발의 총알. 이 빈약한 물건들로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험한 여정 동안 지켜내야 한다.

 영화 <더 로드>의 한 장면. 인류가 멸망을 겪은 이후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약탈하고 서로를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영화 <더 로드>의 한 장면. 인류가 멸망을 겪은 이후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들은 생존을 위해 약탈하고 서로를 잡아먹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 누리픽쳐스


세상은 더욱 험해졌다. 사회가 붕괴된 상태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인류는 먹을 것을 찾다가 끝내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존재일 수 있도록 만들어주던 도덕과 윤리는 이제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변해버렸다. 대부분이 서로를 약탈하고 납치하여 인육을 먹으며 겨우 생존하는 처참한 신세. 세상과 더불어 많은 삶이 잿더미처럼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약속한다.

"아빠, 우리는 착한 사람이지? 사람 안 잡아먹지?"
"그래, 우린 사람 안 잡아먹어."

폐허의 무너진 잔해를 뒤져 발견한 통조림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고 강물로 목을 축이는 아버지와 아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그들은 삶이 허락하는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오직 생존에만 매달리며 본능에 충실한 동물이 아니라, 지킬 것은 지키는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말이다.

"우리는 가슴속에 불을 옮기는 사람이야"

금방이라도 바닥날 것만 같은 통조림과 식수, 언제 마주칠지 모를 잔인한 약탈자들.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더 안전한 장소를 찾아 전전긍긍한다. 그리하여 부자는 영화의 제목처럼 황량한 '길(The Road)'을 끝없이 걷고 또 걷는다. 그들을 무겁게 적셔놓는 빗줄기 속에서도, 잿더미가 바람에 섞여 휘날리는 와중에도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삶을 위한 소박한 도구들이 담긴 카트의 바퀴가 만들어내는 삐걱거리는 소리, 그것만이 위태로운 그들의 삶과 애잔하게도 닮아 있다.

"세상이 이런 것을 보면, 신 따위는 없어. 하지만 내 아들을 보고 있자면, 분명 신은 존재해."

세상은 처참하게 변한 만큼 단순해졌다. 악한 약탈자로부터 지켜내야 할 존재인 아들을 바라보면서, 아버지는 그 아이가 곧 세계이자 신이 존재하는 증거라고 믿는다. 점점 차갑고 냉혹하게 변해가는 자신과는 반대로, 여전히 순수함과 선한 마음을 간직한 아들이야말로 진정 희망이라는 것을 그는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이는 영화 속 장면에서,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을 약탈자로 간주하여 경계하는 아버지에게 매번 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 도와주자고 말하는 아들의 진심어린 모습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영화 <더 로드>의 한 장면. 폐허로 변한 세상을 배경으로 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눈물겹다.

영화 <더 로드>의 한 장면. 폐허로 변한 세상을 배경으로 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눈물겹다. ⓒ 누리픽쳐스

그들은 남쪽이 조금이나마 더 따스한 곳일 거라 믿으며 끝없이 길 위를 걷는다. '이렇게 살 바에야 죽는 게 낫지 않는가' 되묻다가도, 아버지는 삶의 모든 것을 아들을 위해 바치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모질게도 차가워진 회색빛 세상 속에서, 두 사람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좋은 사람'임을 재확인하며 자아를 되새긴다.

"우리는 가슴속에 불을 옮기는 사람이야."

인류애,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며 온정 어린 관계를 구성하고 서로를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마음.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도 그 따스함을 서로의 가슴에 담아두기로 결정하는 순간의 이 대사는 관객의 마음을 잔잔하게 울린다. 한 인간의 체온과 더불어 그 안에 담긴 마음이라는 것은 그리 쉽게 식지 않는 법. 영화 <더 로드>는 긴장감을 잃지 않는 줄거리와 함께 이처럼 짧고도 굵직한 메시지를 들려준다.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을 담고 살아가는 부자의 인간적인 내면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통해서.

절망을 앓는 그대여, 가슴속 불을 지피라

세월호 침몰 사고가 벌써 발생 20일을 넘어섰다. 사고가 일어난 이유와 구조과정에서 보인 관계당국의 늑장대처, 정부를 대표하는 인사들의 성의 없는 사과와 부적절한 언행이 희생자 가족을 비롯한 많은 국민들에게 큰 상처를 안겨주었다. 300여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만든 사고의 원인은 대한민국이라는 배마저도 가라앉힐 정도로 정부와 해경, 해운업 등 다양한 분야의 밑바탕에 광범위하게 깔린 문제들이었다.

사고를 당하고 큰 충격을 받은 단원고 학생들을 찾은 학생정신건강지원센터장 정운선씨는 "학생들이 어른들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었다"고 말했다. 또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서천석씨는 "상처가 모두 사라진다는 것을 치유라 한다면 치유는 그리 많지 않아요. 상처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 치유라 하지요"라고도 덧붙였다.

그들의 말처럼 신뢰 회복과 치유, 그것이야말로 사고수습과 더불어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과제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큰 상실감과 미안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많은 국민들을 위한 시급한 처방으로 보인다.

사람이 제각기 살아갈 방법을 도모한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사자성어가 진리인 양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2014년 5월. 이 말은 마치 영화 <더 로드>의 잿빛 세상을 닮은 오늘날에 대한 풍자이면서, 동시에 이대로는 더 이상 신뢰하지 못할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절망을 반영한 말처럼 들린다.

 영화 <더 로드>의 한 장면. 식량을 구하기 힘든 인류멸망 후의 세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사진은 폐허 속을 뒤지다가 찾은 콜라를 아들에게 건네는 모습. 소년은 태어나서 처음 콜라 맛을 보게 된다.

영화 <더 로드>의 한 장면. 식량을 구하기 힘든 인류멸망 후의 세계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다. 사진은 폐허 속을 뒤지다가 찾은 콜라를 아들에게 건네는 모습. 소년은 태어나서 처음 콜라 맛을 보게 된다. ⓒ 누리픽쳐스


마지막 장면에서 삶의 끝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보여주며 희망을 말하는 이 영화, <더 로드>를 절망을 앓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다. 사고를 당한 희생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슬픔에 빠진 그대여. 다시 가슴 속에 불을 지피라. 그리고 그 불을 꺼트리지 않고 걸어가라. 우리가 앞으로도 살아갈 이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세상 속의 우리가 서로를 다시 신뢰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작은 마음이 다시 따스하게 타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닥친 오늘과 다가올 내일, <더 로드>의 그들처럼 또 다시 길을 걸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비록 고단한 삶이 놓인 길이라고 할지라도 다시 사랑하며 살아가기 위해, 작은 발걸음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지친 마음에 다시 불을 붙이는 일에 <더 로드>가 작은 다독임이자 희망의 불씨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더 로드 세월호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