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학부생 시절 나는 전공 서적을 찾기 위해 종종 서점의 구석진 코너로 뺑 둘러가는 수고를 해야 했다. '요즘 누가 철학 서적을 사냐' 라는 말이 서점 입구에서 환청으로 들릴 만큼 철학 서적은 서점의 맨 모퉁이에 매우 적게 배치되어 있다. 대신 자기계발서는 서점의 가장 앞에서부터 시작해 장르와 상관없이 눈에 잘 띄는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책의 제목을 잘 살펴보면 마치 이 책을 읽으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고, 자수성가 할 것 같고, 유명한 웅변가처럼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자기계발서를 읽고 자신이 달라졌다는 사람들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들이 매우 잘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를 자아 과잉의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계발서를 통해 '빛나는 자아를 만들어야 이 사회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부터 시작해서 내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를 파악하고, 못난 점을 끊임없이 혁신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심지어 타자와 관계를 맺는 일도 내가 필요 할 때만 유용한 일이다. 즉, 내 일에 필요하지 않다면 친구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최근 입시 학원 광고에까지 "벌써부터 흔들리지 마. 친구는 너의 공부를 대신해주지 않아"라는 말이 나왔겠는데. 자기 인생의 성공을 위해 친구와의 우정 따위는 버리라고 말하는 셈이다.


 <비포 미드나잇>의 제시와 셀린느. 18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비포 미드나잇>의 제시와 셀린느. 18년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 (주)팝엔터테인먼트


사랑, 그 달콤함은 타자를 인식하는 과정


자아의 과잉 시대 속에 타자와 관계를 맺고 그의 입장에 서서 함께 삶을 살아가는 경험은 왠지 고리타분한 흑백 영화 속 이야기인 것 같다. 오로지 현대 사회에서는 자아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강화시켜나갈 때 자신의 삶이 존중받고 주변에 사람들이 모일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타자를 인식하고, 그들의 입장이 되어가는 것은 아직은 우리에겐 소중한 경험이다.


타자를 인식하는 과정 중, 그 첫 번째는 '사랑'이다. 연애를 시작하거나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에도 주목하지만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과연 저 사람은 취미가 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이상형은 누구인지 등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촉각을 곤두 세워 관찰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시간을 투자하기보다는 타인의 삶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 대부분이 그렇듯 일상이 붕괴되거나 상대방 생각에 잠을 못 이루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삶을 계발하는 것에 투철한 사람조차 사랑에 빠지면 본인의 삶을 잘 돌보지 못한다. 그 만큼 사랑은 타인의 삶에 흠뻑 빠져드는 경험이다.


<비포 선라이즈>(1996)에서 셀린느(줄리 델피 분)와 제시(에단 호크 분)는 첫 눈에 반해버린다. 비엔나로 향하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두 사람은 서로를 알기 위해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랑과 실연 그리고 결혼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 미적 취미 등. 두 사람은 영화 속 내내 쉬지 않고 상대가 누구인지 심문 하듯이 열정적으로 대화를 나눈다. 하루라는 시간 속에 그들은 호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 6개월 후에 만날 것을 약속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하지만 영화는 6개월 만에 나오지도 않았고 6개월을 뒤를 가정하여 개봉하지도 않았다.


대신 2004년 <비포 선셋>이라는 영화 속에서 9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비포 선라이즈>의 내용에 이어서 두 사람은 또 우연히 파리에서 만나게 된다. 우연한 만남 이었지만 그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또 영화 내내 서로의 감정과 삶을 묻고 답한다. 그리고 그들의 감정이 9년 동안 식지 않았고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은 또 각자의 삶에 돌아가게 되는데, 난 여기서 영화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의 뜨거움은 식고, 현실을 논하기 시작한 커플

하지만 2013년 <비포 미드나잇>이 개봉했다. 영화는 제시와 셀린느가 결혼했고, 자녀가 둘이라는 것을 전제로 시작한다.


전작에서 제시와 셀린느는 서로의 사랑하는 감정에 대해서 열정적으로 알고자 노력하는 모습만 나온다. 그렇다 보니 그들 각자 현실 세계에서 고민하는 것이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다. 단 하루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영화로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비포 미드나잇>에서는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서로의 관계, 가족, 직업 등에 대해서 논쟁하기 시작한다.


셀린느는 육아의 부담을 제시에게 털어 놓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자신도 노력을 많이 했다고 화부터 낸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그런 감정들을 남자가 받아주고 함께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나갈지 진지하게 고민해줬으면 하는데 제시는 화부터 낸다. 그리고 육아 과정에서 셀린느가 중단했던 일을 다시 시작하면 어떨지 제시에게 묻기도 한다.

별 생각 없이 제시는 "하면 되지"라고 말은 하지만 육아 부담에 대해 두 사람은 또 다시 싸우게 된다. 물론 셀린느 또한 제시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해 지적하며 변할 것을 끊임없이 촉구하며 열을 낸다.


<비포미드나잇>은 전작에서 보인 연애의 달달함은 사라진 채 현실적인 문제를 권력 다툼을 하는 모양새였다. 처음에는 정말 아름다운 커플이었던 두 사람이 현실 문제 속에 이렇게 싸우는 것을 보니 10년간 기다렸던 환상이 무너져 내렸다. 전작을 통해서 본 두 사람의 삶은 결혼을 해도 삶과 죽음을 논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예술과 철학적 삶을 고민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도 한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현실에 놓여 있는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비포 미드나잇> 스틸 사진.

<비포 미드나잇> 스틸 사진. ⓒ (주)팝엔터테인먼트


사랑은 타자를 인식하는 과정, 결혼은 타자가 되는 과정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통해서 사랑은 타인을 인식하게 되는 최초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비포 미드나잇>에서 결혼은 타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을 '체험'해보지 않았기에 영화와 주변 커플들을 보고 추론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변의 많은 기혼 커플을 보며 둘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연애를 통해 사랑이 꽃피고 결혼도 했지만, 현실의 문제 속에 지친 커플은 서로를 포기하는 수도 있다. 각자의 삶을 이해하고 상대의 입장이 되는 것을 포기한 채 최소한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차가움이 결혼 생활에 팽배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최소한의 선을 침범하고 각자의 삶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에는 이혼을 선택하는 것 같다.


반면 <비포 미드나잇>에서 그린 결혼은 서로 타자가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셀린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다면 그때도 자신을 견딜 수 있는지 제시에게 묻는다. 능글 맞게 넘어가려는 찰나에 셀린느가 다시 묻자 제시는 진지하게 답변한다. 제시는 "하나 바꿀 수 있다면, 날 바꾸려는 걸 막고 싶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을 오해하면 서로 각자의 삶대로 내버려 두자라고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 더 고민해보면 결혼 과정 속에서 상대는 평생 변화의 대상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렇지만 만약 내가 타자의 삶이 된다고 생각하고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굳이 상대의 성격, 말, 행동 등을 지적할 필요가 없다. 상대의 삶 또한 나의 삶이기 때문에 그 행동과 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더욱 깊이 고민할 것이다. 태도의 변화를 위해 지적하기보다는 공감할 것이고, 상대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물론 서로가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의 갈등은 첨예할 것이다.


곧 <비포 미드나잇>은 자아의 과잉의 시대에 나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되어 볼 것을 제안하는 셈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왓챠 영화 아마평론가 1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비포미드나잇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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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부산본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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