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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드림을 품고 한국에 왔다가 주검으로 스러진 외국인노동자를 김해성 목사 등이 수습하고 있다.
 코리안드림을 품고 한국에 왔다가 주검으로 스러진 외국인노동자를 김해성 목사 등이 수습하고 있다.
ⓒ 지구촌사랑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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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사각지대에서 죽어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살리기 위해 지난 2004년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현재 이주민의료센터)이 세워졌다. 그리고 7년이 지났다. 무료병원 7년, 짧지 않은 세월 동안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한 사투가 벌어졌고, 병원 운영난에 병실이 폐쇄된 적도 있었다. 숨진 이방인들의 주검들을 수습해야 했고, 오갈 데 없는 유해들은 '안식의 집'에 안치해야 했다. 병든 환자들은 무너진 꿈 '코리안드림'에 절망해야 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잿더미에서도 재건의 아침은 밝아온다. 황폐한 광야에서도 들꽃은 피어난다. 잿더미와 광야에서도 그랬듯이 눈물과 아픔의 도가니인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에서도 희망의 꽃은 피어났다. 그 꽃은 유채꽃처럼 화사하게 피지 못했고, 우북수북하게 피어나진 않았지만 외롭게 핀 들꽃처럼 다소곳이 피었기에 더 소중하다. 절망에서 핀 희망의 꽃, 고통에서 핀 감사의 꽃, 두려움에서 핀 좋은 꽃…. 그렇게 어렵사리 핀 꽃들이 만든 아름다운 풍경을 혼자 보긴 아깝다.

[풍경 ①] 무너진 '코리안 드림'... 하지만 희망을 봤습니다

한국인에게 차별과 왕따를 경험했던 자나닐라 가족. 한국을 미워했던 이들 가족이 좋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은혜의 땅으로 여기게 됐다.
 한국인에게 차별과 왕따를 경험했던 자나닐라 가족. 한국을 미워했던 이들 가족이 좋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은혜의 땅으로 여기게 됐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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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한국은 희망의 땅이자 은혜의 땅입니다!"

한국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스리랑카 여성 자나닐라(37·가명). 고운 말씨와 수줍은 모습에선 조선 여성의 자태마저 풍긴다. 눈빛 반짝이는 그에게 '곱다'고 했더니, 그 말을 단번에 알아들을 정도로 한국어 실력이 출중하다. 이해력은 물론 구사력까지 갖췄다. 고운 웃음을 흘리는 그가 한국 여성과 다른 점이 있다면 검은 피부가 전부일 것이다.

그는 대학생이던 1997년, 스물넷의 나이에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13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같은 나라 출신 이주노동자 스루랄(35·가명)을 만나 결혼했고, 두 아이도 한국에서 낳았다. 꽃다운 청춘을 보낸 한국은 그에게 타국이 아니라 인생 2막을 준비하는 희망의 땅이다. 물론 그 희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불안하고 두려운 터널을 헤쳐 나가야 한다. 이들 부부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다.

그의 한국 생활은 바쁘다. 큰딸 미놀(6)이와 작은아들 새놀(4)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뒤 설거지와 집안청소를 서두른다. 신학생인 그는 집안일이 마무리되면 신학대학에 공부하러 간다. 지방에서 일하는 남편은 일 주일에 한 번, 토요일 오후에 집에 온다. 때문에 자나닐라와 아이들은 주말을 손꼽아 기다린다.

'코리안드림'을 품고 한국에 온 자나닐라. 그 또한 다른 이주노동자들처럼 차별과 냉대를 당했다. 자신만 당했으면 억울하지도 않았겠지만 자녀들까지도 그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대를 이어 당한 차별에 속이 상해 울기도 했지만 참고 견뎌야 했다. 고향에 돈을 부치지 못하면 가난한 친정 어머니는 살길이 막막해지기 때문이다. 참아야 하는 아픔,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한국에 대한 미움이 자랐지만, 다행하게도 좋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미움은 시들고 대신 사랑이 싹텄다.

자나닐라 가족에게 '이주민의료센터'는 피난처와 같다. 아이들이 아프면 데려가 무료진료를 받고 환절기가 되면 백신 예방주사를 놔준다. 그의 세심한 돌봄 때문인지 아이들은 기관지 질환 외에는 큰 병을 앓지 않았다. 무료진료 도움뿐이 아니다. 두 아이들은 이주민 자녀를 위해 설립된 '지구촌어린이집'을 무료로 다닌다. 왕따 걱정과 학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학령기가 되면 '지구촌국제학교'에 입학시킬 예정이다. 이주민 자녀를 위해 세운 이 학교 또한 전액 무료다.

자나닐라 가족에게 이주민의료센터를 운영하는 (사)지구촌사랑나눔(대표 김해성 목사)은 희망의 원천이다. 무료진료와 자녀교육은 물론 자신의 꿈까지 돌봐준다. 목회자를 꿈꾸는 그는 2년 정도 신학공부를 더한 뒤에 고국으로 돌아가 선교사로 봉사할 계획이다. '코리안드림'을 통해 번 돈으로 고향에 돌아가 잘 살고 싶었던 그가 인생의 방향을 바꾼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서 '나눔의 힘'을 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에서 도움을 받고, 배운 후원의 힘을 스리랑카에 돌아가면 알리고, 그 씨앗를 뿌리고 싶다고 말하는 자나닐라.

"한국은 처음에 살기 어려운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희망의 땅이 됐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화도 잘 내지만 정도 많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무료병원에 다니면서 한국의 힘을 봤습니다. 자신과 전혀 상관 없는데도 알게 모르게 돕는 수많은 후원자의 힘으로 병원이 운영되고, 아이들이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도 스리랑카로 돌아가면 후원의 힘과 사랑의 힘을 전하고 싶습니다."

[풍경 ②] 돈 벌러 온 한국에서 아들 잃을 뻔했습니다

이주민의료센터 1층에 있는 무료급식소. 이 급식소에서는 이주민 환자, 쉼터 거주자, 인근 이주민 등 하루에 300~400명이 이용한다.
 이주민의료센터 1층에 있는 무료급식소. 이 급식소에서는 이주민 환자, 쉼터 거주자, 인근 이주민 등 하루에 300~400명이 이용한다.
ⓒ 지구촌사랑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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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포 유복희(61)씨는 수완 좋은 사업가다. 중국 목단강이 고향인 그는 한중 국교수립보다 앞선 1990년대 초반에 한국에 진출했다. 빈손이었지만 돈이 보였고, 자신감도 넘쳤다. 초창기엔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보따리 상인으로 부지런히 뛰었고, 차츰 돈이 모이면서 농산물유통업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제조공장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는 큰아들의 이름을 딴 '성권상사'를 평택과 천안에서 각각 운영하고 있다. 천안 중앙시장에 있는 '성권상사'는 큰아들 홍성권(41)씨가 운영하고, 평택항에 위치한 '성권상사'는 유씨와 작은아들 홍성관(38)씨가 함께 운영한다. 이와 함께 종업원 4명을 두고 제분공장까지 운영하고 있다. 아르바이트 일꾼을 써야 할 정도로 성업 중인 유씨의 사업은 연간 매출액이 15억 원에 다다른다.

중국동포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유복희씨. 아들을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 무료급식소에 식자재 도움을 종종 주고 있다.
 중국동포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변신한 유복희씨. 아들을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 무료급식소에 식자재 도움을 종종 주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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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씨의 사업은 올해 들어 더 대박을 터트렸다. 유씨는 "중국에서 고추를 왕창 사다가 제분해 놨는데, 한국의 고추농사가 흉작을 맞으면서 대박이 터졌다"며 "고춧가루 주문량이 얼마나 밀려드는지 올 추석엔 쉬지도 못하고 물량 대기에 바빴다"고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유씨는 16년 전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두 아들도 잇따라 한국 사람이 됐다. 여장부인 어머니 덕분에 유통 사업에 뛰어들면서 성공을 맛보고 있는 두 아들은 결혼도 했고 손주도 낳았다. 사업은 탄탄하고, 아들들도 살 만하니 유씨는 남부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었다. 유씨는 "잘 살게 됐다고 해서 '이주민의료센터'의 은혜를 잊는다면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몇 번을 강조했다.

그의 인생에 최대 위기가 닥친 때는 2001년이었다. 작은아들 성관씨가 B형 간염을 앓았다. 일도 바쁘고 대수로운 병도 아닌 것 같아서 보건소에서 치료하고 말았는데 그게 위기의 원인이 됐다. 아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헤매고 다닌 세월이 무려 4년이었다. 긴 병으로 돈은 돈대로 까먹으면서 형편이 어려워진 유씨 모자에게 이주민의료센터(당시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는 생명의 등불이 됐다.

"아들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4년 동안 병원을 전전긍긍하면서 엄청난 돈을 썼지만 치료는 허사였습니다. 혈기 왕성한 아들이 핏기도, 기운도 없이 누워 있는 것을 보면서 '내 아들이 이렇게 죽어가는구나!'하는 두려움이 밀려들었고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돈 벌러 한국에 왔다가 아들을 잃는구나!'하는 죄책감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주민의료센터에 입원한 지 한 달 반 만에 아들의 병이 완치됐는데,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병원비를 한 푼도 받지 않았습니다."

유씨는 올해로 6년째 (사)지구촌사랑나눔 무료급식소를 찾아간다. 유씨가 한 보따리 챙겨온 참기름과 고춧가루, 잡곡 등의 식재료는 병원 환자와 쉼터 이주민들에게 제공된다. 그의 발걸음은 이곳뿐만 아니라 평택 농촌의 독거노인들에게도 이어진다. 완치된 작은아들은 그 이후 병이 재발하거나 아파서 병원에 간 적이 없으며, 어머니 일을 성실하게 돕고 있다고 근황을 전했다. 유씨는 말을 이었다.

"아들을 잃었다면 오늘의 성공도 없었을 겁니다. 설사 성공했다고 해도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지금은 자식들도 건강하고, 사업도 번창하니 더 바랄게 없습니다. 죽으면 돈을 싸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남은 인생 동안 나누며 살려고 합니다. 일손을 놓게 되면 무료급식소에 가서 봉사도 하면서 쉼터에 눌러 앉은 동포들에게 자립심을 심어주고 싶습니다."

[풍경 ③] 너무 비싸 근처에도 못간 한국 병원, 하지만...

신학생 남편을 만나러 왔다가 갑작스런 병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이주민의료센터의 도움을 받게 된 외국인 부부.
 신학생 남편을 만나러 왔다가 갑작스런 병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이주민의료센터의 도움을 받게 된 외국인 부부.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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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0일 라홈(36·이디오피아)이 아내 라헬(33·스위스)을 데리고 이주민의료센터를 찾았다. 라헬은 장로회신학대학교에서 박사과정 중인 남편 라홈을 만나기 위해 한 달 체류 일정으로 한국에 왔다가 9월 중순의 쌀쌀한 날씨와 급격한 일교차를 맞닥뜨리면서 갑상선 이상증세를 보였다. 밤새 통증에 시달리던 라헬은 거주지 인근 병원 응급실을 급히 찾았지만 비싼 병원비 때문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유학생 라홈에게 이주민의료센터는 말 그대로 피난처다. 가난한 신학생 처지에다 의료보험조차 없기 때문에 몸이 아프면 큰 걱정이었다. 그런데 이주민은 물론 외국인까지 무료로 치료해주는 이주민의료센터를 알게 되면서 시름을 덜게 됐다. 이주민의료센터를 주로 찾는 이들은 가난한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족들이지만 라홈 부부처럼 한국의 의료기관을 이용하기 어려운 가난한 외국인들도 종종 찾아와 도움을 받는다.

라헬은 교회 무료진료소와 병원 응급실을 거쳐 이주민의료센터에 왔다. 무료진료소는 의료장비가 부족했고, 병원 응급실 문턱은 너무 높았다. 이주민의료센터 의료진들은 초음파 검사를 비롯한 각종 검사와 진료 및 처방을 통해 라헬의 어려움을 해결해줬다. 걱정스런 표정으로 이곳에 도착했던 이들 부부는 전액 무료진료와 친절한 도움을 받은 뒤 웃음 짓기 시작했다.

신학생 라홈은 "의료보험이 없는 가난한 외국인들은 몸이 아파도 병원에 가기 힘들다"며 "이주민과 다문화가족뿐 아니라 저 같은 외국인들에게도 무료진료해 주는 병원이 있어서 너무 다행이고 고맙다"고 말했다. 그의 아내 라헬은 "낯선 외국에서 몸이 아프게 돼 걱정이었는데 무료진료에다 친절한 도움까지 받게 돼 너무 감사하다"면서 "한국을 친절하고 고마운 나라로 기억할 것 같다"면서 환한 웃음을 지었다.

덧붙이는 글 | 이주민의료센터는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 1동 137-22번지 2층에 있습니다.



태그:#외국인노동자, #이주민의료센터, #외국인노동자전용의원, #김해성, #가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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