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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과 전문의 함익병 원장.
 피부과 전문의 함익병 원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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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에서 피부과 전문의인 함익병 원장의 인터뷰 내용이 화제가 됐다. 지난 10일 <월간 조선>에 실린 한 인터뷰에서 함 원장은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근거로 독재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독재가 왜 잘못된 건가요?"라면서 "플라톤도 독재를 주장했습니다, 이름이 좋아 철인정치지 제대로 배운 철학자가 혼자 지배하는 것, 바로 1인 독재입니다, 오죽하면 플라톤이 중우(衆愚)정치를 비판했겠습니까"라고 주장했다.

다원주의가 보장되는 오늘날 사회에서 독재를 주장하는 건 잘못된 게 아니다. 누구나 각자 정치에 대해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권리가 있다. 하지만, 플라톤의 철인정치(哲人政治)를 독재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에서 함 원장이 플라톤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독재를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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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 원장의 '플라톤 발언'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 플라톤의 철인정치를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혜를 사랑하는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는 철인정치의 기본적인 개념은 교양 수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철학자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혹은 "최고 권력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하게" 돼야 한다.

그렇다면, 철인정치와 독재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앞서 함 원장의 인터뷰를 다시 살펴보자. 함 원장은 플라톤의 철인정치에 대해 "제대로 배운 철학자가 혼자 지배하는 것, 바로 1인 독재입니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철인정치에 대한 상당한 오해에서 비롯된 발언이다. 철인정치는 앞에서 언급했듯 철인'들'이라는 통치자 계층에 의한 정치를 의미한다. 반드시 1인 독재와 상응하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물론, 어쨌든 소수계층의 의한 지배이므로 독재라고 볼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독재와는 거리가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영혼삼분설'부터 출발해야 한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이성·기개·욕망의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고 봤다. 쉽게 말해 이성은 지식 및 진리 추구, 기개는 분노의 감정 그리고 욕망은 육체적·물질적 쾌락 추구와 관련이 있다.

플라톤은 개인의 영혼이 이와 같이 세 가지로 구성돼 있듯이 국가도 마찬가지로 이와 대응하여 각각 통치자·수호자·생산자들로 구성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각각 지혜·용기·절제이며, 이들이 각각의 덕목을 가지고 각자에 맞는 기능을 잘 수행할 때, 국가적 차원의 정의가 실현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국가론은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엄격히 구분돼 있거나, 소수가 다수 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독재 체제의 뉘앙스와는 확실히 다르다. 플라톤은 '소수의 독재'를 '이상국가'로 보지 않았다. 플라톤은 3계층의 조화를 통한 정의실현 그리고 이를 위해서 철인들이 통치자가 되는 것을 꿈꿨다.

결정적으로 플라톤은 독재를 최악의 정체(政體, 국가의 통치 형태)로 봤다. 그는 <국가>에서 네 가지 유형의 정체를 언급한다. 이 네 가지 정체들을 가장 안 좋은 정체 순으로 나열한다면 '참주정' '민주정' '과두정' '금권정'이다. 즉, 이중 전제군주가 모든 권력을 지니는 참주정을 가장 최악의 정체로 꼽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플라톤의 철인정치는 엄밀히 말해서 독재 정치와는 의미적으로 거리가 있으며, 그의 정치사상 전체를 보더라도 독재정치를 옹호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정작 플라톤은 앞서 얘기했듯이 독재를 가장 안 좋은 정체로 봤으므로, 플라톤의 철학으로는 독재 체제를 옹호할수도, 정당화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민주주의인가

함 원장은 인터뷰 중 '플라톤이 중우정치를 비판했다'고 말했다. 중우정치란 어리석은 대중의 정치를 의미한다. 플라톤이 아테네 민주주의가 중우정치로 흐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민주정을 경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함 원장 주장의 맥락을 볼 때 함 원장은 중우정치를 민주주의와 완전히 같은 개념으로 바라보는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중우정치의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와 나치당도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는 사실 등에서도 일종의 집단 광기나 중우정치를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와 중우정치를 완전히 같은 의미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오늘날 대중은 상당히 다원화돼 있기 때문에, 어떤 현안에 대해 중우정치의 가능성이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모든 대중의 집단 광기로 연결되기는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우정치를 이유로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파총 벼슬에 감투 걱정하는 격이며, 숲 속 어딘가에 나 있는 잡초 뿌리 때문에 숲 전체를 갈아엎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중우정치의 위험성에도 오늘날 많은 국가들은 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완벽한 정치체제가 아님에도 독재에 비교해 민주주의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많은 독재 옹호자들이 '독재자가 선량한 마음 내지는 도덕을 가지고 잘하면 될 것 아니냐'와 같은 논리를 펼친다. 그러나, 선한 동기로 시작한 독재자가 권력에 대한 욕망에 언제 사로잡힐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역사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현명하게 정치한 권력자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이기적 욕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욕망이 권력에 반영돼 타락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권력에게 양심이나 도덕을 기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권력은 제도에 의해서 견제돼야 한다.

플라톤에 대한 몰이해... 함익병, 유감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에는 모든 사람이 선거를 통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훌륭한 견제 장치가 존재한다. 권력의 주체가 1인이 아닌 다수가 되므로, 한 개인의 독단에 의해 정책이 결정되지 않는다. 비록 독재에 비해서 정책 결정 과정이 비효율적이지만, 다수의 참여가 보장된다는 점에서 훨씬 합리적이다.

물론 이러한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이 언제나 제대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개인이나 소수에게 권력이 독점돼 억압적 전체주의로 흘러가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북한의 김정은 독재체제가 문제가 되는 것은 독재의 방법이나 목적 때문이 아니다. 독재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근원적 위험성에서 기인한 결과다.

함 원장의 인터뷰 외에도 과거 박정희 유신 독재로의 귀환을 갈망하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역설적이게도 독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옹호하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도 결국 다원적인 의견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함 원장이 플라톤의 <국가>를 한 번이라도 읽어보기나 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플라톤 철학에 대한 심각한 몰이해를 보여줬다는 점은 매우 유감이다. 만약 플라톤이 이 인터뷰를 접한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함 원장에게 어떤 비판을 퍼부을지 궁금하다.


태그:#함익병, #플라톤, #독재,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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