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방송된 SBS <신사의 품격>의 한 장면

지난 14일 방송된 SBS <신사의 품격>의 한 장면 ⓒ SBS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난봉꾼 위에 '마녀' 있다. 룸살롱에서 통 크게 놀고, '김밥천당'이라는 상호로 200만원의 카드 전표를 끊은 남편 이정록(이종혁 분)에게 "천당 가고 싶냐"고 나직이 묻는 <신사의 품격> 박민숙(김정난 분) 앞에서 통하는 거짓말은 별로 없다.

청담동 일대 건물을 '스트리트'째 갖고 있는 민숙은 정록의 주변에 늘 스파이를 심어놓고, 자신이 소유한 건물에 세 들어 있는 남편 친구들을 협박하는 등 남편의 바람기를 잡기 위해 시간과 돈을 쓴다. 그녀는 악명 높은 '청담마녀'다. 

까칠하고 차가운 데다가, 44세.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서 러브라인의 한 축을 담당하기에는 나이가 좀 지긋하다. 거기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의부증 말기인 민숙은 악역의 미덕을 고루 갖춘 캐릭터다.

그런 청담마녀가 어느새 <신사의 품격> 최고의 매력녀로 올라섰다. 아마도 남편 길들이기에 썼던 무기를 남을 위해 사용하면서부터다. 이를테면, 돈 없어 당한 설움을 대신 갚아주는 식이다. "돈 있는 사람은 진심이 아니라 돈으로 상대한다"는 해법은 어쭙잖은 위로보다 확실히 효과적이다. 사실상 돈이 최고의 권력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박민숙은 그렇게 새로운 영웅으로 변모했다.

'신사'들 속 '숙녀의 품격' 보여주는 박민숙

언젠가 민숙은 서이수(김하늘 분)의 제자 동협이 부잣집 아들을 때리고 그 학부모로부터 고소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대신 나서 해결했다. 그리고 동협의 뺨을 때린 것에 대한 사과도 받아냈다. 선생님 앞에서도 꼿꼿하던 학부모를 조아리게 만든 힘의 근원은 물론 돈이다. 하지만 돈 있는 자가 횡포를 부리는 속물근성은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될 때 다르게 읽힌다.

제 잘난 맛에 사는 강남 꽃신사 4인방이 극을 이끌어 가는 이 드라마에서 민숙은 그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정록이 이혼 당하는 순간, 민숙의 스트리트에서 쫓겨나야 하는 연좌제의 덫에 걸린 나머지 세 사람은 건물주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세입자일 뿐이다. 완벽한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의 기쁨을 그리곤 하는 로맨틱 드라마에서 민숙의 카리스마는 여주인공이 성취하지 못하는 부분을 대신하며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 힘의 근원 역시 돈이다.

가끔은 툭툭 쏘아대는 가시 돋친 말 안에는 부자만이 아닌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도 깃들어 있다. 사랑하는 남자 도진(장동건 분)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헤어졌던 서이수가 다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데에는 "얼굴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써있다"는 민숙의 직언이 있었다. 죄책감에 망설이는 도진에게는 "남자가 '사랑해'라고 말했으면 죽어도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이 '미안해'다. 남자들은 그 쉬운 걸 잘 모른다"고 한 수 가르쳤다

 SBS <신사의 품격> 박민숙 역의 김정난

SBS <신사의 품격> 박민숙 역의 김정난 ⓒ SBS


그런데 이 마녀의 매력은 또 완전히 다른 곳에서도 발산됐다. 극 초반에는 웃음코드로 사용됐던 의부증이 점점 빈틈없던 민숙에게 큰 구멍으로 나타난 것. 남편의 수상한 낌새를 발견할 때마다 이혼서류를 꺼내 들었던 그의 패기는 돈이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살 수 없다는 좌절, 외로움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결국 남편의 아무 것도 믿을 수 없게 된 민숙이 "차라리 이혼해달라"며 눈물을 흘렸을 때, 지금까지의 꼿꼿함은 그 순간 무너지기 위해 존재해온 것 같았다. 끄떡없을 것 같던 마녀의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며 느끼게 되는 연민은 더 큰 법이다. 그저 돈 많고 의심 많은 여자였던 민숙이 빗장을 풀면서 그간의 고약한 행동은 설득력을 얻었고, 청담마녀는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신사의 품격>이 역설적으로 신사가 아닌 사람들이 신사가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드라마인 것처럼, 민숙은 가장 큰 폭으로 변화하며 '숙녀의 품격'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다. 사람들의 욕망이 결집된 돈과 사랑을 누구보다 솔직하게 표현했기에 로맨틱 코미디에서 두 남녀 주인공의 곁가지가 아닌, 그 자체로 사랑받을 수 있었다.

"내가 만난 여자 중에 제일 키 작고, 제일 성격 안 좋고, 제일 나이 많고, 제일 애교 없는 그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진짜 중독성 있다"는 정록의 대사는 빈말이 아닐 것이다. 결과적으로 40대 배우 김정난은 20대 핫한 여배우는 소화할 수 없는 캐릭터를 만났고, 청담마녀는 제 옷처럼 입어줄 탁월한 배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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