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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역사길이 내게로 왔다>는 송갑석의 무진기행- 역사길 답사기다. 그가 무등산 역사길 답사길에서 정자에 얽힌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
 <무등산 역사길이 내게로 왔다>는 송갑석의 무진기행- 역사길 답사기다. 그가 무등산 역사길 답사길에서 정자에 얽힌 역사를 설명해주고 있다.
ⓒ 송갑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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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출판계 은어 중에 '철새 저서'라는 것이 있다. 선거철을 앞두고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치인들의 저서를 일컫는 말이다.

'철새 저서'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우선 책 표지는 저자의 얼굴 사진으로 큼지막하게 도배질한다. 저자는 당연히 선거에 출마할 예비후보자다. 양 손가락을 끼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어딘가를 바라보는 획일화된 포즈는 '철새 저서'의 목적이 '홍보용'임을 분명히 한다.

또 '철새 저서'들은 저자만 다를 뿐 책 내용은 엇비슷같다는 공통점이 있다. 자서전 형식을 띤 책에서는 누구나 겪었을 법한 가난과 방황, 시대의 아픔을 저 혼자 다 지고 산양 너스레를 떤다. 이른바 '정책자료집' 형태를 띤 책들은 인터넷에서 굴러다니는 온갖 자료들을 짜깁기해 놓고선 마치 자신이 오래전부터 이 분야의 전문능력을 배양해온 사람처럼 거들먹거린다.

그나마 이 정도는 성의가 있는 편이다. '복사'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하게 표절을 한 책도 있다. 관련 법조문과 성명서 등을 '관련 자료'라며 뭉치로 펼쳐놓고 페이지 수를 채운 책도 부지기수다.

이마저도 저자로 이름을 박은 이가 직접 하면 좋을 텐데 태반은 대필이다. 기성 작가는 물론 비서진 등 다양한 이들이 대필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어떤 선거기획사는 저서 대필, 여론조사, 정책개발 등을 한 묶음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이렇게 황망하게 탄생한 '철새 저서'지만 출판기념회만큼은 성대하게 치른다. 출판기념회는 선거를 앞두고 세 과시도 하고 돈도 모을 수 있는 '환상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정치자금법에 의해 철저히 돈줄을 제약받고 감시받는다. 그러나 출판기념회는 정치자금법 제한을 받지 않는다. 금액 한도, 모금 액수, 기념회 횟수 아무 제약이 없다. 발간한 책의 정가가 1만5천원인 책을 출판기념회를 찾은 이가 1권에 150만 원을 주고 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가에서는 선거법상 정치인 출판기념회 시한이었던 지난 11일까지 전국에서 최소한 약 1000건 이상의 출판기념회가 열린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수치는 총선 예비후보등록자 1200명과 현역 국회의원 299명을 합산해서 추산한 것이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현역 의원 중 90% 이상은 이미 출판기념회를 마쳤으며 서울과 자기 지역구 등에서 두 차례 이상 출판기념회를 연 이도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수익금이 적은 정치인은 약 4천만 원, 많은 정치인은 1억 원이 넘는 출판 수익을 얻었을 것"이라며 "선거 치를 '실탄'을 두둑하게 마련한 것"이라고 전했다.

속 보이는 '철새 저서'와 목적 뚜렷한 '출판기념회'의 홍수 속에서 눈길 가는 책이 있다. 전대협 의장 출신으로 5년 2개월 감옥살이를 했던 송갑석의 <무등산 역사길이 내게로 왔다>가 그것이다. 

물론 그 역시 총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펴낸 책에서는 '철새 저서'의 냄새보다는 진한 땀 냄새와 흙냄새가 먼저 풍긴다. 아마도 이 책이 그가 오롯이 두 발로 걸으며 답사한 '조선선비의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약 6km에 이르는 무등산 '역사길'은 '무등산 옛길' 3구간의 후반부다. 송갑석은 자신이 만든 사단법인 광주학교를 통해 '무진기행-무등산 역사길'이라는 프로그램을 꾸렸다. 이 책은 무등산 역사길의 답사기다. 우연치고는 심상치 않은 것은 무등산 '역사길'의 시작과 끝이다. 이 길은 충장사에서 시작해 취가정에서 끝난다. 시작도 '의병장 김덕령'이고, 끝도 '의병장 김덕령'이다.

조선의 선비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맞섰던 김덕령. 청년학생으로서 민주화를 위해 긴 징역살이를 마다 않은 송갑석. 하지만 조선의 왕은 김덕령을 죽였고, 대한민국 현대사는 송갑석을 긴 시련의 세월에 묶었다.

어쩌면 송갑석은 죽음으로 끝나버린 조선 선비의 길에서 모진 시련의 세월 견뎌낼 '희망의 근거'를 찾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조선 선비의 '소신'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무등산 '역사길'이 내게로 왔다. 걸으면서 길에 스몄다. 오래 걸었고, 나는 길 위에서 '소신'을 읽었다. 소신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들의 서늘한 징표다. 조선 500년의 숨결이 모두 소신 안에서 나왔고, 소신 밖에서 죽었다. 소신을 목숨처럼 여기던 선비들이 사라진 순간, 조선은 500년 숨결을 멈췄다....중략....

사람의 숨결을 열리게 하는 것은 재물이나 권세가 아니라 오직 사람의 가치를 담은 소신이다. 제가 있어야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알게 해주는 것도 소신이다. 소신은 나를 살리고, 우리를 살리는 유일한 비책이며 전법이다." (<무등산 역사길이 내게로 왔다>)

'변화'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이 흥청대는 시절. 우리에게 소신은 무엇일까? 송갑석은 "모든 이들이 어느 때고 한 번은 무등산 역사길을 걸어볼 것"을 권한다. 아마도 저마다의 소신이 모여 만들 우리의 미래를 성찰해보자는 얘기일 것이다.

책 표지에 그의 얼굴 사진이 없어도 이 책을 통해 그가 어떤 생을 살고자 하는지 헤아릴 수 있다. 수천 명을 모아놓고 출판기념회를 그럴싸하게 하지 않아도 행간에 놓인 성찰의 풍성함은 익히 느낄 수 있다. 무릇 책이란 그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태그:#출판기념회, #총선, #송갑석, #무등산 옛길,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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