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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막을 내렸다. 투표율 미달로 투표함도 열어보지 못했다.

25.7%의 투표율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여당은 그 정도면 '사실상 승리'라는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주민 투표행위 자체를 여당 또는 오 시장에 대한 지지로 보는 건 무리다. 오히려 오 시장의 사퇴 배수진, 보수언론들의 지대한 관심, 여당과 보수단체들의 지원 등을 감안한다면 결과는 오시장의 패배에 가깝다. 

그런데 이번 투표에서 '선거와 투표의 공정한 관리'를 위해 존재하는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는 제 역할을 제대로 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무상급식 주민투표, 선관위는 제 역할 했을까

우선 선관위는 투표운동 기간의 불법을 막겠다고 공언한 것과는 달리 수수방관했다. 서울시 선관위는 지난 18일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종교활동을 이용하여 주민투표에 관한 편향된 발언을 하는 등 부당한 영향을 미칠 우려가 높아짐에 따라 적극 대처하기로 하였다"며 "불법으로 확인될 경우 엄중조치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선관위의 우려대로 투표일이 다가오면서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 투표참여 적극 독려 ▲ 오세훈 지지, 곽노현 비난 ▲ '복지 포퓰리즘' 망국론 등 부적절한 설교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선관위는 그때마다 한결같이 "위법성이 없었다"는 말로 덮었다.

주민투표법에 따르면 직업·종교·교육 그 밖의 특수관계 또는 지위를 이용하여 주민투표에 부당한 영향을 미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한다. 언론에 보도된 사례만도 적지 않았지만 선관위가 문제를 삼은 건 한 건도 없었다.

또한 투표일 막판에는 "8월 24일 투표해서 곽노현 교육감 물리칩시다"라는 문자메시지가 나돌았다. 동성애가 급증할 것이라는 해괴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주민투표 결과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행위가 처벌대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선관위의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서울시 선관위 관계자는 "투표운동 차원으로 문자를 보낼 수 있다"면서 "주장의 차원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단속에 어려움이 있다"고 밝힘으로써 단속 의지가 없거나 무능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이번 투표를 오세훈 대 곽노현의 대결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런데 선관위가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오세훈은 행동에 별다른 제약이 없었고, 곽노현의 입은 막혀 있었다. 선관위의 기본 태도는, 서울시장은 주민투표와 관련하여 주민이 정확하고 객관적인 판단과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각종 정보와 자료를 제공하는 정보제공자이고 서울시 교육감은 정보제공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에 그쳐야 할 오 시장의 행동은 도를 넘어섰다. 비록 나중에 제지를 받긴 했지만 투표독려 1인 시위를 진행했고, 대선 불출마와 시장직 연계 방침을 내세우면서 사실상 투표운동을 했다. 반면 곽 교육감은 서울시교육청이 교사·학부모에게 무상급식과 관련된 이메일을 보낸 것 때문에 선관위의 수사의뢰를 받게 되었다. 

노무현은 "선거법 위반".... 오세훈은 "문제없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1일 오전 서울시청 기자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오는 24일 실시되는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밝힌 뒤 무릎을 꿇고 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21일 오전 서울시청 기자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오는 24일 실시되는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밝힌 뒤 무릎을 꿇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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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위는 "기자회견은 취재보호차원에서 허용되는 사안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기자회견은 투표운동이 아니라서 허용된다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진행될 선거나 투표에서 공무원들은 기자회견이라는 방식만 택한다면 어떤 운동도 가능하다는 말일까. 

과거로 눈을 돌려보자. 사실 대통령 탄핵이라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를 가져온 직접적인 계기도 선관위의 판단에서 비롯됐다. 총선을 앞둔 2004년 2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방송기자 클럽 초청 기자회견에서 "국민이 압도적으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지지해 줄 것을 기대한다"고 발언했다.

지난 2004년 2월 27일 한나라당은 국회 의사당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 불법선거 규탄' 집회를 열고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불법 선거개입과 관권선거를 중단하지 않으면 대통령 탄핵 등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2004년 2월 27일 한나라당은 국회 의사당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 불법선거 규탄' 집회를 열고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불법 선거개입과 관권선거를 중단하지 않으면 대통령 탄핵 등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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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언에 대해 야당이 선거법 위반을 문제삼자, 중앙선관위는 3월 전체회의를 열어 노 대통령이 선거법상 중립의무를 위반했다는 결정을 내리고 선거중립의무 준수를 요청했다. 선관위는 "대통령은 행정부 수반으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독려해야 하고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공무원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감안해 이 같은 조치를 내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판단에 힘을 얻었을까. 야당은 며칠 후 국회에서 탄핵안을 가결하게 된다.

오 시장과 노 대통령은 기자회견의 형식으로 선거(투표)와 관련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는 점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선관위의 판단은 천양지차였다. 마치 야구에서 같은 구역으로 들어온 공을 놓고 때에 따라 스트라이크와 볼로 판정이 엇갈린 상황과도 같았다. 

이뿐 아니다. 최근 몇가지 사례를 더해보니 선관위가 공정하게 선거 관리를 하는지 의심이 간다.

이재오 선거법 위반 논란에 "자기 당 의원 모임이라 문제없다" 일축

먼저 선관위가 무리한 고발로 체면을 구긴 사례다. 선관위는 작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4대강 사업 반대 활동을 펼친 환경운동가 2명을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두 사람은 "선거와 무관한 일상활동"이라며 반발했지만 선관위는 "지방선거에서 4대강 사업이 선거쟁점이었기 때문에 '4대강 반대=특정후보 반대=선거운동'"이라는 논리로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1심 법원은 "환경운동 활동가들이 일상적인 업무 범위 내에서 직무상, 업무상 행한 활동으로 선거운동으로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정책을 찬성, 비판하는 행위들에 의해 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자가 영향을 받거나 받을 수 있다고 하여 그것을 특정 후보자 지지, 반대와 동일시 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검사의 상고로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대법원도 지난 6월 24일 "선거 이전부터 반대한 특정 정책이 선거쟁점에 해당되더라도 전부 규제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없다"며 원심을 확정했다. '시민단체의 활동이 선거 국면에서 결과적으로 특정 후보에게 유불리를 가져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선거법 위반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법원의 판단을 본 선관위는 무엇을 느꼈을까. 

이재오 특임장관을 비롯한 친이계 한나라당 의원들이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 중국음식점에서 4.27 재보선 승리를 다짐하는 만찬 회동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공성진, 최병국 의원, 이 장관.
 이재오 특임장관을 비롯한 친이계 한나라당 의원들이 2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 중국음식점에서 4.27 재보선 승리를 다짐하는 만찬 회동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공성진, 최병국 의원, 이 장관.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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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지난 4.27 재보선을 앞두고서는 선관위의 애매한 태도가 입길에 올랐다. 현 정부의 실세 중 한 명인 이재오 특임장관은 재보선 직전인 20일 친이계 의원들을 소집해서 '4.27 재보선 승리를 위한 작전회의'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하고 선거대책을 논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단체와 야당의원들은 선거법위반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선관위는 "이 장관의 발언은 자신의 당 소속 의원들을 모은 자리에서 한 얘기이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보인다"며 선거법위반 주장을 일축했다. 장관이자 국무위원으로 선거중립을 지켜야 할 인물이 여당 국회의원들과 대책을 논의했는데도 선관위는 개입을 꺼렸다. 선관위가 내세운 "외부인(일반 선거구민)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다"라는 논리는 궁색할 수 밖에 없다. 고발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선거중립의무 준수 요청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선관위는 정치 중립이 생명이다. 따라서 정치인은 선관위원이 될 수 없고, 중앙선관위원장과 시도 선관위원장에는 판사가 임명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의 상황을 보니 중립에 의심을 가게 한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사는 "시장직을 걸겠다"던 오세훈 시장의 거취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만일 9월 말 이전에 '깔끔하게' 사퇴한다면 10월 재보선에서 새로운 시장을 뽑게 된다. 선관위의 중립성도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다. 

다가올 재보궐선거나 내년 총선, 대선에서 선관위가 그동안의 편향성 의혹을 떨어내고 헌법기관으로서 소신있는 선거관리를 해줄 것을 기대한다. 


태그:#오세훈, #노무현, #선거법, #주민투표, #보궐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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