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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세 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3년 10월의 일이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씨가 정리해고에 맞서 공장 크레인에 목을 맸다. 대구의 자동차 부품회사 세원테크의 노동자 이해남씨는 회사의 노동조합에 대한 손해배상 가압류에 저항하며 분신했다. 근로복지공단의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씨 역시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분신으로 투쟁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질책했다. 노동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의 차가운 반응에 노동계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다. 그 해 11월 9일, 종로거리는 성난 노동자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불바다가 됐다. 그렇게 큰 홍역을 앓고 난 후 10년이 지났다. 우리사회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자신의 몸을 던져 비정규직 차별과 노동탄압에 저항했던 그들의 삶을 돌아본다. - 기자 말

 9일 오후 부산 중구 부산역광장에서 '희망과 연대의 콘서트'를 마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며 영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으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2011년 7월 9일 오후 부산 중구 부산역광장에서 '희망과 연대의 콘서트'를 마친 희망버스 참가자들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중인 김진숙 지도위원을 응원하며 영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앞으로 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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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과 짝을 이루는 단어는 '정리해고다. 회사 측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사람들은 이 단어로 한진중공업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2011년 회사의 정리해고에 맞서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 올랐던 김진숙씨를 생각할 것이다. 그 뒤로는 그녀를 살리겠다고 전국에서 몰려온 희망버스를 떠올릴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진중공업이 김씨를 복직시켜 기업광고 모델로 내세우지 않는 한, 한진중공업 하면 '정리해고'다.

경영위기 책임은 언제나 노동자가 부담해야 하는가? 기업의 노사문제에 일반시민과 정치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는 우리 사회에 큰 물음을 던졌다. 때마침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문제와 맞물리며 "정리해고 철회! 함께 살자!"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온 수만 명의 시민들이 맨 몸으로 기업의 탐욕에 저항하는 김진숙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국회청문회를 통해 따가운 사회적 여론에 직면한 한진중공업은 2011년 말, 결국 무릎을 꿇었다. 사측은 93명의 해고자를 1년 뒤 복직시키고 생계지원금 2000만 원을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노조와 합의했다. 정리해고를 막지 못하면 35미터 크레인에서 죽겠다던 김진숙은 살아 내려왔다. 해피엔딩이었다.

김진숙보다 먼저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사람

사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3년, 김진숙이 올랐던 '85호 크레인'에 그녀보다 먼저 올랐던 사람이 있다. 김진숙과 마찬가지로 회사의 정리해고를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김진숙은 살아 내려왔지만 그는 거기서 목을 맸다. 그의 이름은 김주익(당시 40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지회장(위원장)이었다. 그의 죽음은 129일이 넘는 농성에도 꼼짝 않던 회사와 '귀족노조의 배부른 투정'이라 외면하던 정치권 그리고 파도만 넘실대는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었다.

한진중공업은 10년 전만 해도 재계순위 9위의 한진그룹 소속으로 2003년 부산지역 매출 1위의 기업이었다. 2002년, 당기순이익이 239억 원의 이 흑자기업은 '인력체질개선작업'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한다. 1000여명의 노조원들은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회사는 노동조합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손해배상을 통해 노동조합을 압박하는 것은 당시 기업의 새로운 대응전략이었다. 회사는 김주익을 비롯하여 노조간부 20명의 주택과 임금에 7억4천만 원의 가압류를 걸었다. 확인사살이었다.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만 21년, 그런데 한 달 기본급 105만 원, 그중 세금 등을 공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팔십 몇만 원. 근속년수가 많아질수록 생활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져야 할 텐데 햇수가 더할수록 더욱더 쪼들리고 앞날이 막막한데 이놈의 보수언론들은 입만 열면 노동조합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난리니 노동자는 다 굶어죽어야 한단 말인가. - 김주익의 2003년 9월 9일자 유서 중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이 18일 국회 한진중공업 청문회에서 지난 2003년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익 지회장의 사진을 들고 "이 사진 속의 사람을 알고 있나"며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말라,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질타하고 있다.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이 2011년 8월 18일 국회 한진중공업 청문회에서 지난 2003년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익 지회장의 사진을 들고 "이 사진 속의 사람을 알고 있나"며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말라,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질타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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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은 손해배상 앞에서 움찔했다. 결국 김주익은 2003년 6월 사측의 정리해고를 막기 위해 한진중공업 영도 조선소의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외롭고 지루한 129일의 농성의 시작이었다.

"올라갔단 얘기를 듣고 큰일 났구나 생각했지. 전날 천지회라고 친목모임도 안 나왔거든. 고민하다 혼자 (크레인에) 올라간 기라."

김병철씨가 10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병철씨는 김주익과 같은 나이로 특수선부 제작 현장에서 10년 가까이 함께 일했다. 그의 기억 속 김주익은 노조 간부임에도 "나대지 않고 묵묵히 (동료) 이야기 들어주고 행사 있으면 무대 지어주고 순대 사들고 찾아가 격려하는 소 같은 사람"이었다.

김주익은 1982년에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했다. 1994년에 노동조합 사무국장을 맡은 김주익은 파업으로 인해 구속되며 노동운동의 길을 걷게 된다. 당시 한진중공업 노조의 파업은 임금인상 보다 '일방중재의 폐지'와 해고자 복직이 핵심이었다. '일방중재' 조항은 노사 간 협상이 진전이 없을 경우 사측이 일방적으로 노동위원회에 중재를 요청하는 제도로 노조의 쟁의행위를 무력화 시키는 도구였다.

노조는 당시 LNG(액화천연가스)선을 점거하는 파업을 통해 일방중재 조항의 부당함을 전국적으로 알려냈다. 회사는 언론을 통해 실질임금 35% 인상안을 제시하는 등 파업중단을 요구했지만 노조는 거부했다(<동아일보> 1994년 7월 3일 치). 결국 노조는 해고자 '10명의 복직'과 '일방중재신청을 자제하는 데 사측이 노력을 기울인다'는 잠정합의안을 통과시키고 파업을 마무리 했다. 임금은 겨우 7% 인상하는 데 그쳤지만 노조는 단결권을 지키고 동료들을 지켰다는 데 의의를 뒀다. 이 같은 전통이 김주익의 노동운동에 원칙으로 배어들었다.

129일 고공농성에도 꼼짝 않은 회사와 정치권

 김주익 열사의 한진중공업 동료 김병철씨
 김주익 열사의 한진중공업 동료 김병철씨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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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중공업 노조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김주익의 고공농성에도 회사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노사협력팀과 노조가 손해배상 가압류를 철회하고 해고자를 복직시키는 조건으로 구두합의했지만 임원회의에서 거부당했다. 회사는 노조를 상대로 150억 원의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현장복귀를 거부한 180여명의 조합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통신문을 보냈다. 경찰은 김주익에게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2010년의 정리해고 사태와는 달리 정치의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는 대선 정치자금을 차떼기로 받은 한나라당이 나쁜 놈이냐 사과박스로 받은 민주당이 나쁘냐 하는 논쟁에 정신이 없었다. 권영길을 비롯하여 진보정당 인사들만 힘을 보탰다. 결국 김주익은 깊은 절망 속에서 10월 17일 85호 크레인에 목을 맸다.

"주익이가 자기 고집이 강하고 원칙을 지키는 스타일이라."

윤국성씨는 김주익의 죽음을 "깐깐한 책임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4년 한진중공업의 LNG선상 파업 당시 김주익과 함께 구속됐던 국성씨는 김주익을 "주익이는 왼팔, 재규는 오른팔. 둘 다 짝지(짝꿍)"라고 표현했다. 그는 김주익의 죽음에 대해 "주익이 죽고 재규가 따라죽고 그 다음은 나라고 생각했다"며 2003년 당시의 비참한 심경을 전했다.

김주익은 죽어서도 땅으로 내려올 수 없었다. 회사는 김주익의 죽음에도 쉽사리 협상테이블에 나서지 않았다. 10월 30일 김주익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던 동료 곽재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투신한 11미터 깊이의 4도크는 김주익이 목을 맨 85호 크레인 바로 옆이었다. 곽재규는 정리해고 대상이 아니었다. 동료들은 김주익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눈치를 보며 협상에 나서지 않는 "회사 측에 대한 분노"와 "먼저 간 동료에 대한 미안함"이 투신의 이유라고 말했다.

김주익의 죽음과 바꾼 전국 최고의 단체협약

 한진중공업 김주익-곽재규 열사의 약력이 실린 리플렛
 한진중공업 김주익-곽재규 열사의 약력이 실린 리플렛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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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 노동자가 죽고 나서야 회사는 무릎을 꿇었다. 노동조합에 대한 손해배상 가압류를 취하하고 해고자를 복직시키는 조건으로 단체협약(아래 단협)을 체결했다. 무엇보다 인원의 적정인력을 유지하고 경영상의 이유로 일방적인 인원조정을 하지 않기로 합의한 '고용안정확약서'가 빛났다. 김주익이 35미터 크레인에서 129일의 외로움과 싸우며 목숨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원칙이었다.

2003년 김주익과 곽재규의 죽음으로 얻어낸 회사와의 단협은 "전국 최고"였다. 경제지를 비롯한 보수언론들은 "한진중공업이 노조에 백기 투항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30억 원을 들여 노동조합 복지관을 세웠고 사장이 노조 지회장의 이취임식에 참석할 만큼 노조의 힘이 커졌다.

"김주익 지회장의 목숨 값으로 얻어낸 단협인데 우리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지회마저 흔들리고 있으니 열사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차해도씨는 죄인처럼 말했다. 지난 10월 20일 경남 양산 솥발산 묘역에서 김주익의 1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분위기는 침울했다. 김주익의 죽음으로 얻어낸 '해고자 복직'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최강서(당시 35세)의 죽음 때문이었다. 덥수룩한 수염에 옥빛 작업복을 걸친 모습이 김주익을 꼭 빼닮은 박성호 지회장이 분주히 산소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독려했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쩌지 못했다.

 김주익 열사의 한진중공업 동료 윤국성씨
 김주익 열사의 한진중공업 동료 윤국성씨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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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2011년 노조와 합의한 93명 해고자 복직 약속을 뒤집었다. 2012년 11월 12일 복직 후 출근 3시간 만에 해고자들은 무기한 휴업을 통보받았다. 더구나 노조에는 158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노조 조직차장을 맡고 있던 최강서는 12월 21일 "듣도 보도 못한 돈 158억 손해배상을 철회하라"며 스스로 목을 맸다. 그는 유서에서, 복수노조로 간 동료들에게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지껏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입니까"라고 호소했다.

병철씨는 "회사는 주익이와 진숙이 때문에 두 번이나 무릎을 꿇고 나서 칼을 갈았다"고 말했다. 1000여명에 달하던 조합원은 10년간의 정리해고 투쟁을 거치면서 190명이 남았다. 복수노조의 시행으로 2012년 1월 창립한 한진중공업노동조합(아래 기업노조)로 많은 조합원이 옮겨갔다.

장기간의 파업투쟁으로 생계비 곤란을 겪는 조합원들을 금속노조 지회가 다 챙겨낼 수는 없었다. 그 틈을 비집고 기업노조는 "작금의 고용과 휴업문제는 '투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금속노조 지회 집행부는 김진숙 문제와 해고자 문제에만 몰두했다"고 지회를 비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은 "회사가 '휴업할래? 기업노조로 갈래?'라고 회유하는 현실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190여명의 지회 소속 조합원 중 29명만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나머지는 휴직 상태로 생계를 위해 진해로 울산으로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었다.

세대교체 한 노동조합, 다시 밑바닥부터

 박성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10월 20일 양산 솥발산 묘역에서 김주익 열사의 10주기 추모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박성호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이 10월 20일 양산 솥발산 묘역에서 김주익 열사의 10주기 추모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이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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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박성호 지회장은 희망을 말했다. 그는 김주익의 죽음으로 2006년 복직했다. 2011년 정리해고된 조합원들의 대표로 활동하다가 이번에 지회장에 당선됐다. 이제 막 당선된 그의 어깨는 무거웠다. 최강서의 죽음 이후 지회 내에 미묘한 세대갈등도 생겼다. "강서의 죽음으로 분노가 임계점을 넘은 젊은 조합원들이 많아졌고 50대 고참 조합원들이 그들을 달래고 있다"는 것이다.

차해도씨는 "현장에서 복수노조로 넘어간 동료들을 차분하게 설득하고 지회를 복원하면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박 지회장은 오히려 "젊은 조합원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간부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 고맙다"고 말했다. "두 세대의 간격과 생각 차이를 줄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고 김주익의 뜻이라는 것이다.

김주익의 누나 김외숙씨는 "가을 국화가 필 때면 '아 솥발산에 갈 때가 됐구나, 한진 분들 만날 때가 됐구나' 하고 동생을 떠올린다"며 "잊지 않고 동생을 찾아주는 사람들이 고맙다"고 말했다. 매년 김주익 추도사를 낭독했던 김진숙씨는 추모객 제일 뒷줄에서 조용히 절을 올렸고, 김주익의 '짝지' 윤국성씨가 김주익의 무덤에 술을 올리며 말했다.

"주익아 마이 묵으라."

 김주익 열사를 추모하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가운데)
 김주익 열사를 추모하는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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