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미드나잇> 중 한 장면

<비포 미드나잇> 중 한 장면 ⓒ 팝 엔터테인먼트


아이들이 읽는 동화들을 보면 우여곡절 끝에 사랑하는 연인(대개는 왕자나 공주)들이 '그래서 그들은 결혼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맞는 것으로 끝난다. 결혼은 로맨스의 완성이라고 하던가. 애타게 그리워하고, 사모하던 연인들은 결혼에 골인하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우연히 기차에서 만나 사랑을 싹틔운 풋풋한 청춘, 제시와 셀린느. 그들은 <비포 선셋>에서 9년 만에 파리에서 재회한다. 역시 로맨틱하고 애틋하다. 다시 9년이 흘러 이 아름다운 커플이 어찌 됐나 보니 상황은 이렇다. 남자는 결혼에 실패하고 신경질적인 전처에게 사춘기 소년 아들을 맡기고 있고, 아들이 방학이나 돼야 유럽에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처지. 셀린느는 이혼남인 제시를 다시 만나 예쁜 쌍둥이 딸을 낳고 키우는 엄마가 됐다. 세월은 이들을 40대 초반의 중년으로 만들었다.

사랑이 어떻게 일상이 돼 진부해지는가에 대해서는, <우리도 사랑일까?>(Take this waltz)라는 영화도 잘 보여준 바가 있다. 제시와 셀린느 부부는 모처럼 딸아이들 돌보는 양육의 부담에서 벗어나 남부 펠로폰네소스의 작은 도시에서 호텔에서의 로맨틱한 하룻밤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친구 부부의 호의 덕분에 말이다. 와인과 커플 마시지 쿠폰까지, 친구 부부의 배려에 감동하며 무드를 잡으려는 찰나,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의 전화가 오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된다(때로 소중한 순간에는 전화기를 꺼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아들과의 전화 통화로 촉발된 이 부부의 말다툼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남자들이 보기엔 아내의 바가지로 여겨질 만한 잔소리겠지만, 아이를 양육하는 부담을 고스란히 안고 사는 (가끔 남자들의 생색내기 도움이 있긴 하지만,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되던가) 여자들은 뭔가 억울하고 맨날 양보나 희생을 하고 사는 듯한 기분을 가질 만하다. 그렇게 해서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하던 셀린느가 이제는 40대 중년이 돼 더 씩씩한 아줌마가 됐다. 아랫배를 비롯해 몸에 살도 꽤 붙고, 심지어 탈모 걱정도 한다. 35세가 넘어 좋은 점은 강간당할 확률이 줄어들어 좋다면서, 밤중에 아이들 재우려고 유모차를 내내 끌었다는 얘기를 할 때는 웃음이 나면서도 격하게 공감이 된다. 

비엔나와 파리를 거쳐, 그리스의 작은 도시로 온 비포 시리즈의 완결판이랄까. 이 영화는 왜 그리스를 선택했나. 나는 영화의 주제와 상황이 그리스와 썩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돌아보기에는 그리스가 제격인 것이다. 칠순 노인에서부터 장년층의 부부들, 10대 젊은 커플까지 둘러 앉아서 그들만의 에로스와 삶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멋있고 의미심장하다. 마치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이 책 <향연>에서 그렸던 주연과 토론의 풍경이 그 자리에서 재현되는 듯하다. 삶은 스쳐 지나가는 것, 추억만 남기고 아련히 스쳐 지나는 것이 인생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로맨스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일상의 무게가 우리를 좀먹더라도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서로 예의를 다해 좋은 추억들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 것 깨닫게 해주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영화는 롱 테이크로 이들 커플이 말다툼하는 장면, 일상의 고민을 상의하는 장면 등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것, 이들 부부는 무척 건강한 관계이고 팔순이 넘어서도 함께 여생을 보낼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나저나 <비포 미드나잇>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더 가능할까? 이들 부부가 팔순 넘어서 사는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제시와 셀린느 커플이 백년해로하길 바란다.

비포 미드나잇 줄리 델피 에단 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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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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