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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에는 연극 줄거리가 들어 있습니다.

무대 위 할머니와 손자, 할아버지와 손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쉼없이 말을 하지만 서로 알아듣지 못하거나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느라 했던 말을 하고 하고 또 한다.

일상에서 빈번히 경험하는 일이라 익숙해서일 것이다. 객석에서는 공감하듯 웃음 소리가 터져나온다. 나 역시 부모님과의 대화에서는 물론이고 아이들과의 대화에서도 수시로 겪는 일이다. 

쉬지 않고 잔소리를 하며 사사건건 불평을 늘어놓는 할머니, 잔소리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고집불통 할아버지, 그 옆에 심부름도 잘하고 말동무도 곧잘 해드리는 손자 '준희'가 있다. 준희의 직업은 공연 대본을 쓰는 작가. 근사한 멜로드라마를 쓰고 싶은 꿈이 있다.

포스터
▲ 연극 <나와 할아버지> 포스터
ⓒ 공연배달서비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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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할아버지를 잘 관찰해서 글을 써보라는 스승의 권유에, 준희는 할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어떤 여인 찾기'에 동행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에 할머니가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준희는 할아버지가 왜 그토록 그 여인을 찾고 싶어 했는지도 알게 된다.

연극의 줄거리를 떠나 내가 눈여겨 본 것은 그들의 소통이었다. 요즘 젊은 사람 같지 않게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나름 잘하려고 노력하는 준희, 그래도 그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냥 할머니 할아버지일뿐. 어떤 일들이 그 인생을 채우고 있는지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며 살아가는지 알지 못하고, 솔직히 알려는 마음도 없다.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전쟁 때 다리를 다쳐 의족을 했고, 세무직 공무원으로 퇴직을 했으며, 꼼꼼한데다가 잔소리가 많고, 젊어서는 술을 많이 마셔 가족들을 고생시켰다는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다. 관절이 아파 걸음을 잘 못 걷는 할머니는 허구한 날 다리 아프다는 소리만 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꼭 찾아서 만나야한다'는 할아버지와 동행한 짧은 여행길에서 준희는 할아버지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 밤에 요강이 필요한 까닭, 전쟁 때 숨어살던 기억, 누군가 도와주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일, 결혼한 지 일 년만에 다리를 잃고 나서 겪어야 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 등등.

왜 그분들의 말은 고이게 됐을까

할머니의 빈소에서 말없이 의자에 앉아있는 할아버지를 배경으로, 할머니가 평소 액자 제일 안쪽에 끼워놓았던 두 분의 신혼시절, 할아버지에게 두 다리가 다 있었던 시절의 사진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그 누구도 묻지 않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삶에 생각이 가 닿는다.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는 데다가 자칫 어긋나기 일쑤고, 아예 듣을 생각이 없는 듯 모르쇠로 일관하고, 당신이 알고 있는 것만이 진리인양 아무것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당신 이야기의 무한 반복.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내 양가 부모님의 이야기다.

뵈러 갈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노쇠해져가는 정신과 몸에 가슴이 내려앉으면서 조금이라도 살갑게 대하려 마음 먹지만, 소통불능 상황에 이르면 어느 새 낙담하고 만다.

그분들께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말하지 않는다면, 왜 그분들 안에서 말은 또 그렇게 흐르지 않고 고이게 됐을까. 누군가의 책임을 묻기 전에 서로 통하게 만드는 게 필요한데, 상대적으로 노인들이 표현을 잘 하지 못하고 먼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니 아랫사람들이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게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나치게 자기 의사를 강하게 표현하는 바람에 모두를 아프게 하는 경우도 많지만 말이다.

결국 '모르면 물어봐라!'가 진리다. 어른들의 마음도 삶도 물어봐야 알겠지. 수십 년 세월 속에서 그들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자기 안에 끌어안게 되었을까.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단순한 역사나 지난 시절의 소소한 추억을 넘어 이 땅에 존재했던 한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일 것이다. 비록 평범하게 살다 떠나는 사람일지라도 그는 누구와도 같지 않은 유일한 존재이며 특별한 자리에서 생을 살아낸 존재이니까.

덧붙이는 글 | 연극 <나와 할아버지> (민준호 작, 연출 / 출연 : 오용, 손지윤, 홍우진, 양경원 등) ~ 4월 20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태그:#나와 할아버지, #할아버지, #노인, #노년, #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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