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콩 무협스타 홍금보의 바가지머리를 고수하고 있는 승철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순박하고 고지식한 청년이다. 아니, 법의 보호를 받아야만 살아남을 것 같은 착해빠진 순둥이다.

공사로 난장판이 된 도로변에 열심히 포스터와 플래카드를 붙여보지만 자기 구역을 지키려는 토박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쫓겨 다니기 일쑤다. 사장에게 온갖 멸시를 받아도 자신을 승합차 밖으로 걷어차려는 그 발을 붙들고 애원한다.

"잘할 수 있습니다!"

어렵사리 소개를 받아 면접을 보러 간 봉제공장에서 냉정하게 거절당할 때도 승철은 자신이 마신 찻잔을 설거지하며 같은 대사를 되뇐다.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붙인 포스터를 들여다보는 승철

자신이 붙인 포스터를 들여다보는 승철 ⓒ 영화사 진진


비정성시(非情城市) 서울

승철은 살인자다. 게다가 그는 이 땅에서 전과자만큼이나 경원시되는 탈북자이기도 하다. 현대판 '불촉천민'인 셈이다. 함경남도 무산 출신인 승철은 오랜 굶주림 끝에 옥수수 한 자루를 놓고 다투다 친구를 때려눕히고 만다.

이튿날 다시 가보니 친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친구는 그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결국 승철은 국경을 넘었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자유 대한'이 그에게 낙인처럼 부여한 건 '125'로 시작되는(여자는 '225'로 시작된다) 주민등록번호였다. 탈북자들의 정착교육을 담당하는 하나원의 소재지인 경기도 안성의 지역코드가 그 숫자이기 때문이다. 승철이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는 이유이기도 하다.

승철이 몸을 의탁하고 있는 곳은 유일한 친구인 경철의 작은 집 문간방이다. 집뿐만 아니라 입고 있는 옷가지도 모두 경철의 것이다. 승철의 유일한 낙은 일요일마다 경철의 재킷과 바지를 빌려 입고 언덕배기 교회에 가는 것이다.

투명인간처럼 눈에 띄지 않는 승철은 그곳에서 청순한 성가대원 숙영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러나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뿐 말 한마디 건네지도 못한다. 그런 승철이 우연히 거두게 된 떠돌이 개 백구는 뿌리를 잃고 낯선 땅에서 부유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욱 살갑다.

집주인 경철은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생존논리를 온몸으로 습득한 영리한 친구다. 내가 죽지 않으려면 남을 짓밟고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로 무장한 그는 다른 탈북자들이 시급 몇 천원에 배달과 노가다를 뛰어서 모은 고단한 돈을 등쳐먹고 산다. 등쳐먹는 경철이나 피 같은 돈을 떼인 친구들이나 이 사회의 변두리를 떠돌긴 마찬가지다.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금호동 재개발 단지의 폐허만큼이나 황량한 삶을 이어간다.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는 승철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는 승철 ⓒ 영화사 진진


불의(不義)한 것들의 불편함

2010년 부산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 이후 로테르담 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영화제의 찬사를 받은 독립영화 <무산일기>는 충격적인 영화다. 세렝게티 초원에 카메라를 들이댄 자연 다큐멘터리처럼 탈북자들의 낯선 세계를 선연하게 그리고 있다.

체제의 우월성을 입증해주는 귀순용사라며 귀한 대접을 받고 번듯한 직업과 그럴 듯한 배우자까지 제공받던 시절은 이미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버렸다. 꿈을 찾아 목숨을 걸고 내려왔건만, 무방비 상태의 그들에게 그곳은 꿈의 나라가 아니라 맹수들이 활보하는 정글 같은 곳이었다. 언젠가부터 '뜨거운 감자'로 전락한 탈북자들의 막막하고 팍팍한 일상이 영화 속에서 재현되고 있다.

<무산일기>는 불편한 영화다. 세상의 모든 불의한 광경이 그렇듯, 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힘겨울 뿐더러 다 보고 나서도 한참 동안은 우울해진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 노래하고 북한의 열악한 인권실태를 개탄하면서도 그런 '지옥'을 빠져 나온 난민들에 대해서는 "자본주의란 원래 그런 거야"라는 냉정한 한마디로 외면하는 나와 우리 사회의 비정함이 소름끼친다.

함께 국경을 넘은 동료들의 돈을 등쳐먹은 친구 경철로부터 집에 몰래 숨겨놓은 돈을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은 승철이 경철을 만나기로 한 버스정류장을 앞두고 버스 좌석 속으로 몸을 낮춰 숨는 순간, 엇갈리는 두 가지 감정이 떠오른다.

'아, 이제는 저 친구도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드는 한편, 그토록 순박한 청년이 하나뿐인 친구를 배신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압도적인 힘이 두려워진다.

이 땅에서의 새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한 직후, 아스팔트 위에 널브러진 백구의 주검을 뒤로 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일터로 걸어가는 승철의 비정한 실루엣이 영화를 보는 이의 가슴팍에 비수를 던진다.

너는 그와 다르냐며.
 <무산일기> 포스터. 승철이 친구 경철을 배신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무산일기> 포스터. 승철이 친구 경철을 배신하는 순간을 담고 있다. ⓒ 영화사 진진


덧붙이는 글 앰네스티 소식지 <앰네스티인> 2011. 003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무산일기 탈북자 박정범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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