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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접경지역. 고백하건대 겨레하나에게 접경지역은 지극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평양, 개성, 신의주, 백두산, 금강산…. 인도적 지원을 매개로 통일운동을 해온 우리단체가 시민들에게 소개할 곳은 많았고, 2004년 아리랑 관광 이후 한 해 한 번씩 서울에서 출발해 평양으로 가는 직항기를 띄우는 일이 연례행사였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백두산에 오르다니, 우리 땅으로 오를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남북관계가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남과 북, 통일을 느낄 수 있는 현장에 목마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격앙된 목소리들 뿐,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건강한 희망을 이야기할 곳은 없었다.

그렇게 결심하게 된 지난 9월  19~23일까지의 조중접경지역 답사. 어찌 보면 단순한 출발이었지만 접경지역이 품고 있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미래 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고 말았다. 지금은 남과 북이 품고 있지 못한 역사의 땅이자 동아시아의 미래를 결정할 위기와 기회의 땅, 조중접경지역 현장에서의 소회를 전하고자 한다. - 기자 말

답사단이 타는 열차는 대련에서 용정까지 달리는 완행열차이다. 지난달 대련시를 출발해 장하, 단동, 통화, 백산, 연길을 거쳐 흑룡강성 목단강시까지 1380km에 이르는 고속열차가 개통되었다.
 답사단이 타는 열차는 대련에서 용정까지 달리는 완행열차이다. 지난달 대련시를 출발해 장하, 단동, 통화, 백산, 연길을 거쳐 흑룡강성 목단강시까지 1380km에 이르는 고속열차가 개통되었다.
ⓒ 겨레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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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열차가 우리에게 준 선물

백두산으로 가는 야간열차를 타는 건 매우 설레는 일이었다. 야간열차라고 해도 우리는 낮부터 서둘러야 했다. 오후 2시부터 달려 다음날 오전 8시에 이도백하에 도착하게 된다. 장장 18시간을 달려 대륙을 건너다니!

설레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긴 시간을 어떻게 보내나 싶었다. "아, 18시간을 어떻게 가냐", "땅이 얼마나 넓으면 18시간을 달리냐"며 열차에서 버틸 장비들을 챙겼다. 청년은 청년대로, 함께 간 선생님들은 선생님들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각 팀이 마실 만큼의 맥주와 안주거리들. 컵라면을 주섬주섬 담았다.

열차는 좁고 활동하기 불편한 덕분에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열차는 좁고 활동하기 불편한 덕분에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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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들을 가지고 열차에 올라탄 순간 아무도 말이 없었다. 생각보다 너무 좁고 답답한 내부였다. 침대에 몸은 뉘어지는지, 3층 침대에 올라갈 수 있기는 한 건지, 도대체 쉬는 곳은 어디있는건지…….이곳에서 어떻게 18시간을 보낼지 막막했다. 마땅한 공간을 찾지 못해 짐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는 동안 어느새 열차는 출발하고 있었다.

열차는 참 느리게 달렸다. 우리는 열차 속도를 두고 통일호와 비슷하다, 아니다 비둘기호와 비슷하다며 사라진 기차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을 한껏 살렸다. 느리게 달리는 열차는 여유와 낭만이 있었다. 시간의 틈이 생기니 서울에 두고 온 많은 일들, 그리고 빨리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느리게 달리는 기차덕분인지 고민들은 천천히 떠오르고 천천히 사라졌다.

기차의 독특한 구조 덕분에 자연스럽게 2~3인이 짝이 되어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중국에 와서 고민하게 된 '국경'이라는 주제, 그리고 항미원조기념관과 여순감옥에서 받은 정서적 충격들을 편하게 꺼내놓았다.

어느덧 여유가 생긴 열차생활
 어느덧 여유가 생긴 열차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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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에서 먹는 라면은 별미다.
 열차에서 먹는 라면은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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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가 우리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 '여유'라면 두 번째 선물은 '조선족', '동포'와의 만남이었다. 우리가 탄 열차에는 '동포'들이 많았다. 한 할아버지는 덥석 손을 잡더니 조선말로 대화하는 답사단이 반가웠는지 '조선민족이 장하다'고 말한다. 조선노래를 부르시기도 한다. 약주를 좀 하셨나보다.

다른 한 사람은 나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집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단동에 관광을 갔다가 연길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조선말을 잘하는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조선말을 쓰는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조선족일까, 북한사람일까'하는 호기심이 먼저 들었다. 그는 중국정부당국이 한족중심의 정책을 펴면서 소수민족들은 불안하다고 했다. 최근 조선족이 한국을 비롯하여 다른 나라들로 돈벌이를 하러 가면서 인구가 많이 줄어들어 위기감을 더 느낀다고 했다. 실제 중국은 한족이 92%로 대다수를 차지하며 소수민족은 8%에 불과하다. 조선족은 소수민족 가운데 13번째 규모이다.

현지가이드의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현지가이드는 화교로, 아버지는 중국인 어머니는 조선인이다. 어렸을 때는 북에 살다가 중국에 건너와 대학을 다니고 여행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친구들 역시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중국과 북, 어느 한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하고, 항상 차별받아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중국 국민인 동시에 조선민족인 조선족, 그들의 삶은 분단과 국경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중국 정부는 강력한 '동북 진흥책'을 추진하며 동북3성을 관통하는 고속철도 개통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속철은 하얼빈-대련까지 3시간 반 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중국 동북지역에는 한국 교민 3만 명과 1300여 개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으며 중국동포 7만여 명이 생활하고 있다.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빠른 속도로 교류하게 될 동북3성, 열차에서 느끼는 '여유'는 사라질 것이다. 대신 더 많은 사람들이 '동포'들의 삶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경험을 가질 수 있는 열차이기를 바란다.

민족의 명산, 백두산 그 거대함과 위대함

'장백산'역에 모두 모였다.
 '장백산'역에 모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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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사한 백두산 입구. 중국 정부는 '장백산' 국제관광지구를 지정하고 백두산행 고속도로를 공사하고 있으며 공항을 만들고 있다.
 최근 공사한 백두산 입구. 중국 정부는 '장백산' 국제관광지구를 지정하고 백두산행 고속도로를 공사하고 있으며 공항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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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50분, 백두산 아래 첫 마을 이도백하에 도착하였다.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정상까지는 우리가 대여한 관광버스를 타고 30분→대형셔틀버스를 타고 20분→봉고차를 타고 10분정도 달리면 만날 수 있다. 수십 대의 봉고차가 대기 중인 것을 보니 이 자체가 거대한 관광사업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실제로 백두산을 찾는 관광객은 크게 늘었다. 2008년 88만 명이었던 관광객은 2011년에 160만 명에 달했다. 중국은 1992년 백두산을 장백산이라고 명칭을 바꾸고 그 뒤부터 '중국 장백산'으로 부르고 있다.

백두산의 시작은 자작나무가 알린다. 달리는 차안에서는 찍을 수 없었지만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는 단연 돋보였다.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있는 자작나무숲길을 달리다보면 단풍나무들로 이루어진 산의 모양새가 드러난다. 그렇게 20분 정도 달리다보면 거대한 암벽이 진풍경을 이룬다. 산을 차로 달리는 경험도 색다르지만 하나의 산에서 다양한 모습을 만나는 것은 자연의 위대함을 더욱 크게 느끼게 한다.

이곳이 백두산 천지이다. 정말 날이 좋았다. 가이드는 겨레하나가 쌓은 덕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곳이 백두산 천지이다. 정말 날이 좋았다. 가이드는 겨레하나가 쌓은 덕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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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 백두산에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백두산은 하늘보다 넓게 느껴졌다. 수심 200m라는 백두산 천지는 하늘과 물의 경계를 흐려놓을 정도로 맑고 깊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백두산과 천지가 온전히 우리 것이 아닌 게 안타깝다' '북한으로 왔다면 어떤 감흥이었을까?' 하는 생각들이 반복해서 떠오를 뿐이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백두산과 천지를 두고 영토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백두산은 천지를 분할하여 북한이 54.5%, 중국이 45.5%를 가지고 있다. 1962년 체결한 조중변계조약(朝中邊界條約)이 그 근거이다. 북한이 돈을 받고 백두산을 팔았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리 타당해보이지는 않는다. 북한에게 백두산은 혁명의 성지이다. 김일성 주석이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벌인 전통이 있는 곳이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백두산의 제1봉우리 최고봉(2750m)을 장군봉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백두산을 명승지와 자연보호구로 지정해놓고, 백두산 곳곳에 항일투쟁지인 밀영을 복원해놓았다. 북한 청소년은 평양에서 백두산에 이르는 천리길 행군을 한다. 백두산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성지'인 것이다.

오히려 백두산은 오래전부터 영토논쟁이 있어왔다. 1712년 국경을 확실히 하자는 청의 제의에 의해 양국의 대표들이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지점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비문에는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다'라고 새겨져있는데 이 '토문'이 훗날 문제가 된다. '토문'을 어디로 규정하는가에 따라 간도지방의 귀속문제도 달라진다. 청은 토문을 두만강이라고 하며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고 하고, 조선은 토문은 쑹화강 상류로서 간도지방은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영토논쟁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린 것이 일본이다. 일본은 을사조약이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자신들이 직접 청과 간도협약을 맺는다. 간도협약은 1조에서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확정하고 청일 양국의 국경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일본은 이 대가로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었다.

19세기부터 한 세기 동안 논란을 이어온 백두산과 두만강 상류의 국경은 조중변계조약으로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이 조약이 비공개로 진행된 점, 중국의 동북공정, 간도지역의 영토문제 등으로 하여 한반도 통일과정이나 그 이후에 국경 분쟁의 불씨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중국이 백두산연구센터를 건립하고, '장백산'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는 투자와 공동행동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위대한 자연을 눈앞에 두고도 정치적이고 복잡한 생각을 하는 것이 우울했다. 아쉬운 마음에 백두산 천지를 몇 번이고 뒤돌아보고서야 발길을 돌릴 수 있었다.

장백폭포, 마치 용이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비룡폭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장백폭포, 마치 용이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비룡폭포'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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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봉고차를 타고 내려와 장백폭포를 들렀다. 말 그대로 웅장한 폭포였다. 60m가 넘는 길이의 폭포로 200m 떨어진 곳에서도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중국 북방의 폭포들은 겨울에 모두 얼지만, 오로지 장백폭포만은 일 년 내내 웅장하게 흐른다.

백두산과 천지, 그리고 장백폭포를 만난 우리들은 약 2박 3일간의 여정 속에 최절정의 기분에 휩싸이게 되었다. 백두산을 내려와 이도백하에서 5시간을 달려 연길에 도착했다.

연길에 있는 류경식당에서 만난 들쭉술과 북한동포들, 중국의 공장이나 식당 등에서 일하기 위해 중국을 찾은 북한 사람은 6만 명이 넘는다.
 연길에 있는 류경식당에서 만난 들쭉술과 북한동포들, 중국의 공장이나 식당 등에서 일하기 위해 중국을 찾은 북한 사람은 6만 명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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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길은 1909년 간도협약으로 개방되자 많은 조선인들이 이주하면서 개척해온 지역이다. 이곳에는 조선어 라디오 방송국과 신문사가 있으며, 조선인이 세운 연변대학교와 연변과학기술대학교가 있다. 연길은 중국속의 '조선'이라는 명칭이 무색하지 않은 곳이다.

익숙한 분위기에 취한 우리들은 북에 가볼 수 없는 아쉬움을 대신해 북한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하였다. 북측에서 파견 나온 종업원들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공연도 하고 서빙도 하는 식당의 손님은 대부분 중국인이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중국손님들의 입맛에 맞추느라 조금은 어색한 우리민족의 음식. 공연도 조선노래보다는 중국노래가 더 많았다. 공연 중인 종업원들과 사진 찍겠다며 달려 나오는 술 취한 중국손님도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중국 땅에서 만나는 북측의 모습이니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것인데, 북측 본래의 모습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남한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우리 땅에서 만난 남북이 아니라 각각 다른 목적으로 중국에 온 남과 북, 왠지 모를 어색함이 크게 다가왔다.

연길시내. 최근에 건설사업과 함께 조경 사업에 힘을 쓴다고 한다.
 연길시내. 최근에 건설사업과 함께 조경 사업에 힘을 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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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연길시내를 관통하는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높은 빌딩과 조경으로 화려한 연길은 조선족자치주 60주년을 새로운 발전을 기회로 삼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앞으로 중국의 동북3성 진흥정책, 북중접경지역의 경제협력, 남한과의 문화교류로 더 혼잡하거나 더 다양한 모습을 갖게 될 연길이 아닐까.

우연히 발견한 포장마차에서, 민족의 명산 백두산에 올라 한껏 부푼 여행자의 마음, 연길에서 만난 북한 동포와의 어색한 만남으로 무거워진 분단민족의 마음을 중국 맥주 한잔과 내려놓으며 밤을 지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겨레하나) 블로그(http://blog.krhana.org)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신미연 기자는 겨레하나 문화센터 휴의 활동가입니다.



태그:#중국열차, #백두산, #연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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