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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영국 방문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저녁(현지시간) 런던 시내 '길드홀'에 도착해 차량에서 내리다 한복에 발이 걸리며 넘어지고 있다.
▲ '꽈당' 박근혜 대통령 영국 방문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저녁(현지시간) 런던 시내 '길드홀'에 도착해 차량에서 내리다 한복에 발이 걸리며 넘어지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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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넘어졌다. 대단한 뉴스일까? 내신이든, 외신이든 이 장면을 주요 화젯거리로 삼고 싶어한다면,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대통령은 결국... 사람이었다!"

그럼 무엇인 줄 알았을까? 한 마리의 봉황? 하지만 이보다 더 기이해 보이는 것은, 정반대 부류의 사람들, 즉 대통령도 한낱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다. 예컨대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이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의 영국 국빈방문 공식환영식이 열린 5일(현지시간). 아침부터 비를 퍼붓던 런던의 하늘은 환영식이 시작될 즈음부터 개기 시작했다. 마침내 오후 12시 10분 행사가 시작되자 잔뜩 찌푸린 하늘 뒤에 숨었던 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박 대통령을 태운 왕실마차가 버킹엄궁에 들어설 때는 햇빛이 쨍쨍 비췄다." - "朴대통령, 버킹엄궁 들어서자 비 그치고 햇빛 쨍쨍" (11. 5. 이데일리 피○○ 기자)

만일 박 대통령이 도착할 때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진다면 어떨까? 걱정할 것 없다. 기지는 어려운 순간일수록 빛을 발하는 법이다. 물론 날씨가 갠 상황보다 훨씬 높은 공력과 문학적 재능이 필요할 테지만.

"흔치 않은 자연현상이 나타날때 '서기(瑞氣:상서로운 기운)'로 여기는 일이 많다. 특히 날씨가 그렇다. 옛 시절에는 자연현상으로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기도 하고 앞날을 예견하는 운명의 '복선'쯤으로 여기기도 했다. 이번 중국 국빈방문 중 박근혜 대통령과 날씨의 상관관계가 회자됐다. 방중 첫날인 6월 27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단독·확대정상회담을 성공리에 마치고 이틀째인 28일에는 전날 국빈만찬에 이어 특별 오찬까지 하는 최고 예우를 받았다. 이날 저녁 베이징에는 드물게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낮에는 찜통더위와 높은 습도로 가만히 있어도 등에 땀이 흐를 정도이고, 불쾌지수마저 꽤 높았던 데다 각종 매연과 안개가 뒤섞인 스모그로 목이 따가울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이날 비는 베이징 하늘에 켜켜이 쌓인 오염을 말끔히 씻어내릴 만큼 시원함과 상쾌함을 선사했다. 연평균 강수량이 500㎜ 정도에 불과한 '마른 하늘'의 베이징에서 모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라는 게 현지인들의 반응이다." - (2013. 7. 1. 파이낸셜뉴스 정○○ 기자)

위의 글을 쓴 기자는 제목을 아예 "박 대통령과 날씨"라고 붙였고, 박근혜 대통령이 특사 자격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던 6년 전 기억까지 끌어왔다. 박 특사가 2008년 1월 베이징을 방문해 후진타오 전 주석을 만나려 할 때 "드물게도 폭설이 내렸다"는 것이다. 그게 기자 말대로 "상서로운 눈"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월에 내리는 눈이 드물다면, 언제 내리는 눈이 드물지 않은 눈인지 궁금하다.

대통령이 정말 부끄러워해야 할 일

앞의 글들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누구와 함께 있을 때 비가 오거나, 비가 안 오거나, 눈이 내리거나, (아마도) 눈이 안 내리면 상서로운 징조라는 사실이다. 저널리즘, 문학, 기상학을 융합한 탁월한 창의력의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드문' 역량을 지닌 기자들이 <이데일리>나 <파이낸셜뉴스> 등 경제신문 소속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줄까? '창조경제'의 성과가 피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상서로운 징표로 봐야 할까? 우박이나 진눈깨비에 대한 분석이 없는 것은 아쉽지만, 그건 탁월한 선배들 뒤를 이을 후배 기자들 몫일 것이다.

대통령이 다치지 않았다면 (다행히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가 넘어진 사실은 별 뉴스거리가 아니다. 기껏해야, 거동이 쉽지 않은 의상을 입은 대통령이 차에서 안전하게 내릴 수 있도록 섬세히 배려하지 않은 의전상의 허점 정도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경우든 대통령 잘못도 아니고, 부끄러워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기괴하게도 청와대는 이 사실을 당분간 보도하지 말라며 한국 언론에 '비보도'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대통령이 넘어졌다는 사실은 외신을 타고 국내에 전해졌고, 그제서야 한국 언론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청와대는 왜 그 소식을 막고 싶어했을까? 사소한 해프닝에 지나지 않는 사건을 말이다.

한 사람을 신비화하려고 애쓸수록 그의 인간적인 한계는 더 크게 부각되기 마련이다. 예컨대 대통령이 '날씨를 바꾸고 길운을 몰고 다니는' 비상한 능력이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나면, 다리를 삐끗한 하찮은 일도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훼손시키는 거대한 사건이 된다. 하늘의 뜻도 움직인다는 분이, 한 뼘 거리의 '땅의 뜻'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국민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대통령과 청와대의 노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편집증적 이미지 관리가 정권유지의 유일한 방편이 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실체가 빈곤할수록 이미지에 강박적으로 집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청와대의 '비보도' 요구와 호칭 하나에 발끈하는 모습에서 밑천 드러난 지도자의 암울한 그림자를 본다. '박근혜씨'가 그렇게 모욕적으로 들린다면, 자신들이 야당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어떻게 칭했는지 떠올려 볼 일이다. '연극'을 빙자한 행사에서 제 나라 지도자를 '노무현 육xx랄놈,' '개x놈,' '노가리 나쁜 놈'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과 같은 위치에 있던 사람에게 말이다.

한국은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는 나라?

영국 교포들이 박근혜 대통령 영국 방문에 맞춰 런던 빅벤 앞에서 '대선 무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영국 교포들이 박근혜 대통령 영국 방문에 맞춰 런던 빅벤 앞에서 '대선 무효'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 대비잭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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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묻고 싶다. 이는 대통령이 넘어진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다. 대통령은 왜 그때 유럽을 순방하고 있었는가? 국가기관의 조직적 부정선거 혐의로 나라가 홍역을 앓고 있던 것은 물론, 전교조 법외노조화 논란과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까지 터져나온 순간에 말이다.

유럽지도자들이 귀해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며, 영국 왕실의 황금마차를 아무 때나 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좋다. 청와대와 법무부 등은 왜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모든 일들을 작전 벌이듯 처리했는가? 정당 해산 심판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부터 느닷없는 정지선 위반 단속까지 말이다.

대통령이 자신이 없는 사이에 처리하라고 지시했다면 음흉하고 비겁한 것이고, 집권세력 스스로 벌인 일이라면 지도자가 무능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어떤 경우든, 대통령 이미지에 흠집이 나지 않을 시기를 택했다는 것은 정치권 스스로 떳떳지 못한 일을 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떠나기 전에도 침묵을 지키던 대통령은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영어, 중국어, 불어로 유창하게 연설하고 외국 언론과는 인터뷰하기를 즐기던 대통령이 정작 자신의 국민들에게는 모국어로 말하기를 거부한다. 정보차단은 권위를 유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는 나라"라고 말했다.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이 범죄를 수사하던 사람들이 석연찮은 이유로 물러나 징계를 받고, 법적 근거도 없는 정당 해산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말이다. '의혹을 정확히 밝혀 책임을 묻겠다'던 대통령 말에 기대를 품는다면 허망한 일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는 나라'에 어떤 반민주적 의혹의 실체가 숨어 있을 수 있겠는가.

박근혜와 메르켈의 차이 

지난 6월 오마바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메르켈이 입었던 통바지가 논란이 됐다.
 지난 6월 오마바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 메르켈이 입었던 통바지가 논란이 됐다.
ⓒ EPA/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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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비슷한 면이 있다. 두 나라의 첫 여성 최고 지도자라는 점과, 둘 모두 대학에서 이공계 분야를 공부했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둘의 공통점은 여기서 끝난다.

겉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차이는 '패션 감각'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화사한 옷맵시를 '외교'의 주요 전략으로 삼는 반면, 메르켈은 '옷 못 입는 정치인'으로 악명이 높다. 특히 메르켈이 2013년 6월 오바마의 독일 방문 당시 입었던 '통바지'는 적잖은 사람들을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다. 오죽하면 독일 패션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까지 나서서 "제발 신체 비율을 생각해서 옷을 입으라"고 빈정댈 정도였다.

디자이너가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두 나라의 차이겠지만, 더 큰 차이는 소통방식에 있다. 메르켈은 자국 국민들에게 '엄마(Mutti)'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친근한 정치인이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놀랄만큼 인기가 없다. 다른 나라에는 관심이 없고 '제 나라만 생각한다'는 게 이유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하면서도 어느 나라에서든 독일어로 연설하는 것도 메르켈의 성향을 잘 말해준다. 자국 국민과 거리를 둔 채 외국에서 좋은 이미지를 쌓기 위해 애쓰는 박근혜 대통령과 정반대다.

가능하면 자국과 외국 모두에서 사랑 받으면 좋겠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만일 어느 한 편에서 욕을 먹어야 한다면, 외국에서 먹는 게 옳다. 제 나라 국민을 섬기라고 뽑는 게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기이하게도 한국 정부와 언론은 자국 지도자가 외국에 나가 '몇 번 박수를 받는가'로 외교성과를 잰다. 외국에서 박수를 받기는 쉽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퍼주고' 오면 되기 때문이다. 정말 어려운 것은, 험한 말 듣기를 각오하면서 자국에 이득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의 공통점이 차이점으로 뒤바뀐 것도 있다. 가계복지 확대, 연금인상, 최저임금 인상, 공교육 강화 등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것은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하지만 집권 후 보인 행보는 천지차였다. 늘 '원칙'을 강조하던 박근혜 대통령이 입을 닫은 시기가 복지 공약이 어긋나기 시작한 시점과 맞닿아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이 차이는 메르켈이 국민에게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박 대통령의 침묵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그리고 그 침묵의 깊이만큼 대통령의 이미지 관리 작업은 치밀해질 것이다. 실체가 사라지고 난 자리에 남는 것은 이미지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사소한 해프닝을 둘러싼 정부의 호들갑은 불길한 신호일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 사회가 돌이키기 어려운 퇴행의 터널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들이 겪을 고통은 '이미지 훼손'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태그:#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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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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