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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라는 것이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의 감정 역시 마음대로 되지않듯이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운명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나 할까요.

기훈이 형은 나보다 두 살 위였습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오빠를 따라 오빠 친구인 기현이 오빠네 집에 가게 되었을 때였는데 놀랍게도 중3 이었던 기훈이 형은 영어로 된 두꺼운 원서를 사전도 없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전교에서 늘 1등을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원서를 통째로 읽고 있는 그를 보고 나는 그가 천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는 그와 별 말을 주고 받지 않았고 그냥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내가 고3이 되었고 서울대 물리학과를 다녔던 기훈이 형이 이번에는 형을 따라 우리집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나는 그를 형이라고 불렀습니다.

"넌 우리 형 한테는 오빠라고 부르면서 왜 나한테는 형이라고 부르니?"
"나도 모르겠는데 그게 편하게 느껴져."
"대학에서 서로 남녀구분이 없이 여자애들이 형이라고 부르는 말은 들어봤지만 고등학생인 너한테 들으니까 이상하다."
"그래서 형이라고 부르면 안돼?"
"아니 그렇지는 않구."

우리는 두 번 째 만남에서 많은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는 고3인 내게서 여자를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은 별로 한 적이 없었고, 그저 직감으로 기훈이 형이 나를 좋아하는 느낌을 받았을 뿐입니다. 기훈이 형은 별로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나와는 편하게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았습니다

"넌 어느 대학 갈거니?"
"글쎄 갈 대학이나 있을지 모르겠어."
"난 네가 대학을 안 다녀도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해.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면 그게 제일 좋은 것 같애. 이대 다니는 애들 중에 어떤 애들은  명절 때도 한복 저고리에 이대 뺏지를 달고 다닌다는데 그게 얼마나 꼴불견인 줄 아냐. 대학은 별 거 아니야. 하지만 공부는 좀 해 봐."

사실 오빠도 없는데 친구의 어머니도 어머니라며 우리 가족을 찾아 준 오빠의 친구 기현이오빠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기현이 오빠는 술이 문제였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술을 마셨다는데 소주 몇 병을 해치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젊음의 고민에서 못 빠져 나오는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 알콜 중독자로 전락을 한 것일까요. 그래서 기현이 오빠네 엄마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기현이 오빠와 우리 오빠는 어릴 때부터 친구라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기 때문에 가끔 엄마와 기현이 오빠의 엄마도 몇 번의 만남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 엄마같지 않게 기현이 오빠네 엄마는 씩씩하고 보험회사에서 보험왕을 할 정도로 억척이었고 남자 같이 일하고 남자처럼 행동했으며 덕분에 우리처럼 가난하지 않고 어려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기현이 오빠네 역시 우리처럼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오빠와 더욱 친해졌던 것 같습니다.

기현이 오빠는 우리 집을 자주 찾아와 엄밀히 말하면 오빠의 방이었지만 내 방에서 술을 마셨고 기훈이 형도 자기 형과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엄마는 모처럼 이것 저것 안주를 해서 오빠의 친구를 마음껏 대접했고 기현이 오빠는 술에 취하면 엄마 손을 붙잡고 엄마를 위로했습니다.

"어머니 조금만 더 고생하시면 그 고생 곧 끝날거에요. 서현이 그 놈이 어떤 놈이에요.
아마 누구보다 잘 될거예요."
"오냐 널 보니까 마치 서현이를 보는 것 같구나. 하지만 술은 조금씩 마셔라. 네 엄마 걱정이 크시다. 그리고 취직도 해야지 안그러니?"
"예 어머니 걱정마세요."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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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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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소주 몇 병을 마셔야 기현이 오빠의 술자리는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는 잠에 곯아 떨어졌습니다. 기현이 오빠가 잠들자 기훈이 형이 바람을 쐬자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산 바로 밑이었던 우리집에서는 별이 참 크게 보였더랬습니다. 총총히 박힌 별들은 손을 뻗으면 잡힐 것처럼 크고 가까이 보였습니다. 나는 집 옆 언덕배기에 박혀 있는 바위에 기훈이 형과 나란히 앉았습니다. 그런데 기훈이 형이 내 손을 슬쩍 잡는 것이었습니다.

"너 주원이랑 친하게 지내니? 걔 너 무척 좋아하는 것 같던데."
"우린 친구야. 내 나이에 좋아하고 안하고가 어딨어."

우리집에 왔을 때 주원이가 다녀 가는 것을 보고 누구냐고 내게 기훈이 형이 물었던 게 기억 났습니다.

"너 주원이랑 키스해 봤어?"
"형은! 그런 말 자꾸하면 나 들어갈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훈이형이 억지로 내 얼굴을 자기의 얼굴에 같다붙였습니다. 아마 키스라도 할 작정인 것 같았습니다. 나는 기훈이형을 억지로 밀치고 발딱 일어섰습니다.

"나 형이 좋지만 이러는 거 정말 싫어."
"미안하다. 네가 고등학생이라는 걸 잊었다."

사실 고등학생 때 키스를 하면 안되는 것일까요. 안된다는 법은 없었지만 나는 마음의 상처로 괴로워하며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할지라도 오빠의 '순결한 마음과 몸'이라고 편지 속에서 당부한 말을 잊지 않았고 어기고 싶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날은 기훈이 형이나 기현이 오빠나 술에 잔뜩 취해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했고 기현이 오빠는 이불에 오줌까지 잔뜩 쌌습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이불을 걷어내 고무다라이 속에 담갔고 기현이 오빠랑 기훈이 형은 너무도 미안해하며 우리집을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기훈이 형한테서 이런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너는 내게 고귀한 충동을 일으켜
넓은 세계의 정서 깊숙이 빠지게 하네.
너의 손이 나를 잡아주어 믿음을 주니
온갖 폭풍우를 헤치고 나를 날라주리>
                          -노발리스-

학현아, 나는 내가 한 행동이 술에 취해서 그랬다 할지라도 진심이었다.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이를 먹으면 결혼도 하고 싶다. 그러나 네 뜻이 정말 그렇다면, 그리고 나의 출현이 네게 추한정서를 심어주었다면 용서하기 바란다. 그리고 안 그러도록 노력해보겠다.'

그리고 추신란에는 영어로
'수학에도 사랑이 도표로 증명된다는 걸 알고 있니?'라는
문구와 수평과 수직으로 그려진 도표 위에 루트를 뒤집어 쓴 몇 개의 기호들은 도표 가운데 하트모양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사랑의 하트였는데 그 그림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 정말 아쉽습니다. 그 도표를 보자 나는 기훈이 형이 또 다시 천재처럼 생각되었지만 우리의 인연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몇 통의 편지가 더 왔지만 나는 그와 다시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그를 결코 싫어한 적은 없었지만 아니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때 나는 이성 간의 사랑을 하기에는 좀 이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운명은 인연처럼 정해져 있는 것일까요. 기훈이 형은 서울대학원을 거쳐 교환 유학생으로 미국으로 건너 간 뒤 공부가 끝나고 이른 나이에 그 곳에서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대를 나온 여자와 결혼을 했고 기현이 오빠는 역시 알콜 중독자가 되어 노숙자처럼 떠돌았습니다. 정말 인간미가 넘치는 오빠였는데 그렇게 한평생 떠도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태그:#인연, #연재동화, #최초의 거짓말, #학현이,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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