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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수와 일가 친인척으로 소유체제가 구성된 한국식 재벌(財閥, Chaebol)이 등장한 지 약 50여년. 그동안 재벌 대기업들이 안고 있는 온갖 문제점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지만 경제 성장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점이 면죄부로 작용해왔다.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재벌은 개혁의 대상이 되거나 총수가 검찰에 소환되는 일이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개혁이 좌절되고 총수는 경영일선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명분이기도 했다.

발전도상국이 선진국을 추격하려면 국가의 적극적 자원 재분배 개입과 함께 일정한 규모를 지닌 대기업 집단이 모험을 감수하며 중화학 공업과 첨단 산업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는 주장이 역사적 경험으로 뒷받침되기도 했다. 최근에 재벌 대기업과 '사회적 대타협'을 하여 한국을 복지국가로 발전시키자는 주장도 재벌 대기업 집단의 이러한 긍정적인 역할을 전제한 것이다.

실제로 한때 '재벌 대기업 집단의 과감한 투자와 고용 → 임금과 국민 소득 상승 → 구매력 있는 중산층 확대 → 내수시장 규모 확대'로 이어지는 일정한 선순환 구조가 작동하여 한국경제의 체질이 개선될 조짐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1988년에서 1996년까지가 그러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후 신자유주의의 흐름에 따라 기업들이 단기 수익을 추구하고 고용 유연화 정책을 도입하면서 선순환은 악순환으로 바뀌었다. '대기업이 주도하는 한국형 발전 모델'이나 '트리클 다운 효과(Trickle Down Effect, 적하효과)'는 사실상 종료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1987년1988년에서 1996년까지의 기간 동안 재벌 대기업의 성장과 국민 소득 향상이 맞물리면서 내수시장 확대를 가져오게 되었고 그것이 다시 재벌 대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보고, 외환위기로 인해 이러한 선순환 구조가 소멸되어 버렸다는 점을 짚어보고자 한다.

1988~1996년 소득 상승과 내수시장 확대

1980년대 이후 한국경제에서 첫 번째 분기점은 1987년이다. 1985년 선진국들의 환율조정 회의였던 플라자 합의 이후 '저금리, 저달러, 저유가'라는 3저 호황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조합 결성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임금상승 요구가 높아지게 된다.

이를 시발점으로 한국경제는 1988~1996년 외환위기 직전까지 그 이전이나 이후와는 다른 거시경제 지표들을 만들어 가게 된다. 즉, 이 시기는 한국경제의 전 역사적 시기를 통틀어 부정적인 측면이 최소화되고 자본주의 틀 안에서나마 긍정적인 모습들이 확대되어갔던 시기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노동자 임금 상승과 소득 상승이 가장 빠르게 증가했던 시기
▶ 노동소득 분배율이 커지면서 소득 불평등 정도가 가장 완화되었던 시기
▶ 국민들의 저축률이 높게 형성되었던 시기
▶ 부동산 시장, 주식 시장 등 자산시장이 큰 변동 없이 일정하게 유지되었던 시기
▶ 국민 소득 향상에 기초한 내수시장이 가장 팽창했던 시기

① 노동자 임금 상승과 소득 상승이 가장 빠르게 증가했던 시기

우선 전체 경제 성장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시기는 유래 없는 노사 분규와 임금인상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 평균 실질 경제성장률이 8.3%로 상당히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2001~2010년 평균 경제성장률 4.2%의 거의 두 배에 해당한다.

1988~1996년의 연평균 시질 경제성장률은 8.3%로 2000년대의 4.2%의 두 배이다.
 1988~1996년의 연평균 시질 경제성장률은 8.3%로 2000년대의 4.2%의 두 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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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한국 역사상 노동조합 조직률이 가장 높았고 조합원 숫자도 가장 많았던 시기다. 1989년 노동조합 조직률은 20%, 조합원 수는 200만 명에 육박했다. 현재 노동조합 조직률은 10% 수준이다. 노동운동 활성화가 경제 성장을 추락시키지 않는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고성장이 이어지면서 일자리는 매년 50만 개 전후로 늘어나게 된다. 고용율이 매우 가파르게 상승하여 1994년에서 1996년 기간 동안에는 역사상 최고치인 61%에 근접했다.

1988~1996년에는 2000년대에 비해 취업자수가 꾸준히 증가했으며, 고용률 평균도 높다.
 1988~1996년에는 2000년대에 비해 취업자수가 꾸준히 증가했으며, 고용률 평균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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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노동자 임금과 가계의 소득 역시 안정적으로 높은 수준의 상승률을 보이며 증가했다. 한국은행이 집계하고 있는 명목상 피용자 보수가 매년 15~25%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임금이 상승함에 따라 기업의 생산원가나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인건비 비중도 12~14%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2000년대의 10%에 비하면 훨씬 높은 수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업들이 적자행진을 했던 것은 아니다. 

1988~1996년에는 피용자 보수가 매년 15~25%씩 증가하고 있다
 1988~1996년에는 피용자 보수가 매년 15~25%씩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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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1998~1996년 시기는 '노동조합운동 활성화 → 취업자 수 증가 → 고용률 증가 → 임금 상승'이 비교적 높은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이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200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약화 → 취업자 수 증가세 약화 → 고용률 하락 → 실질임금 정체'와 여러모로 비교된다. 아울러 이 시기는 노동유연화가 아직 사회적으로 확대되기 이전 시기여서 비정규직 만연과 같은 고용불안도 상대적으로 적었던 시기다.

② 노동소득 분배율이 커지면서 소득 불평등 정도가 가장 완화되었던 시기

노동소득 분배율 역시 가장 빠른 속도로 개선되었고 절대 분배율 값도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임금 노동자의 절대 숫자가 계속 늘어났던 것을 고려하여 재계산한 조정 노동소득 분배율지표를 보면 1990년 59.2%, 1996년 62.4%이던 것이 2001년 58.6%, 2010년 52.5%로 낮아지게 된다. 여기에 자영업자 소득 감소까지를 감안한 지표를 보면 격차는 더 커진다.

1988~1996년의 노동소득분배율은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다가 1997년 이후 하락하기 시작한다
 1988~1996년의 노동소득분배율은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이다가 1997년 이후 하락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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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소득 분배율이 개선되면서 불평등 정도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인 지니계수 역시 1990년대 초반에는 낮아진다. 이후 완만한 상승을 보이기는 했지만 2000년대에 비교하면 매우 낮은 수준을 지속했다. 이 시기는 상대적으로 불평등 정도가 완화되고 중산층이 두터워져갔던 시기다. 2011년 현재 시점에서 중요한 사회목표가 '불평등 완화, 두터운 중산층 만들기'라면 그 목표에 가장 근접했던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1997년 이후 상대적빈곤률과 지니계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1997년 이후 상대적빈곤률과 지니계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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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국민들의 저축률이 높게 형성되었던 시기

소득 상승에 힘입어 가계 저축률도 15~20% 사이를 유지하면서 기업 저축률을 크게 상회했다. 2010년 기준 가계 저축률은 3.9%에 불과하다. 또한 가계부채는 가계 신용잔액 기준으로 1996년까지 175조 원 정도였다. 이는 현재 2010년 가계 신용 잔액 800조 원의 5분의 1에 불과하다.

적은 저축에 높은 부채를 안고 살아가는 지금의 생활과 높은 저축에 낮은 부채밖에 없었던 당시의 생활은 여러모로 상상이 안 될 정도로 비교가 된다. 반면 기업들은 외환위기 이후 높은 부채비율을 축소하고 내부 현금자산을 늘리면서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에서도 공격적으로 대처해왔다.

1988~1996년은 개인의 저축률이 기업보다 높았으나 1997년 이후 역전되었다
 1988~1996년은 개인의 저축률이 기업보다 높았으나 1997년 이후 역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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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부동산 시장, 주식 시장 등 자산시장이 큰 변동 없이 일정하게 유지되었던 시기

1990년대 초반까지는 부동산과 주식시장의 과열이 보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1990년대 상반기에는 부동산 매매 시장은 큰 상승 없이 일정한 가격 기조를 유지했다. 전세 값이 완만하게 상승하는 정도였다.

반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자산시장에서 거품이 형성되던 시기였다.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 시장이 1999~2003년, 2005~2006년 두 번에 걸쳐서 큰 폭으로 상승한 결과 서울지역 기준 아파트 가격이 평균적으로 두 배 이상 올랐던 것이 이를 입증해준다. 1999년 1월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 지수는 35.7이었지만 2010년 말 기준 지수는 100.3이었다.

1988~1996년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988~1996년의 아파트 매매가격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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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시장과 함께 주식시장도 1980년대 말과 1993년 전후 두 차례에 걸쳐 폭등하는 현상을 보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종합주가지수 기준 600~1000 사이를 오가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2004~2008년 금융위기 시기까지 주가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2000포인트를 돌파했고 글로벌 금융위기 과정에서 큰 폭의 변동성을 보인 바 있다.

사실 외환위기 이후 시기 한국경제에서 새롭게 나타난 가장 차별적인 현상이라고 한다면 경제의 금융화가 급격히 진행되고 금융공급에 의한 자산 거품이 극심하게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가계 부채가 동반되었음은 물론이다. 2011년 현재까지도 이 거품은 제대로 꺼지지 않은 채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다.

⑤ 국민 소득 향상에 기초한 내수시장이 가장 팽창했던 시기

이 시기 국민들의 소득과 저축이 상승했던 결과는 전체 거시경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이는 민간 소비지출 증가와 내수확대로 이어졌다. 이 시기는 수출 보다 민간 소비지출에 의한 내수 성장 기여도가 상당히 높았던 시기이다. 또한 민간 소비가 팽창하자 기업들의 국내 설비투자도 평균적으로 높은 수준으로 확대된다. 1988~1996년 동안 평균 설비투자 증가율은 13.1%였다. 이는 2000년대 이후에는 다르게 나타나는데  2001~2010년 동안에는 3.8%에 불과했다.

1988~1996년에는 민간 소비지출(내수)이 수출 보다 높은 성장기여도를 보였다
 1988~1996년에는 민간 소비지출(내수)이 수출 보다 높은 성장기여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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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외환위기 이후에는 2001년 IT버블 붕괴로 인한 세계 경제 침체와 2009년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 국면들을 제외한다면 내수 보다는 수출의 성장 기여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민간 소비는 1997년 외환위기, 2003년 신용카드 대란, 2009년 경제위기로 인해 세 번의 심각한 추락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1999~2002년 신용카드 거품이라는 부채에 의한 과소비 시기를 뺀다면 전반적으로 수출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을 지속했다.

재벌 대기업은 1990년대 팽창하는 내수에 의지해 성장을 해 왔지만 2000년대부터는 낮은 국내 민간 소비가 아니라 수출과 해외생산 확대를 타면서 성장해갔고 이것이 국민경제와 재벌 대기업의 연관 고리가 약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내수 확대를 기반으로 성장한 재벌 대기업

'국민 소득 상승 → 구매력 상승 → 민간소비지출 증가 →> 내수시장 팽창'은 국내 재벌 대기업들에게는 엄청난 도약의 계기로 작용한다. 확대된 내수시장에 대한 지배력을 기반으로 재벌 계열의 주요 대기업들은 활발하게 자본축적과 기술축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며, 그 결과 1980년대까지의 조립가공기업에서 벗어나 자동차, 반도체, 전자 등에서 일정하게 자체 기술력을 확보하면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이동했고 섬유 등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는 첨단 산업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자동차 산업만 보아도 명확한데 1980년대 이후 한국 자동차 산업에서 내수가 수출을 앞질렀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수출이 한국 자동차 산업을 선도하고 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는 해외 생산 자체가 국내 생산 후 수출과 맞먹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자동차 산업의 경우 국내 생산에 의한 내수 판매와 수출 보다는 해외생산에 의한 현지판매가 대폭적으로 증가했는데, 2010년 기준 국내 자동차 업계의 해외 생산이 260만 대를 넘어서게 되었다. 이 역시 2000년대에 재벌 대기업이 국내 경제와 단절된 성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 지표다.

또한 당시는 민주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노태우-김영삼 정부를 거치면서 재벌 대기업들이 서서히 정부권력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고 권력에 대하여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1992년 재계 총수였던 정주영 현대 회장은 아예 대통령에 출마하여 파란을 일으킨 경험이 있다. 노동자 대투쟁으로 인상된 임금이 기반이 되어 내수시장에서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고 민주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정부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시작했던 것이 한국 재벌 대기업 집단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재벌 대기업들은 국민경제에서 고용과 소득 저축이 동반 상승하면서 내수 시장이 확대되었던 1988~1996년 동안, 상대적으로 보호받던 국내 시장에 대한 독과점적 지배력을 근간으로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면서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던 셈이다.

외환위기로 종결된 재벌 대기업 성장과 내수 확장의 선순환

물론 1988~1996년 고용과 소득 저축이 동반 상승하면서 중산층이 두터워졌다는 것은 2000년대와 상대적으로 비교하여 그렇다는 것이지 이 시기에 경제 불평등이나 저임금이 없고, 노동 기본권 등이 지켜졌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다. 사회 부조리나 재벌의 불법, 탈법 행위가 없었다는 얘기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중요하게 짚어야 할 역사적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이 시기 중요 특징이 내수시장 확대이지만 그 외에도 매우 중대한 변화가 물 밑에서 시작된다. 바로 경제의 신자유주의화이다.

특히 김영삼 정부 들어서 한쪽에서는 금융실명제(1994), 부동산실명제(1995), 공평과세 등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1994년 12월 '세계화' 선언을 기점으로 1996년 OECD가입을 위해 미국이 요구한 금융 자유화를 서두르게 된다. 그 정점에 1995년 8월 15개 투자 금융사를 종금사로 전환시키고 이들에게 해외차입을 허용해주는 등 금융 규제가 풀린 사실이 있다.

막 시작된 금융개방 환경은 내수를 기반으로 급성장한 재벌 대기업의 팽창 욕구와 결합하여 외환위기라는 한국경제사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을 발생시켰다. 외환위기 원인이 재벌의 부실 경영 때문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 금융 자유화 때문인가 하는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이 두 가지가 결합되었다는 것이다.

내수시장 확대를 배경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재벌 대기업들은 대우의 '세계경영'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해외로 팽창을 서두르게 된다. 이를 위해 과잉 차입, 과잉 투자를 감행하는데 이때 적지 않은 자금줄로 작용한 것이 바로 종금사를 포함한 금융기관들이 해외에서 저리로 차입해온 단기 외채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단기 외채는 급증했고 한보, 기아 등 유력 기업들이 흔들리자 종금사 등 금융사들의 부실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97년 태국에서 시작된 아시아 외환위기로 인해 해외 자본의 자금 상환 압박이 아시아 전역에 번지자 곧바로 한국도 외환위기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 자본 자유화의 주요한 압력은 국내 재벌과 미국 정부로부터 기인했으며 정부는 해외차입 부분을 너무 많이 개방했고 이것이 위기의 주된 원인이었다"고 밝힌 당시 고위 관리의 고백은 이런 추정을 뒷받침해준다.

역설적인 것은 외환위기의 주범 중 하나였던 부실 대기업은 온갖 화살을 맞으면서 구조조정을 시작한 데 비해, 다른 주범인 금융 자유화는 오히려 더욱 가속화되면서 금융화 시대를 탄생시켰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기는 내수시장 확대에 기초해 소득 불평등이 완화되고 재벌 대기업이 성장했던 것을 주요한 특징으로 하면서, 동시에 금융 자유화를 포함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시작되기도 했다는 것, 그 둘의 잘못된 만남이 외환위기를 발생시켰다는 것이다.

결국 외환위기는 한국경제를 1996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분기점이 된다. 신자유주의의 큰 흐름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기업들이 단기 수익성을 목표로 경영전략을 바꾸고 고용 유연화정책이 속속 도입되자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고용불안이 확대되어 전반적인 국민의 실질 근로소득 수준을 떨어뜨리고 실질 구매력을 약화시킨다.

대신 소매 금융이 크게 확대되는 등 금융화 현상이 확대 되면서 부채에 의한 가소비가 반짝 살아났다가 2003년 카드 대란으로 주저앉는다. 실물경제는 4%대의 성장률에 머무르는 대신 자산시장 거품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부동산과 주가가 가파른 상승 곡선을 탄다. 두터워가던 중산층이 붕괴하고 2000년대 내내 화두가 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겨우 안착되려던 내수기반이 재차 붕괴되고 자산시장만 활황국면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재벌 대기업들은 부채 축소, 수익성 개선을 내걸고 신자유주의 단기 수익추구에 편승하면서 국내 고용을 축소한다. 필연적으로 민간소비가 약화되었고 재벌 대기업들은 내수 시장 대신 본격적으로 글로벌화를 추진하면서 철저히 수출위주의 성장 전략을 구사하고 더 나아가 중국의 부상 등을 활용해 해외생산기지 건설에 나서면서 아예 투자도 해외투자, 고용도 해외고용, 외주도 해외 외주 체제로 변해 나간다. 국내 경제와 재벌 대기업의 성장이 단절되기 시작한 것이고 재벌 대기업 주도의 한국형 발전 모델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병권 기자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입니다. 이 기사는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대기업, #재벌, #트리클다운, #경제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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