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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이제 2018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만큼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과거 없는 현재가 존재할까.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일도 없다. 이쯤에서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세상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 참 많다.

 

어느 시대나 위인들은 남보다 먼저 시대를 꿰뚫어보며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인간적으로 감동을 주기에 존경받는다. 살아 숨 쉬는 게 역사다. 대청호 주변의 위인들을 찾아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대청호 주변에는 훌륭한 인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래도 첫 번째 여행지는 경부고속도로 대전IC에서 가깝고 옛 지명 회덕이 더 정겹게 느껴지는 대덕구와 동구다. 은진송씨의 집성촌이었던 대덕구 송촌동에 집 주인 송준길이 어린 시절 우암 송시열과 같이 공부했던 동춘당(보물 제209호)과 송준길의 7대조로 부사정을 지낸 송유(1389~1446)의 별당 쌍청당, 읍내동에 송규렴과 아들 송상기의 고택 제월당과 옥오재가 있다. 동구 가양동에 송시열이 지은 서당 남간정사, 마산동에 황윤보가 고려말에 건축한 사설여관 터 미륵원지가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은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라고 할 만큼 정치계와 사상계를 호령했던 인물이다. 송시열은 27세의 나이로 생원시에 장원급제하고, 효종의 사부로서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영동 황간과 괴산 화양동에서 강학에 힘을 기울였고, 이조판서를 거쳐 62세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당쟁으로 제주도까지 유배를 가는 등 83세에 생을 마칠 때까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다.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은 영천군수였던 송이창의 아들이다. 19세에 세마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해 예학에 밝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학문적으로 송시열과 같은 성리학자로서 함께 북벌 계획에 참여하였다. 대사헌,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제월당 송규렴(1630~1709)은 사성, 승지, 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예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70세가 넘는 정이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로소에 들어갔다. 학문이 뛰어나 송시열, 송준길과 함께 회덕 삼송(三宋)으로 불리었다.

 

진주강씨는 17세기에 강학년, 강백년 등 저명한 유학자를 배출하며 가문이 크게 번성했다. 진주 강씨가 은진 송씨에 이어 두 번째로 많고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것을 우암 송시열은 회덕향안에 남송북강(南宋北姜)으로 기록했다. 후손들은 강학년, 강백년 등을 모시던 용호사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진 것을 아쉬워한다.

 

복천 강학년(1585∼1647)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반정 이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다. 사어·사예·지평 등을 지냈고, 초서에 뛰어났으며, 청빈하고 의를 내세워 선비들의 추앙을 받았다. 설봉 강백년(1603∼1681)은 충청도와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예조참판으로 동지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도승지와 이조참판을 역임한 뒤 예조판서, 우참찬, 판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으며 기로소에 들어갔다.

 

회덕에서 회덕황씨를 빼놓을 수 없다. 마산동 물가에 터만 남아 있는 미륵원은 참다운 선비나 부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조선시대 호서와 호남을 오가는 여행자에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한 대전 최초의 사회복지기관 미륵원에 대해 이색과 하륜, 변계량, 정인지, 송시열 등 당대에 손꼽히는 인물들이 찬양하는 글(제영기)을 남기고 있다.

 

옥천군에는 조헌의 발자취가 많이 남아있다. 군북면 이백리의 이지당과 안내면 도이리의 후율당은 조헌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서당으로 송시열도 이지당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안남면 도농리에는 영정과 위패를 모신 표충사, 송준길이 글씨를 쓴 신도비, 송시열이 비석과 문인석에 공적을 기록한 무덤이 있다. 중봉 조헌(1544∼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영규대사의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수복하는 등 왜병들을 막아내다 금산전투에서 700의병과 함께 장렬히 순국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동구 신하동에 수몰로 내탑리에서 옮겨온 김정의 묘와 유적들이 있다. 충암 김정(1486∼1521)은 조선 중종 때의 문인으로 형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기묘사화(1519) 때 조광조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금산에 유배된 후 제주에서 생을 마감했고, 미신타파와 상호부조에 힘써 향약을 시행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보은군 회인면 눌곡리에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호산 박문호(1846∼1918)가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풍림정사가 있다. 호산집에 수록된 유백운대기, 유속리산기 등 산행기가 유명하다.

 

금강의 물가에 살았던 사람들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의 진리를 몸소 실천하며 비단결같이 아름다운 꿈을 키웠다. 여행 말미에 묵묵히 위인들을 믿고 따르며 디딤돌이 되어준 사람들의 공로를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대청호소식 7+8월호'와 제 블로그 '추억과 낭만 찾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금강, #대청호, #송시열, #송준길, #송규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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