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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교사로서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5년이다. 앞으로 사서교사로 지내야 할 날들이 훨씬 많지만, 돌아보고 싶은 사건이 참 많다. 아마도 그것은 사서교사로 지내는 날들이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썩 편한 날만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끔은 집단적 도그마에 빠져 시달리는 경우도 생겼고, 어떤 날은 스스로 회의감과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 날이 있었다.

2년 전 친하게 지내던 동료교사가 나에게 다가와 "아이들이 책을 정말 싫어하지?"라고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던 터라 "네"하고 말았다. 성의 없는 대답 탓이었을까? 평소 하지 않던 질문을 한다.

"어떻게 하면 책을 읽힐 수 있을까? 아이들 아침 독서 시간에 책을 읽으라고 하면 숙제나 하고 있고, 답답하구먼. 과연 책 속에는 길이 있을까?"

잠시 일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름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나를 찾아와 진지하게 고민을 털어놓는 선생님 앞에서 내 앞의 일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속 시원하게 답변을 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도 원론적인 대답만 늘어놓았던 그날을 생각하면 남몰래 얼굴이 붉어진다. 지금이라고 잘 나가는 강사처럼 멋진 대답을 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이들은 책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책 읽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독서캠프를 통해 철학을 얻다

시인을 통해 빙고를 완성하는 일명 '시 빙고' 판이다. 시집에서 작가의 시를 찾아 공통의 이미지를 추출하여 그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시를 먼저 만드는 게임이다. 소요시간은 2시간 정도이다.
▲ 빙고! 시?! 시인을 통해 빙고를 완성하는 일명 '시 빙고' 판이다. 시집에서 작가의 시를 찾아 공통의 이미지를 추출하여 그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시를 먼저 만드는 게임이다. 소요시간은 2시간 정도이다.
ⓒ 황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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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내가 근무하던 학교(순천남산중학교, 교장 윤종식)에서 학생과 함께 독서캠프를 떠났다. '책과 예술이 어우러지는 생활 친화적 문화 놀이'라는 주제로 고흥 도화헌미술관에서 1박 2일 캠프로 진행되었다. 학생들과 함께 시를 읽기도 하고, 시들을 우리만의 시로 표현해 보기도 하였다.

또한, 자신의 시를 이미지화 하여 염색 체험을 해보기도 하고, 저녁시간에는 장철문 시인을 초청하여 시와 이미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특별히 이번 캠프는 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딱딱한 시들을 빙고게임을 통해 이해하는 시간을 아로새긴 아이의 소감문을 잠시 엿본다.

<상략>
1,2,3학년이 골고루 섞여 한 팀을 이뤘다. 엄청난 어색함이었다. 우리는 '시'를 통해 그 서먹서먹함을 깨고 하나가 되었다. 정호승, 도종환, 김용택 시인 등의 시들로 시빙고를 했다. 교과서를 통해 처음 접하고 열심히 주제와 심상들을 외웠던 시들. 하지만 독서캠프에서 우리는 그 시들을 마음대로 이해해 보았다. 문제집에 의존한 시해석이 아닌, 우리 감정에 맡긴 시해석.
<중략>
저녁에 진행된 발표. 다른 팀들이 모두 멋지게 시를 지어서 놀라웠다. 발표도 참 잘했다. 시를 써볼 기회도 별로 없었고, 발표를 억지로 시켜도 잘 안하려고 했던 우리였다. 그곳에 가서보니 우리들도 모두 시를 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따뚜이라는 영화에서 한 요리사가 "모두가 다 요리할 수 있다"라고 한 말도 떠오른다.
<하략> - 2학년 최미린 -

'시빙고'는 기존의 빙고게임과 달리 시간을 다투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성도 평가한다. 작품을 발표할 때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 하하하! 시가 이렇게 재밌었나? '시빙고'는 기존의 빙고게임과 달리 시간을 다투는 것뿐만 아니라 작품성도 평가한다. 작품을 발표할 때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 황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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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년 전으로 돌아간다. 그 선생님에게 아직 아이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고,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책 속에는 분명히 길이 있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모든 물이 밑으로 쏟아지지만 콩나물은 자란다. 마치 독서가 그러하다. 책을 뽑아서 읽고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두면 변한 것이 하나도 없지만, 시나브로 아이들은 자라는 것이 독서인 것이다.

다만, 우리 세대의 방식과 가치관으로 아이들에게 같은 형태의 틀을 주입하고자 하지 않았는지? 독서교육만큼은 아이들의 생각과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았는지? 최소한 독서를 싫어하고, 숙제로 치부하는 아이들만이라도 즐거운 방식의 독서교육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서캠프 소감문을 살펴보면 시를 써볼 기회도 없었고, 자유롭게 발표할 기회도 없었다고 한다. 모두가 다 요리를 할 수 있다는 학생의 인용구에 새삼 깨닫는다. 요리는 재료가 필요하구나. 교사는 재료를 준비해줘야 하는구나. 그리고 더 나아간다면 레시피를 제공해주고, 새로운 레시피를 학생 스스로 만들 수 있게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 또한 마찬가지다.

이제야 독서교육의 철학적 기초를 세운다. 독서는 강제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는 인생 길의 향기를 맡는 것이다.

자그마한 학교 도서관에서 독서 교육을 한다는 것이 철학을 세우고 사명과 비전을 수립해야 하는 거대 담론은 아니지만, 철학적 기초 없이는 모래 위의 성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태그:#독서, #시, #황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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