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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꽃샘추위에 비까지 내리더니, 며칠 새 다시 초여름 같은 날씨다. 평소 24시간 교대 근무를 하기 때문에 집에 돌아오면 몹시 피곤해 하면서도 밀폐된 공간이 싫어 잠을 잘 때도 창문, 방문 다 열어놓고, 바깥 바람 쐬기를 좋아하던 오빠가 연차를 냈다.

"아버지 생일 때 맞춰서 휴가 냈으니까, 다같이 아차산에 다녀오자."

불과 며칠 전에도 온 가족이 함께 꽃구경을 위해 가까운 시내 나들이를 다녀온데다, 등산은 평지와는 다르게 꼼꼼한 준비와 체력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조금은 부담스러운 제안다. 하지만 두 세 차례의 이야기가 오고 간 끝에 가족산행을 가는 쪽으로 결정이 되었다.

 아차산에서 내려단 본 광나루와 암사대교.
 아차산에서 내려단 본 광나루와 암사대교.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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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하필 등산이야? 평지라면 하루종일도 돌아다닐 수 있지만, 등산은 다르다고. 부모님이 힘들어하실 수도 있잖아…."

"아버지가 등산 좋아하시잖아. 아차산이 힘들다고 하시면 다른 데 좋은 곳 알아봐줘."

지난 달에 월차를 썼을 때도 오빠가 아차산에 같이 가자고 조르던 것을, 등산은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서 가고 싶지 않다는 이유와 황사, 미세먼지 등을 이유로 단념시켰다. 그런데 또 아차한 이야기를 해서 어지간히 가고 싶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이 봄에 한 번은 가야 차라리 마음 편해지겠구나 싶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아버지의 생신이었지만, 이면적인 이유는 오빠가 요즘 직장에서 많이 힘들어해서 가족들의 격려와 기분전환이 필요하다는 데 가족 모두가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빠의 말을 대신 전하는 것은 늘 나의 몫이다. 아버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아차산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첫 번에는 괜스레 새침스럽게 굴었다.

"거길 뭐하러?"

내 예상이 100% 적중했다. 나는 아버지 심리 분석 전문가이기도 하다. 후훗. 아버지는 삼십 년 전에도, 이십 년 전에도, 그리고 오 년 전에도 늘 이런 식이었다. 하지만 나도 이젠 아버지의 속을 꿰뚫고 있다. 이건 가기 싫다는 의미가 아니다. 직역하면 귀찮다는 뜻이지만, 의역을 하면 의미가 달라진다. 여기서 꼭 한 두 번은 더 강하게 물어보고 권유를 해야 한다. 정말 싫을 때는 싫다고 아버지도 거듭 확고하게 말씀하시지만, 진짜 싫은 게 아닐 경우는 대개 두 번 쯤 더 권유를 하면 '못 이기는 척' 따라온다. 속으로는 좋아하면서도 '못 이기는 척' 할 때도 많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는 정확한 의사를 확인해 두어야 한다.

 아차산의 봄을 대표하는 진달래꽃의 빛깔이 곱다.
 아차산의 봄을 대표하는 진달래꽃의 빛깔이 곱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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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생신기념, '아차산' 산행 시작

그리하여 8일 오후, 온 가족이 아버지의 생신 기념 산행을 위해 아차산으로 갔다. 햇볕이 뜨거워 선글라스, 모자, 손수건, 물과 음료, 개인컵 등을 단단히 준비했다. 원래는 등산복을 제대로 갖춰 입어야 했으나 아차산은 산세가 험하지 않고 야트막한데다, 편한 둘레길도 조성돼 있어 만만하게 생각하여 장갑을 챙기지 않았다가 나중에 후회했다. 바위를 딛고 오르내려야 하는 등산코스가 있어서 맨손이 아팠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힘들어 하셨다. 아차산 생태공원 입구에서 사진도 찍고 잠시 걷다가 본격적으로 등산로로 진입한지 1분만에 어머니는 숨을 가쁘게 쉬었다. 엄마가 원래 이토록 체력이 약하셨던가. 평생을 휴일도 없인 강철 같은 노동과 가사, 양육, 친인척과 주변 지인들의 온갖 대소사에도 빠지지 않고 남을 돕기를 좋아하던 어머니가 걱정돼, 제발 쉬어가며 몸을 챙기라고 해도 쉬는 게 더 힘들다던 어머니였다. 눈 앞의 어머니 모습에 잠시 혼란스러워진다.

"엄마, 이제 시작인데 몇 걸음이나 올랐다고 벌써 힘들어 해?"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갑자기 무리를 했다가는 탈이 날까봐 걱정되었다. 아버지는 퉁길 땐 언제고, 제일 먼저 앞서 나갔다.

"오르막길이라 힘든 걸…."

"너무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올라와. 앞사람을 무리하게 따라갈 필요는 없어. 앞사람이 너무 빨리 가버리면, 가다가 뒷사람을 기다리고 그러는 거야. 그러니 아빠는 신경쓰지 말고 엄마는 천천히 느릿느릿 올라와도 돼."

 산행길의 가족들.
 산행길의 가족들.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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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내가 어머니보다 등산 지식과 경험이 더 많은 것도 아니지만 나는 짐짓 아는 체를 했다. 그리고 수 년 전 나도 그 일원으로 참여했던 지인들과의 등산 소모임에서 생긴 에피소드를 들려 드렸다. 오륙 년 전 북한산 정상 부근에서 생겼던 일로, 평소 운동량이 부족한 한 선생님의 건강을 위해 지인들이 함께 등산모임을 제안해 몇 주간 연속으로 이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등산의 고수들이 날렵하게 산을 오르는 속도를 선생님이 맞췄다가, 하산길에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경력자에서부터 매주 빠짐없이 산을 다니는 분까지 일명 '선수'들이, 정상에서 점심식사 후 어차피 내려가는 하산길이니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가벼운 마음으로 날쌔게 먼저 내려가 버렸다.

중간에 전화통화를 하다가 출발이 늦어진 나는, 가장 속도가 늦은 선생님을 보필하며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선생님이 돌연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일행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내려가 버린 상황에서, 나 혼자 선생님을 도와야 했기에 순간 당황했다.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일단 선생님에게 어디가 아픈 것인지, 증세가 어떤지 물었다. 움직일 수가 없다고 했다. 위급한 순간이었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외간 남자'인 선생님의 다리에 쉽게 손을 뻗치질 못해 우물쭈물하다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선생님의 다리에 손을 대었다.

손을 대기만 해도 아프다고 했다. 그래서 내려오는 다른 등산객에게 상황 설명을 한 후 도움을 요청했다. 피를 조금 뽑아줘야 한다며 휴대하고 있던 대바늘 비슷한 도구로 환자의 다리를 따주는 아저씨 옆에서, 과연 적절한 처치인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나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휴대폰으로 119를 눌렀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피를 뽑아준 후로도 선생님의 통증이 금세 멈추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 고통을 빨리 멈추게 해드리고 싶어 구조대가 올 때까지 근육 마사지라도 하겠다고 나섰다. 선생님은 그때 '외간 남자'가 아닌 '환자'였지만, 그래도 허벅지 위쪽까지는 차마 쉽게 손길이 가질 못했다. 분명히 허벅지에도 상당한 고통을 느끼셨던 듯 했으니, 내 근육 마사지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 자신도 직접 다리를 주무르고 삼십 분 이상 휴식과 안정을 취하는 사이에 서서히 증세가 완화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날 나는 산악구조대를 처음 봤다. 그런데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에 선생님의 다리 상태가 다소 회복됐다. 선생님은 내려갈 길이 아직 멀기만 한데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며 자신의 다리로 걸어서 내려갈 수 있다고 했다. 선생님이 실려가야 하는 줄 알고 구조대를 부른 것인데, 구조대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선생님 증세가 완화되어 직접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맙게도 도중에 만난 구조대 분들은 다행이라고 위로해주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함께 걸어주겠다고 산 아래까지 동행해 주었다.

 산 위의 돌탑.
 산 위의 돌탑.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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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내려간 등산의 고수들과는 산 아래쯤에서 다시 만났다. 선생님이 곧장 약속이 있어서 차를 가지고 가야 한다며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직접 운전하겠다고 했다. 이왕 산 속 조난사고의 동지가 된 김에 내가 모두를 대표해 선생님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까지 확인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 일이 있고난 뒤 선생님과는 "함께 피를 본 사이"라면서, 그날의 일을 우스갯소리처럼 회상한 적이 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힘들다며 틈만 나면 쉬었다 가자고 애원하시는 어머니에게 더 힘내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조금만 더 올라가면 시원해진다고 격려했지만, 어머니는 등산이 싫은데 억지로 따라온 초등학생처럼 힘들어 했다. 화장실이 나와도 쉬자, 의자가 나와도 쉬자, 운동시설이나 평지, 갈림길이 나와도 쉬자고 했다. 나는 가장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며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했다. 앞서 잘가는 사람은 혼자 가게 내버려두고 뒤처지는 사람을 잘 살피겠다는 거였지만, 사실은 나도 오르막길은 빨리 오르지 못한다.

첫 휴식 때 오이를 꺼내 먹었다. 아직은 땀도 많이 흘리지 않았고 절반도 오르지 못했지만 오이가 정말 맛있었다. 체력이라면 자신이 있었는데, 너무 오랜만의 산행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머니가 생각보다 등산을 많이 힘들어하셨지만, 아버지는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산 정상이나 봉우리에 다다랐을 때면 한강 광나루를 중심으로 강동, 송파, 광진구 그리고 구리시와 멀리 하남시 방면까지 전경이 다 보였다. 우리 가족이 아차산에 올랐던 8일 오후엔 미세먼지가 많이 끼었는지 시야는 흐렸지만, 아버지는 우리 집이 보인다면서 그걸 어머니에게 설명해주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아차산 등산로 입구의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아차산 등산로 입구의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상.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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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차산 4보루의 전경.
 아차산 4보루의 전경.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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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가족, 산에 오니 말문이 트이다


"여기서 집이 어떻게 보여? 거짓말하고 있어."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짜 보였다. 나도 처음엔 아버지가 허풍을 떠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많은 빌딩숲에서 우리가 사는 아파트가 보였다. 지리와 위치감각이 뛰어난 아버지는 시력도 가족 중에 제일 좋다. 하지만 어머니는 끝내 우리집이 어디쯤에 있는지 찾지 못했다. 어머니에겐 매직아이를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었나 보다. 나도 높은 데서 신경을 집중해 우리 아파트 건물을 찾으려다가 눈이 핑도는 것 같았다. 이러다 사고 날라.

아차산은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을 두고 뺏고 빼앗기는 혈투를 되풀이하던 전략적 요충지였고, 온달장군에 얽힌 전설이 많이 전해지는 곳이어서 곳곳에 남겨진 보루 터에서 역사적인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다. 그래서 관련된 설명판도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조선 중기까지는 목장으로만 개발되어 호랑이나 늑대도 살아 임금님의 사냥터로 이용되기도 했다는 사전학습을 하고 오니, 산행이 더욱 흥미로웠다. 함께 걷는 어머니에게도 해줄 이야기가 많은 것도 좋았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가정이 아닌 이상, 같은 집에 살면서도 집 안에서는 꼭 필요한 용건 외에는 거의 대화가 없는 게 요즘 가족들의 평범한 모습이라지만, 이렇게 바깥에 나오면 우리 가족은 서로 말문이 트인다. 그래서 대화가 필요할 땐 일부러라도 산책을 나와야 한다는 걸 최근에야 깨달았다.

 아차산에 오른 가족의 모습
 아차산에 오른 가족의 모습
ⓒ 전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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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고 또 쉬고, 틈만 나면 장난스러운 사진이나 '작품' 사진을 찍는다며 폼잡느라 해발 300m도 안 되는 아차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3시간이나 걸렸다. 구리시쪽 코스는 제외하고, 서울시에 해당되는 코스만 선택했지만 용마산 폭포공원이 있는 방면으로 내려오니, 어느덧 해질 무렵이 다 되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나도 다리에 힘이 풀려 자연스레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햇볕이 강해 땀도 많이 흘리고 피부가 제법 그을렸다. 평소에 산책을 즐기고 적당히 몸을 움직이는데다 준비운동과 마무리 체조까지 했지만, 결국 가족산행을 마친 후 이튿날 종아리에 몸살이 나 버렸다. 온 가족이 이틀째 끙끙대고 있다. 걷는 모습이 영 부자연스럽다. 똑바로 걸으려 발을 뻗어 보지만 절룩거리는 걸음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절로 비명소리가 나는 탓이다. 

그러나 온 가족이 공유하게 될 추억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 가족이 다함께 나눌 추억이 늘어난다는 건 참 기분좋은 일이다. 내가 산행 후 몸살 날 수 있다며 체조를 할 때면 옆에서 어린아이처럼 따라 하시던 어머니의 모습도, 대장처럼 맨 앞에서 가족을 인솔해가던 아버지의 모습도, 본인이 오자고 해놓고 이날 피곤하다는 소리를 가장 많이 했던, 그러나 내심은 즐거워했던 오빠도 내 기억 속에 온전히 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날 내가 보여준 몇몇의 장면들도 내 가족들에게는 새로운 발견이었거나 새 추억으로 자리잡을 것이다.

오리고기와 느끼한 버터크림으로 만든 케이크, 그리고 시골잔칫상처럼 차려진 밥상으로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했지만, 낮에 찍은 사진을 한 자리에 모여 감상하는 그 시간 우리는 함께한 그 추억으로 이야기 보따리가 생겨 더 즐거웠다. 그 추억의 힘으로 또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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