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소치 동계 올림픽이 끝나고 벌써 1주일이 지났다. 우리에게 감동을 준 선수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수들을 빼놓으면 섭섭하다. 상대 선수의 반칙으로 넘어졌음에도 다시 일어나 달려 감동을 선사한 박승희, 쇼트트랙계의 '떠오르는 샛별' 심석희, 여자대표팀 최고참으로 여자 선수들을 이끈 조해리 등 모든 선수들의 활약이 생생하다. 특히 4년 전 밴쿠버에서 여자 3000m 계주 금메달을 강탈당했던 여자 대표팀이 대역전극을 벌이며 우승을 차지하는 장면은 짜릿했다.

지난 2월 28일, 성남 탄천 종합운동장 빙상장으로 향했다. 제95회 전국동계체육대회(아래 동계체전) 쇼트트랙 경기가 열리는 장소였다. TV에서만 보던 쇼트트랙 경기를 직접 보러 간 건 난생 처음이었다. 그곳을 가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올림픽에서 느낀 쇼트트랙의 묘미를 현장에서 느끼고 싶었고, 올림픽에서 활약한 선수들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리고 올림픽 끝난 직후 열리는 동계체전에서 올림픽의 열기가 그대로 이어질 지 궁금하기도 했다.

빙상장은 주경기장 뒤편에 있었다. 빙상장이 있는 건물엔 빙상장 뿐만 아니라 다른 체육시설들도 있었다. 이 안에서 빙상장 관중석이 있는 곳을 못 찾아서 잠시 헤맸다. 내가 들어온 곳은 선수 대기실 쪽이었다. 대기실에선 선수들이 각자 경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뎌진 스케이트 날을 가는 선수, 스케이트 화를 들고 돌아다니는 선수, 다리를 쭉 뻗으면서 준비운동을 하는 선수들 모두 경기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이쪽은 관중석이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에 돌아 나왔다.

현장에서 보니 더 재밌던 쇼트트랙 경기

안내원에게 물어서 겨우 빙상장 관중석을 찾았다. 이날 경기장 오기 직전에 본 인터넷 뉴스 기사들은 대부분 '사그라든 올림픽 열기'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올림픽에 보내던 열광과 성원이 동계체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내용들이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관객 없이 텅텅 빈 관중석'을 잠시나마 상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경기장이 100% 차진 않았다. 그러나 대략 80~90% 이상의 관중석에 사람들이 있었다. 연령층도 다양했다. 관중석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에서부터 머리가 새하얀 할아버지들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가 모였다. 특히 10대 후반~20대 여학생들이 생각 이상으로 매우 많았다. 관중석의 30% 정도를 차지했다.

 제95회 동계체전 쇼트트랙 경기 장면

제95회 동계체전 쇼트트랙 경기 장면 ⓒ 강선일


마침 빙판에선 경기가 열리는 중이었다. 처음 본 경기는 여자 초등부 경기였다. 초등학생 선수들의 경기임에도 그 속도감과 긴장감은 올림픽 경기 못지 않았다. 1위 선수는 압도적인 실력을 뽐내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5초 정도나 지난 후에 2위와 3위 선수가 연달아 들어왔다. 저 어린 선수들 모두 '심석희 언니'처럼 올림픽 무대에서 활약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던 중, 관중석 아래 1층 통로에 바로 그 심석희가 있었다.

잠시 후 정빙(整氷) 시간이 됐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통로는 선수 외 일반인의 통행이 안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심 선수는 빙상장 구석의 코치 박스(Coach Box, 코치진 대기장소)로 가서 KBS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 주변엔 수십 명의 어린이들이 모였다.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어린이들은 심 선수에게 가서 한 명 한 명 사인을 받았다. 심 선수의 인기를 실감했다. 조금 피곤한 기색이 엿보였음에도 그녀는 한 명 한 명에게 사인을 해줬다. 정빙이 끝나고 경기가 재개될 시점이 되자, 심 선수의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이 "경기 시작했으니까 다시 정빙 시간 됐을 때 다시 싸인해 드릴 거예요"라며 심 선수를 데리고 들어갔다.

사인 중인 심석희 선수 심석희 선수가 어린이들과 학부모 등 팬들에게 사인해 주고 있다. 이날 심석희 선수는 곳곳에서 사인 및 사진 공세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거절 한 번 없이 팬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 사인 중인 심석희 선수 심석희 선수가 어린이들과 학부모 등 팬들에게 사인해 주고 있다. 이날 심석희 선수는 곳곳에서 사인 및 사진 공세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거절 한 번 없이 팬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 강선일


소치 귀국 이틀만에 동계체전 참가한 국가대표 선수들

선수들은 지난 25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소치 다녀와서 쌓인 피로가 반도 안 풀린 시점에서 27일 개막한 동계체전까지 참가했다.

일각에선 "선수들 인기를 동계체전 흥행에 이용하려는 것 아니냐", "선수들 쉴 시간은 줘야 되지 않냐"는 비판도 제기했다. 실제로 내가 그 날 현장에서 본 국가대표 선수들은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몇몇 대표 선수들은 컨디션 조절 등의 이유로 기권을 신청하기도 했다. 그들은 오는 14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릴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대회에도 참가해야 된다.

코치 박스는 이름대로 각 팀 코치들이 선수들의 경기를 관전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곳엔 코치와 선수들 외에도 경기 관람하러 온 팬들도 적지 않았다. 몇몇 여학생들은 손에 선물이 들어있는 작은 쇼핑백을 들고 서 있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선수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성남 탄천 종합운동장 빙상장에 모인 관중들이 제95회 동계체전 쇼트트랙 경기를 관전하고 있다.

성남 탄천 종합운동장 빙상장에 모인 관중들이 제95회 동계체전 쇼트트랙 경기를 관전하고 있다. ⓒ 강선일


빙판에서 벌어지는 경기는 단 한 경기도 빠짐없이 흥미진진했다. 그 박진감의 근원은 '끊임없는 역전'이었다. 매 경기마다 심석희가 중국 선수를 추월하던 것 이상의 엄청난 역전 극이 매번 펼쳐졌다. 남자부 경기에선 상당히 뒤쳐져서 가망 없을 것으로 보이던 선수가 대역전극을 벌이는 장면도 나왔다. 관중들의 환호성이 내 귀를 얼얼하게 했다. 경기장 분위기는 최고조로 달아올랐다. 언론에서 얘기하던 것과는 달랐다.

올림픽 있는 해 외엔 관중 더 적어

갑자기 궁금했다. 이런 분위기가 매년 있는 분위기인가 싶었다. 코치 박스 쪽에서 경기를 관전하던 한 어르신에게 질문했다.

"저 관중들은 대부분 참가 선수들 가족이에요. 그래도 이번엔 올림픽 직후에 체전이 열려서인지 평소보다 관중이 더 많네요. 동계체전 같은 경우는 올림픽이 있는 해엔 평소보다 좀 더 관중이 많이 와요. 그 이외엔 훨씬 적고요. 그나마 실업대회엔 관중이 좀 오는 편이긴 한데... 그리고 이 관중도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에요. 다행히 규모가 작은 탄천 운동장에서 열렸으니 이렇게 꽉 차 보이지, 목동 경기장 같은 데서 하면 이것보단 더 휑해 보일 거에요"

동계 스포츠에 대해 오랜 기간 애정을 갖고 계신 분인 듯 했다. 그는 동계 스포츠 안에서의 '인기 빈부격차'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동계 스포츠 중에도 피겨 (스케이트) 같은 게 더 인기가 많지. 김연아의 영향이겠지만...피겨 경기장엔 거의 대부분의 경우 관중들이 많이 몰려요. 선수들도 선수 생활하는 걸 상당히 즐겁게 여기고. 근데 쇼트트랙 같은 경우는 부상 위험성도 높고, 준비 과정이 고되다 보니 선수들이 상당히 힘들어 해요. 거기다가 화제에 오르는 시기가 피겨에 비해 그리 길지 않은 편이고..."

경기 준비 중인 여학생들 여자 초등부 선수들이 곧 있을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 경기 준비 중인 여학생들 여자 초등부 선수들이 곧 있을 경기를 준비하고 있다. ⓒ 강선일


마침 빙판에선 남자 중등부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경기 도중 한 선수가 추월을 시도하다 상대 선수와 부딪쳐 같이 넘어지고 말았다. 두 선수는 넘어진 채 그대로 미끄러져 경기장을 둘러싼 샌드백에 '쿵'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바로 내 앞에 있는 샌드백이었다. 넘어지는 과정에서 한 선수의 스케이트 칼날 부분과 다른 선수의 머리가 부딪치는 아찔한 장면도 보였다.

헬멧을 써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머리를 크게 다칠 뻔했다. 관중들의 탄식이 방금 전 환호성보다 훨씬 더 크게 들렸다. 옆의 코치는 "일어나! 일어나!"라고 외친다. 넘어진 선수 중 한 명은 다시 일어서기도 힘겨워했다. 무릎 부위를 심하게 다쳤는지, 그는 다리를 절뚝였다. 내 바로 앞에 보이던 그 선수의 표정은 고통과 속상함이 섞인 것이었다. 이날 본 매 경기마다 넘어지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돌발상황'이라 생각했던 쇼트트랙 경기 중의 이런 상황은 사실 '일상적 상황'이었다.

전광판에선 아무런 경기 관련 정보가 뜨지 않았다. 경기 정보는 경기장 일부 장소에 붙은 A4 용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 진행요원 중 한 명이 붙어 있는 종이를 바꾸는 광경이 보였다. 다음날 경기 일정을 붙이는 것이었다. 관중들의 정보 접근성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어느새 저녁 시간이라 어린 선수들은 컵라면이나 김밥을 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경기 일정 때문인지 제대로 된 끼니를 때우긴 힘든 듯했다.

경기 일정이 적힌 A4 용지 경기 일정이 적힌 A4 용지가 코치 박스의 유리벽에 붙어 있다. 위쪽의 '붙여놓은 종이를 떼어가지 마세요!'란 글귀가 눈에 띈다.

▲ 경기 일정이 적힌 A4 용지 경기 일정이 적힌 A4 용지가 코치 박스의 유리벽에 붙어 있다. 위쪽의 '붙여놓은 종이를 떼어가지 마세요!'란 글귀가 눈에 띈다. ⓒ 강선일


뒤늦게 불이 켜진 전광판 낮 시간 내내 불이 꺼져 있던 전광판에 뒤늦게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전광판에선 경기 일정이나 결과 등에 대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 뒤늦게 불이 켜진 전광판 낮 시간 내내 불이 꺼져 있던 전광판에 뒤늦게 불이 들어왔다. 그러나 전광판에선 경기 일정이나 결과 등에 대한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 강선일


단 한 팀이 벌이던 계주 경기 여자 대학부 3,000m 결승전 경기가 열리고 있다. 결승에 참가한 팀은 경기도 대표 단 한 팀이었다.

▲ 단 한 팀이 벌이던 계주 경기 여자 대학부 3,000m 결승전 경기가 열리고 있다. 결승에 참가한 팀은 경기도 대표 단 한 팀이었다. ⓒ 강선일


단 한 팀이 벌이던 계주 경기

잠시 후 '쇼트트랙의 꽃' 계주 경기가 시작됐다. 흥미진진하게 경기를 관람하던 중, 여자 대학부 경기가 시작됐다. 그런데 이상했다. 단 한 팀이 계주를 뛰고 있었다. 빙판 위에선 단 네 명의 선수가 번갈아가며 뛰었다. '딴 팀은 다 기권했나?' 이상한 생각에 옆의 관객에게 물었다.

"여자 대학부는 출전 팀 중 계주 인원을 꾸릴 수 있는 팀이 경기도 대표 한 팀 밖에 없어서 그래요."

한마디로 여자 대학부는 계주 가능 최소 인원인 네 명 이상을 충족하는 선수단이 단 한 팀이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그 한 팀이 경기를 뛰는 상황이었다. 경기도 외의 타 지역은 선수단 꾸리기도 힘들 정도로 인프라가 열악한가 싶었다. 여자 대학부 3000m 계주의 유일한 참가팀이었던 경기도 대표팀은 외로운 경주 끝에 1위를 차지했다. 

오후 9시 30분, 마침내 그날 모든 경기가 끝났다. 주변에서 대화하던 관계자들 말론 1시간 넘게 일정이 지체됐다고 한다. 선수들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경기장을 나섰다. 경기장 입구에 서 있던 팬들이 선수들에게 사인 받고자 다가왔다. 선수들은 빨리 가야 하는지 표정이 다급해 보였다. 그럼에도 일일이 한 명씩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줬다. 내가 왔던 오후 3시 30분부터 애타는 표정으로 선물을 들고 선수들을 기다리던 팬들은 그 시간까지도 그곳에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갔던 쇼트트랙 경기장에서, 쇼트트랙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차기 동계 올림픽 개최국이라 하기엔 아직은 열악한 경기 환경, 그리고 그 열악한 상황에서 이 악물고 경기하는 선수들의 애환도 생각 안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하루 종일 그 경기장을 지키고 서 있었던 팬들 덕분에 한국 쇼트트랙의 미래가 밝다는 확신도 들었다. 부디 지금의 쇼트트랙 열기가 이대로만이라도 이어졌으면 한다. 나도 거기에 조금이나마 보태겠다. 4년 후 평창 동계 올림픽 빙상장에서 쇼트트랙 경기가 열리는 그 순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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