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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5일) 오후 서울 시내 곳곳과 전국 일부 지역에서 갑작스러운 정전사태가 발생했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났을 무렵 뉴스를 통하여 서울 종로와 영등포, 강남, 서초와 일부 지역과 인천 등 수도권 일대 및 전국 곳곳에서 정전이 발생했다는 속보를 접하였으나, 그 시각에 강동구 천호동에 있었던 기자는 정전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무심하게 뉴스를 흘려 듣고 있었다. 그러나 오후 5시 직전 천호동에서도 대규모 정전이 일어났다. 정전은 약 40~50분 가까이 지속되었다. 

 

늦은 점심을 저녁식사와 겸하여 일찌감치 먹고 식당을 나선 기자는 가게 밖 사거리가 시끄러운 것을 볼 수 있었다. 신호등이 꺼져 경찰이 직접 사거리 복판에 서 교통의 흐름을 지도하고 있었다. 맞은편 커피숍과 김밥집에서는 전기가 나가자 손님도 못 받아 당혹해 하며 거리로 나와 있었다. 그옆 오피스텔도 전기가 나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피스텔 옆 건물 1층의 미용실과 일본식 돈까스집에서는 멀쩡하게 영업을 할 수가 있었다.

 

아파트 단지내 자동현금입출금기도 멈추어 사용을 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통장정리를 하고 출금을 할 예정이었지만 포기해야 했다. 맞은편 약국과 슈퍼마켓에서도 직원들이 밖으로 나와서 정전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었다. 오늘은 9월 중순 치고는 이례적인 폭염주의보가 곳곳에 내려진 무더운 날씨였던 데다 외출을 하고 돌아온 탓인지, 실내에 들어서자 몹시 더웠지만 선풍기 바람조차 쐴 수가 없어 아쉬워하며 참았다.

 

휴대폰으로 소방방재청에서 엘리베이터와 전기 사용을 자제해달라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잠시 세수를 하고 조용히 앉아 있으려니 다시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했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지식경제부와 한국전력의 말을 인용하며, 늦더위로 인하여 전기 사용량이 급격히 늘어서 정전이 발생했다고 했다. 전기 수요가 많을 철이 아니라서 수요량을 낮게 예측하고 발전소를 상당수 가동하지 않았다는 부연 설명이 뒤따랐다. 그리고 현재 지역별로 순환 정전을 실시하고 있으며 늦어도 8시까지는 전기 공급이 재개될 것이라고 했다.   

 

전기가 돌아오기까지 어둠과 더위 속에 있으면서 문득 짧은 생각이 스쳐갔다. 많은 시민이 일시에 정전을 경험하면서 병원에서도, 영업하는 가게와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학교와 학원 등 곳곳에서 큰 불편함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장시간의 정전을 각오했는데 약 1시간씩만 실시하는 순환정전이라 그런지, 생각보다는 금새 전기 공급이 재개되었다.

 

갑자기 찾아온 어둠 속에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사람들보다 언론에서는, 정부 관련부처와 전력회사, 그리고 정재계와 학계의 핵산업 마피아들이 어떻게 나올까 하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일본에서는 3.11 후쿠시마 사태 이후, 연일 언론에서 전기 공급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를 보도하고 절전을 부르짖었다. 계획 정전을 실시하겠다는 정부의 발표도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전기를 과다하게 사용하던 도시인들은 전기가 부족할까봐, 갑자기 어둠 속에 갇힐까봐, 전기 부족론과 절전의 목소리에 위축되었다. 핵 사고를 당하고도 핵산업을 지속할 수 없을까봐 그동안 '원자력=전기, 에너지 대안'이라고 선전해 온 것을 그래도 이용하여 전기 위기론으로 공포를 조성한 것이다. 그러나 올 여름 일본에서는 전기가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아 돌았다.

 

언론의 보도에서 전력 공급과 수요, 전기 문제에 대해서 다루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전기 부족 위기를 이야기할 뿐 위험한 핵발전을 계속하면서 전기를 이렇게 대량 낭비해야 하는가, 핵발전을 멈추면 전기 파동이 일어나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지 아닌지의 진위 여부 검증 보도는 없었다는 점이다.

 

지난 8일, 도쿄 신주쿠의 일본청년관에서는 '사요나라 원전(さようなら原発)' 강연회가 개최되었다. 6월부터 탈원전 천만명 서명운동과 9.19 도쿄 5만명 탈원전 집회를 전개한다고 공표하며 활동해온 '탈원전 천만인 행동 실행위원회'가 주최한 행사였다. 평일이었는데도 약 1300명의 사람들이 운집했다고 한다.

 

"핵발전 멈추면 전기 파동? 거짓말에 속지 맙시다"

 

이날 강연회에 연사로 나선 경제평론가 우치하시 카츠토(内橋克人) 씨는 핵발전소를 멈추고 탈원전하면 전력이 부족하다, 당장 에너지 위기와 경제 위기가 닥친다고 하는 주장들이 있다면서, 강력하게 비판했다.

 

"전력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전력은 남아돌고 있습니다. 올 여름 정전이 있었습니까? 9월 도쿄전력의 전력공급력이 5510만 킬로와트라고 하는데 그에 대한 수요는 4080만 킬로와트입니다. 1500만 킬로와트 가까이 전력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일본의 전체 원자력발전소 54기 중에서 11기만이 가동 중입니다. 그밖의 원전은 정기검사에 들어가서 멈추어 있습니다. 운전 중인 원전을 전부 정지시켜도 수요와 공급이 딱 맞습니다. 거짓말과 속임수에 쉽게 휩쓸려온 일본인과 작별합시다. 구조와 언어의 속임수를 간파하는 시민이 늘어야 합니다."

 

그랬다. 실제로 올여름 일본에서는 54기의 원전 중 11기만이 돌아갔지만 우려했던 대규모 정전사태는 없었다. 전력 부족으로 인해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는 보고도 없었다. 전력 공급에 이상이 없을까에 초점을 맞춘 보도가 쏟아지는 가운데, 일본 시민들은 날마다 언론을 통해 전력공급 전망과 절전하자는 캠페인성 보도를 접해야 했다. 이런 보도는 동시에 현재의 생활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민들에게 지금의 생활이 더 이상 불가능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심을 주었다.

 

일본 시민은 이제 핵발전 산업계의 '안전신화'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3.11 사태 후 일본에서는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무너진 '안전신화' 대신 '안심신화'를 유포하고 있다"고 한다(작가 오치아이 케이코 씨의 9월 8일 '사요나라 원전' 강연 내용 중). 경제계는 멈춰 있던 원전의 재가동을 요구하고 있다. "경제발전 저하와 기업 공동화 위기론을 부채질하면서 국민들을 협박"(우치하시 카츠토)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핵발전으로 인해 희생되어 온 피해자들을 방치해왔고, 지금도 방치하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희생을 옛날 일본이 전시에 자살특공대로 젊은이를 내보내고 국민총동원령으로 군국주의 파시즘 체제를 유지하려 했던 것처럼, 다수의 노동자와 주민들을, 어린 아이들과 무수한 생명을 볼모와 희생양으로 삼아 그 위에 성립된 것이 핵발전이다.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방사선 피해 지역 주민들의 삶의 전반적인 파괴와 일상적인 피폭(외부피폭과 내부피폭)의 문제이지만, '원자력=전기'라고 생각하는 시민들이 많기 때문에 아직도 방사선 피폭의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핵발전소를 가동은 불가피하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일본에서는 여론이 탈원전으로 방향을 이미 급선회했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다. 정부와 재계, 핵발전 찬성파 학계가 유포한 안전신화, 비용 저렴 신화, 지구온난화의 대안이며 친환경에너지라는 클린 신화, 에너지 위기의 시대에 핵발전만이 대안이라는 핵발전은 무한에너지원이라는 신화 등 너무나 많은 '거짓말' 유포와 정보 은폐가 반 세기 가까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핵발전은 경제적이지 않으며,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소외 지역을 차별하며, 위험하고, 오염을 발생시키며, 파괴적인 산업이다. 또 대단히 정치적이며 소수의 사익 추구집단만을 위한 비도덕적인 산업이다. 화력이나 수력발전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핵발전소를 모두 멈춰 세워도 전기는 안 부족하니, 신재생에너지 혹은 자연에너지로 지금의 전기 수요를 그대로 유지하며 앞으로도 마음 내키는 대로 전기를 써도 되는 것일까.

 

근본 대책은 전기 낭비하는 생활방식 바꾸는 것

 

그렇지 않다. 전기 대량소비와 낭비를 지속하는 현재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전기를 지금처럼 넘치게 사용하는 것은 도저히 정상적인 세상이라고 볼 수 없다. 이만큼 전기를 낭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한가. 전기 사용 자체를 줄여가면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논의하고 준비해야 한다. 여기서 '지속 가능'이라는 것은,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이 아니다. 경제는 무한 성장할 수 없다. 경제성장신화도 깨뜨려야 한다. 인류 전체의 건강과 생명, 그리고 지구 생명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는데 경제나 산업이 우선될 수 있는가.  

 

대규모 정전사태를 겪으면서 문득 전기가 끊기는 공포와 불편을 겪은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또 '원자력 르네상스'를 외치고, 원자력 신화를 유지해 가려는 집단들이 있을까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전 세계 제1의 핵발전 국가 프랑스에서도 폭발사고가 있었다. 한국의 핵발전소는 종류가 다르다는 둥, 더 안전하다는 둥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을 시간이 없다. 간 나오토 전 총리는 사고가 일어난 직후, 도쿄를 포함한 관동지역 전체를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좁은 한국 땅은 울진, 고리, 영광, 월성 중 어디서 사고가 나더라도 전 지역이 위험지역이 되고 만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사상최대의 핵사고를 겪고 위기에 빠져 있는데도, 이것을 절호의 찬스라면서 핵발전소 수출을 한국이 주도해 갈 수 있다고 원자력 르네상스를 자랑스럽게 외치던 핵산업 마피아들이여, 정전사태를 맞아 다시 한 번 핵발전이 에너지의 대안이라고 주장하지 말라. 노후화한 핵발전소 가동을 연장하지 말고 폐쇄하라, 신규 건설을 중단하라, 지금 가동중인 핵발전소 안전성 강화도 중요하지만 핵발전소는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평시에도 주변지역을 방사선으로 오염시키고 방사선 피폭 피해자를 만든다는 사실이 해외 연구에서는 밝혀진 바 있다.

 

안전기준 강화하되 근본적으로 탈핵 사회로 가기 위한 단계를 밟으라, 핵폐기물 처리 문제를 사회의 중대한 과제로 삼고 전사회적으로 논의에 올려라. 안전한 핵은 없다. 아이들의 생명과 미래를 빼앗고, 누군가의 희생과 차별을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시스템 위에 선 원자력에서 생산되는 전기보다 민주적인 전기를 원한다.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악플을 달겠지. "그럼 너는 원전에서 나오는 전기 안 쓰냐? 전기 쓰는 주제에 아무 말 말라."고. 핵심은 전기가 아니다. 핵발전은 근본적으로 시작해서는 안 되는 산업이었다. 3.11 후쿠시마 사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핵문명, 석유문명,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파괴적인 문명을 반성하고 지금의 사회 시스템과 우리 삶의 양식을 근본부터 바꾸라는 것이다.       


태그:#핵발전소, #탈핵, #전기, #정전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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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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