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세 명의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해 10월의 일이었다. 한진중공업 노동자 김주익씨가 정리해고에 맞서 공장 크레인에 목을 맸다. 대구의 자동차 부품회사 세원테크의 노동자 이해남씨는 회사의 노동조합에 대한 손해배상 가압류에 저항하며 분신했다. 근로복지공단의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씨 역시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무현 대통령은 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분신으로 투쟁하던 시대는 끝났다"며 질책했다. 노동인권변호사 출신의 대통령의 차가운 반응에 노동계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었다. 그해 11월 9일, 종로거리는 성난 노동자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불바다가 됐다. 그렇게 큰 홍역을 앓고 난 후 10년이 지났다. 우리사회는 그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자신의 몸을 던져 비정규직 차별과 노동탄압에 저항했던 그들의 삶을 돌아본다. - 기자 말

비정규직을 철폐를 주장하며 분신한 이용석
▲ 고 이용석 동상 비정규직을 철폐를 주장하며 분신한 이용석
ⓒ 이재언

관련사진보기

고등학교 교사 권오정(32)씨는 2003년 10월 26일을 잊지 못한다.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이었다. 대학생이었던 오정씨는 학과 소모임 신입생들과 서울 종묘공원에서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공동으로 개최한 노동자 집회에 참가했다. 비정규직 차별을 규탄하는 집회였다.

집회가 마무리 될 무렵이었다. 종묘공원 화단 가운데에 앉아있던 권오정씨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참가자들의 날카로운 비명을 듣고 달려간 자리에서 어느 노동자가 불타고 있었다. 화염과 함께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에 타는 가운데도 그는 "비정규직 차별 철폐하라"고 구호를 외쳤다. 주위 사람들이 옷가지로 그의 몸을 덮어 불을 껐다. 그가 불탄 자리에 검은 그을음이 남았다.

그의 이름은 이용석(당시 31세).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의 계약직 노동자였다. 그는 신안군의 작은 섬 상태도에서 태어나 전남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했다. 바쁜 직장생활 틈틈이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던 반듯한 청년이었다.

이용석 열사의 10주기를 앞둔 지난 10월 11일, 열사의 여동생 이선화씨(40) 부부와 '이용석 열사 정신계승사업회' 김태진 집행위원장, 그리고 당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 활동을 함께 했던 동료들을 만났다.

오빠의 분신에 배후가 있지 않을까?

"오빠가 노동조합 활동을 했는지도 몰랐어요. 솔직히 저나 고향 사람들은 당시 경찰의 분신배후설이 사실이 아닐까 생각했죠."

여동생 선화씨가 말했다. 이용석씨의 분신 직후, 당시 김성훈 영등포경찰서장은 "과거 학생운동이 거셀 때를 생각해보면 요즘도 거기 위쪽에서 기획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며 "분신에 배후(민주노총 지도부)가 있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가족인 선화씨도 당시에는 경찰의 '분신배후설'을 사실이 아닐까 의심할 만큼 이용석씨는 노동운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빠의 죽음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얼마나 큰 사회적 문제인지가 알려진 거죠. 이젠 가정주부나 학생들도 비정규직 차별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선화씨는 오빠의 죽음이 가져온 우리 사회의 변화를 이렇게 설명했다. 노동계에서는 이용석씨를 '최초의 비정규직 열사'라고 평가한다. 이용석씨의 죽음 이후 비정규직 차별 문제가 우리 사회 중요 노동문제로 떠올랐다.

이용석씨가 대학을 졸업한 1998년, 대한민국은 외환위기로 국가 경제가 꽁꽁 얼어 있었다. 경기가 위축되고 청년실업이 유행처럼 번졌다. 공기업 입사를 준비하던 이용석씨는 선배의 소개로 2000년 2월에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에 들어갔다. 고용보험 신고서류를 담당하는 3개월짜리 일용직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공공부문 경영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린 탓에 생긴 일자리였다.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당선된 노무현 정부 들어서도 이용석씨는 비정규직이었다. 계약기간이 3개월에서 1년으로 늘었을 뿐이었다. 노무현 정부는 카드대란으로 촉발된 경기침체에 속수무책이었다. 기업투자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보수언론의 압박이 이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필요했다. 결국 노무현 정부도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노동유연화'로 방향을 틀었다.

2003년 8월 당시 공단의 전체 직원의 34%가 비정규직이었다. 상급기관인 노동부조차 직업상담원 등 전체 직원의 50%에 가까운 인력을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잡비'로 월급 받던 비정규직

이용석 열사의 평전소설 <날개 달린 물고기>(이인휘 지음, 삶이보이는창 펴냄)
 이용석 열사의 평전소설 <날개 달린 물고기>(이인휘 지음, 삶이보이는창 펴냄)
ⓒ 삶창

관련사진보기

그럼에도 이용석씨는 희망을 품었다. 동료들도 그의 성실하고 꼼꼼한 일처리를 칭찬했다. 결국 그는 2003년 1월 1년 계약직으로 전환됐다. 그는 좀 더 노력해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의 평전을 쓴 이인휘 작가는 당시 이용석씨의 희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목숨 줄이 3개월에서 1년으로 늘어나고, 월급도 정규직의 절반 수준에서 몇 십만 원이 더 추가되었다. 용석은 정규직처럼 복리후생비는 받지 못했지만 낮은 수준의 상여금이라도 받을 수 있게 된 걸 생각하며 다시 기운을 냈다." - 이용석 열사 평전소설 <날개 달린 물고기>(삶이보이는창) 중

정규직으로 가는 길은 아득하고 험난했다. 4년차 정규직이 188만 원을 받을 때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은 123만 원을 받았다. 1년으로 따지면 1000만 원의 격차였다. 정규직에게 보장되는 식대와 교통비, 가족수당과 성과급은 물론 병가와 경조비는 비정규직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우린 사업비예산에 재료비에 잡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건비가 아닌 잡급으로, 그래서 사용자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유 업무, 동일노동을 제공하고도 우린 마치 인간이 아닌 재료처럼, 필요한 기계로만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가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남긴 편지의 일부 내용이다. 그는 비정규직을 대하는 공단의 태도에 인간적 모욕감을 느꼈다. 근로복지공단 지역지사가 당시 비정규직의 임금을 책정한 비용항목은 사업예산의 재료비 중 '잡급'이었다. 내부시험을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만이 비정규직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공단은 간부 적체를 이유로 정규직 전환을 위한 내부공채의 폭을 줄였다. 비정규직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비정규직 가입 부결시킨 정규직 노동조합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 대의원 대회에서 이용석 열사의 모습
▲ 생전의 이용석 열사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 대의원 대회에서 이용석 열사의 모습
ⓒ 이용석 노동열사 정신계승사업회

관련사진보기


"공채로 입사한 공사나 공단의 공공부문 정규직의 엘리트 의식이 비정규 노동자들과 벽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열사의 죽음으로 주변상황은 급변하는데 노동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었죠."

당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을 지원했던 김태진 집행위원장의 말이다. 근로조건보다 이용석 열사를 더 절망케 한 것은 비정규직 문제를 바라보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싸늘한 시선이었다.

2003년 4월 근로복지공단 정규직 노동조합은 대의원대회에서 비정규직의 노조가입 안건을 부결시켰다. 비정규직이 가입하게 되면 비정규직의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이 핵심적인 교섭사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정규직 대의원들 사이에서 정규직의 요구사안이 묻힐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이용석씨는 자신과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시대가 낳은 사생아" 취급을 받고 있다고 분노했다.

결국 비정규직의 근로조건 개선을 호소하는 정종우(당시 보령지사 근무)의 제안으로 2003년 4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위원장 정종우)이 독자적으로 결성됐다.

2003년 5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 설립보고대회
▲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 결성 2003년 5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 설립보고대회
ⓒ 이용석 노동열사 정신계승사업회

관련사진보기


내성적 청년이 노동조합 간부가 된 이유

'블랙커피와 담배를 즐기며 사색에 잠기기 좋아했던 내성적인 청년' 이용석이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는 목포의 공부방 학생들 때문이었다. 이는 열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전 공부방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평등함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걸 가르쳐온 내가 이런 현실에 복종하여 참아왔습니다. 인간 대접도 받지 못하는 처지에 어찌 학생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을 가르치겠습니까?"

이용석씨는 학생들에게 "경제적 차별에 굴하지 말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자신의 현실은 "차별에 대한 노예"였다. 열사는 심각하게 갈등했다. 결국 그는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조합 활동에 나섰다. 김태진 집행위원장은 "(이용석) 열사가 노동운동의 경험이 없던 순수한 현장 노동자지만 굉장히 진지했다"며 "서울에서 열리는 노조회의에 매번 심야버스를 타고 올라와 심야버스를 타고 내려갈 정도로 열심히 했다"고 회고했다.

노동조합 관계법에 따라 사용자인 공단은 노조의 교섭요구에 성실하게 응해야 했다. 그러나 결정권자인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교섭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교섭에는 권한 없는 지역본부장들이 나왔다. 그들은 교섭의 쟁점사항을 비껴가며 변죽만 울렸다. 이용석씨는 유서에서 "파업을 준비하며 사쪽의 많은 부당노동행위들을 보면서 우리의 싸움이 얼마나 힘들까 가슴이 메어온다"고 썼다. 본부 측의 교섭회피에 절망한 것이다. 결국 그는 분신이라는 극단적 저항의 방식을 택했다.

이용석씨는 분신 후에도 40일 가까이 땅에 묻힐 수 없었다. 교섭이 여전히 답보상태였기 때문이다. 선화씨와 어머니 오강님(2004년 작고)씨가 열사의 시신을 지켰다. 가족들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문제의 가시적 해결 없이는 열사의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뜻을 모았다. 형 병우씨가 대표로 열사의 장례식 일체를 상급단체인 공공연맹에 위임했다. 500여 명의 조합원은 노숙농성을 하며 공단을 상대로 투쟁했다. 근로복지공단의 교섭회피에 대해 여론의 따가운 질책이 쏟아졌다.

결국 파업 41일 만에 근로복지공단 노조는 공단과 '비정규직의 임금인상'과 '처우개선비 지급', '비정규직의 단계적 정규직화', '이용석 열사의 6급 명예정규직' 예우' 등의 협상안에 합의했다.

고 이용석씨의 관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는 고인의 어머니 오강님 여사.
▲ 오열하는 열사의 어머니 고 이용석씨의 관을 붙잡고 오열하고 있는 고인의 어머니 오강님 여사.
ⓒ 안현주

관련사진보기


변한 것 없는 세상이지만 '고맙고 미안한' 존재

"밉습니다, 미워요. 그렇게 먼저 가시고."

당시 이용석씨와 함께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정아무개씨가 말했다. 그는 현재 근로복지공단 정규직 노동자다. 이용석씨의 죽음으로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 약 700명이 단계적으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정씨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노동조합 활동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에 소홀해졌다"고 말했다. 이용석씨는 그럴 때마다 정씨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고맙고 미안한" 존재다.

10년 전 이용석 열사의 죽음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오정씨는 계약직 교사다. 그는 열사의 죽음으로 우리사회의 비정규직 차별이 어느 정도 해소됐지만 크게 바뀌건 없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오정씨는 매년 재계약 때면 신경이 곤두서는 불안정 노동자다. 그럼에도 오정씨는 이용석씨를 떠올리며 비정규직 차별과 같은 사회문제에 소홀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그는 "기회가 되면 학생들과 진행하는 독서모임에 이용석 열사의 삶이 담긴 평전을 읽고 토론할 계획"이라고 자신만의 추모계획을 밝혔다.

이용석 노동열사 정신계승 사업회는 매년 10월 가요제를 통해 열사를 추모하고 비정규직 차별철폐의 정신을 알려낸다.
▲ 이용석 열사 가요제 이용석 노동열사 정신계승 사업회는 매년 10월 가요제를 통해 열사를 추모하고 비정규직 차별철폐의 정신을 알려낸다.
ⓒ 이용석 노동열사 정신계승사업회

관련사진보기




태그:#이용석 열사, #비정규직, #이용석 가요제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이 밤이 서서히 물러갈 때, 이 봄날의 꽃이 자신들을 위해 화사하게 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자신을 지키게 될까?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