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프로야구에서 매년 한 번쯤은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사태가 바로 '불문율' 논란이다. 불문율이란 말 그대로 문서에 적혀 있지 않은 규칙이다. 공식적인 규정에 없지만 암묵적으로 공공의 동의를 얻어서 지켜지는 약속에 가깝다. 문제는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이러한 불문율을 어디까지 적용하고 기준을 정하느냐에 따라 천양지차라는 점이다.

지난 2012시즌 9월 12일 잠실 LG-SK전, 3점 뒤진 LG가 9회말 2사 후 갑자기 투수 신동훈이 대타로 나와 타격 의지를 보이지 않은 채 삼진을 당하면서 경기가 끝났다. 사실상 SK로 승부가 기운 상황이었지만 김기태 감독이 투수를 대타로 세운 것은 사실상 경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당시 SK 이만수 감독의 투수교체에 대한 불만으로 알려졌다. 이미 경기 흐름이 SK 쪽으로 기운 상황에서 이만수 감독의 연이은 투수교체가 야구의 불문율을 깨고 LG를 기만했다는 것으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규정상 당시 이만수 감독의 투수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올 시즌에도 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지난 21일 잠실에서 벌어진 넥센과 두산은 빈볼시비로 집단몸싸움까지 가는 사태를 초래했다. 팀이 12-4로 앞선 5회 강정호가 도루를 한 후에 넥센은 유한준, 김민성이 연속 빈볼을 맞았다. 이번에도 '큰 점수차로 리드를 하고 있는 팀이 도루를 하지 않는다'는 야구의 불문율을 깼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빈볼을 던진 윤명준은 퇴장과 함께 8경기 출장정지의 중징계까지 받았다.

이튿날 양팀 감독과 선수들이 공개적으로 화해하며 사건은 종료됐지만 양 팀의 불필요한 감정싸움은 팬들에게 씁쓸한 뒷맛으로 남았다. 그리고 앞으로 언제든 이런 사태가 또 재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한 번쯤 한국야구의 불문율 문화에 대한 공론이 있어야 할 시점이다.

불문율 취지는 '나와 상대에 대한 존중'

기본적으로 이러한 불문율의 취지는 '나와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야구라는 스포츠는 경쟁에 그 기반을 두고 있지만, 함께 뛰는 상대에 대한 예의와 존중이 없으면 품위를 잃기 쉽다.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투수교체나 도루를 자제하거나, 타자가 홈런을 친 뒤에 세리머니를 하지 않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상대가 비신사적인 행위를 한다고 판단될 경우,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보복성 플레이가 존재한다는 것도 야구만의 특징이다. 바로 '빈볼' 역시 규정에는 없는 야구만의 불문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고의적인 빈볼을 던지지 않는 것도 불문율에 해당되지만, 만일 상대가 도발을 하거나 먼저 불문율을 어겼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다음 수비 상황에서 투수가 상대 타자에게 빈볼을 던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러한 불문율들은 우리보다 야구역사가 앞서 있는 미국과 일본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정착된 면이 크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불문율의 존재로인한 장점도 있다. 자칫 거칠어지기 쉬운 승부의 세계에서 불문율을 통해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 팀의 결속과 존엄성을 보호하고,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플레이를 사전에 자제하도록 만드는 효과도 있다.

하지만 과거의 불문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에서 오늘날에는 불문율이 때때로 야구의 창의성과 달라진 시대상황을 반영하지 못하는 고정관념이 되기도 한다. 불문율이라는 잣대를 확대해석하여 오히려 규정에도 없는 '그들만의 규칙'으로 팬들의 상식이나 정서에 역행하는 결과도 벌어진다.

예를 들어 축구에서는 멋진 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하는 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지나친 정치적 메시지나 상대를 도발하는 행동은 축구에서도 금지되어 있지만, 멋진 세리머니는 선수의 감정을 표현하고 팬들과도 소통하는 '퍼포먼스' 기능을 한다.

근데 야구에서는 경기 중 그라운드에서 어떤 식으로든 선수의 감정표현을 드러내지 않는 게 불문율처럼 굳어져 있다. 야구의 꽃은 홈런인데 홈런을 친 선수가 세리머니를 하거나 심지어 타구를 살피다가 조금만 천천히 걸어도, 항의를 받거나 다음 타석에서 빈볼이 날아오기 십상이다. 상대 투수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투수교체나 '무관심 도루' 등도 마찬가지다.

야구로 생긴 빚은 야구로 갚아주는 게 예의

그런데 크게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투수를 자주 바꾸거나 도루를 하면 안 된다는 것보다 훨씬 더 상위개념에 있는 야구의 불문율은, 바로 '끝까지 승부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똑같은 7~8점차라고 해도 5회냐 9회냐에 따라 분위기는 천차만별이다. 특히 요즘같이 불펜의 비중이 커지고 역전승과 역전패가 비일비재한 상황에서는 한 이닝에서라도 점수차가 크게 뒤집어질 수 있다.

크게 리드하는 팀이라고 해도 확실히 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1점이라도 점수차를 더 벌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은 그들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점수차가 크게 벌어진 경기에서 크게 이기고 있는 쪽이나, 혹은 뒤지고 있는 팀이 승부를 포기하고 주전들을 대거 교체하거나 혹은 남은 이닝을 설렁설렁 뛰는 것이 과연 승부에 대한 예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을 불문율로 합리화할 수 있을까.

이기고 있는 경기, 특히 9회에서도 투수교체를 자주해 '벌떼야구'로 악명 높았던 김성근 고양 원더스 감독이 가장 많이 비판받았던 부분이 '성적에만 눈이 멀어 매너 없는 야구를 한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그날 경기의 흐름은 물론이고 상대 타자들과 우리 투수들의 데이터, 심지어 다음 경기 이후를 대비한 마운드 운용까지 고려하여 투수교체를 단행한다"며 "규정에 어긋난 것도 아니고, 경쟁팀들이 불만이 있으면 야구로 이를 뛰어넘어야지 불평이나 해서는 안 된다"고 일축한 바 있다.

더구나 야구는 어디까지나 기록의 스포츠다. 점수차가 10점 이상 벌어지고, 그날 타석에서 이미 4안타를 때린 타자가 또 나왔다고 다음 타석에서 설렁설렁 방망이를 휘두르다 아웃되거나 도루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기록스포츠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선수가 자신들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기장에 돈 내고 찾아온 팬들을 모욕하는 짓이기도 하다. 넓은 의미에서는 그런 것도 승부조작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불문율의 취지는 어디까지나 야구의 근본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지나친 경쟁의식과 성적지상주의로 인한 비신사적 행위에서 선수를 보호하자는 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지난해 LG의 투수 대타 사건, 올해 두산과 넥센의 집단몸싸움 시비에서 드러난 불문율 논란은 말그대로 야구 불문율에 대한 고정관념과 아전인수격인 해석에서 비롯된 해프닝에 불과하다.

염경엽 넥센 감독은 지난 집단몸싸움 사태 이후 "미국식 불문율에서 벗어나 한국야구만의 불문율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옳은 이야기다. 문화는 그 시대와 환경의 토양에 맞게 새롭게 수정되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승부는 매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고, 야구로 생긴 빚은 야구로 갚아주는 게 예의다. 규정에도 없는 불문율을 핑계로 내세워 자존심을 세우려는 것은 더 이상 시대에 뒤떨어진 고정관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야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