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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유적과 함께하는 '2011 겨울 만주기행' 다섯째 날(1월14일), 아침에 연길(옌지)을 출발하여 청산리전투 유적지와 대종교 3종사 묘역, 용정중학교(대성중학교), 일송정을 거쳐 명동촌(明東村)에 들렀다가 버스에 올라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였다.    

 

버스는 용정(龍井)으로 방향을 잡고, 가쁜 숨을 토하며 눈 덮인 산천을 좌우로 가르며 달렸다. 명동촌에서 용정까지는 약 8km. 서쪽 하늘은 연분홍으로 물들고 있었다. 한국과 한 시간의 시차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만주의 겨울 해는 너무 짧았다.

 

어떤 농가는 저녁을 준비하는지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녁노을에 반사된 연기는 시골 정취를 더욱 진하게 자아냈다. 문화와 기후가 비슷하고, 조선족 동포가 살아서인지 만주의 농촌은 대할 때마다 추억으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했다.

 

집 주변을 울타리처럼 둘러 쳐놓은 마른 옥수수나무 가지가 눈길을 끌었다. 소에게 먹이려고 바람에 말리는 것으로 알았는데, 찬바람을 막아주는 방한(防寒) 도구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환경이 문화를 지배한다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게 아니었다.

 

자연에 순응하며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순박한 생활상이 눈앞에 그려졌다. 민둥산의 하얀 눈과 앙상한 나뭇가지. 그루터기만 남은 들녘의 소들, 가끔 나타나는 마을과 허름한 가옥 등은 한국의 60년대 농촌을 연상시켰다.  

 

일제가 만주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던 용정

 

버스는 20분쯤 달려 용정역에 도착했다. 가루눈이 살포시 내리깔린 역광장은 썰렁하다 못해 황량해서 더욱 춥게 느껴졌다. 용정역도 두 번째 방문이고 몸도 피곤해 버스에서 쉬려다 훗날 후회할 것 같아 일행과 함께 내렸다. 

 

발을 땅에 내디디는 순간 찬바람이 볼때기를 후리면서 가장 먼저 반겼다. 입 주변이 얼얼했다. '만주는 만주로구나!' 소리가 절로 나왔다. 광장은 여름과 달리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도 추우니까 모두 대합실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여섯 개 시(연길, 돈화, 용정, 화룡, 도문, 훈춘)와 두 개 현(안도, 왕청) 가운데 분위기가 한국과 가장 흡사하다는 용정은 일제가 만주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던 도시였다. 기차역이 있는 도시를 중심으로 침략의 마수를 뻗쳤던 일제가 만주에서 가장 먼저 용정에 병원을 설립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1941년 발행) 자료에 의하면 일제는 만주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1918년 용정에, 1931년 6월에는 연길(局子街)에 함경북도 회령의원 출장원 진료소(자혜의원)를 설립했다. 연길보다 13년이나 빠르게 병원을 설치한 것은 일제가 용정을 손에 넣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예측 가능한 대목이기도 하다.

 

어린아이와 임신한 부녀자도 학살했던 일제. 그들은 가난한 환자들에게 치료를 해주면서 시혜를 베푸는 척하였다. 일제의 간교한 행위는 1931년 '9·18사건'을 일으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만주국(1932년)을 세우기 위한 사기극에 불과했던 것이다.

 

'3·13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용정역 광장

 

일행이 버스에서 내리자 박영희 시인은 앞으로 나와 서울 탑골공원에서 선포된 독립선언서가 용정에 도착했던 1919년 3월 10일과, 3일 후 천주교회당 종소리와 함께 시작된 3·13 만세운동에 대해 설명했다.

 

"이곳(용정역 광장)은 북간도에서 일어난 최초의 반일운동으로 만주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3·13 만세운동(1919년)이 일어났던 장소입니다. 그날 하루만 했느냐. 그게 아니에요. 3월 13일을 기점으로 용정에서만 집회가 46회나 열렸고, 참가 인원도 10만 명이 넘었는데, 늘 이곳에서 모여 시내로 나갔어요···."

 

박 시인은 아주 중요한 장소이니 주변도 자세히 둘러보고 대합실에도 들어가 보라며, 5년 전까지는 열차가 다니지 않았는데 2년 전 철로가 백두산 부근 통화(通化)까지 연결되어 운행되고 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용정역 부속 건물로 보이는 색 바랜 벽돌 건물 몇 채가 눈에 들어왔다. 깨지고 깎여나간 벽돌들에서 세월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었는데, 무장 독립군부대 창설의 계기가 되었던 용정역 광장의 3·13 만세운동 함성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았다. 

 

"아내는 일 년에 한 번씩 만납네다···."

 

역 주변 사진촬영을 어렵게 마쳤다. 추위에 민감한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대합실은 사람들 체온으로 온기가 돌았다. 안방이 따로 없었다. 일행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구가 낯설게 느껴지는지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녔다.

 

개찰구 창을 통해 들어오는 용정역 플랫폼을 구경하는데, 첫인상이 넉넉하고 푸근하게 느껴지는 중년의 역무원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루어졌다. 북한말투의 역무원은 조선족 2세로 박광춘(46)씨였다. 그는 용정에서 나고 자란 용정 토박이였다.

 

"용정에 조선족 동포는 얼마나 살고 있나요?"

"연변 자치주로 말하면 조선족이 가장 많은 데가 용정이란 말입네다. 지금 용정에는 백 분의 사십육(46%). 옛날에는 육십(60%)을 넘었댔는데 점점 시간이 가다 보니 한족이 더 많아졌슴다. 연길도 숫자는 용정보다 많지만, 비율로 따지면 삼십칠(37%)밖에 안 된단 말입네다." 

 

"용정역에서 근무하면, 조선족 자치주에서 월급을 받나요?"

"아입네다. 철도 계통은 국가 사업단위 기업이라 중국 철도부에서 받습네다. 그래까나 저도 다른 역에서 잠깐 있다가 82년도에 용정으로 와서 지금까지 29년째 근무하고 있재요. 제 와이프도 오래전 한국에 나가 일하고 있습네다."

 

"그럼 사모님도 돈 벌러 나가셨나요?"

"예, 98년도에 나가서 식당에서 일하고 있으니까로 햇수로 13년이 되었습네다. 깜빡 잊었네, 아, 대나무 쌀밥(통밥)집이라고 합데다. 10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은 만납네다. 소식을 편지나 전화로 전하기도 하는데 어려움은 없습네다."

 

"그럼 아저씨도 훗날 한국으로 이사하시겠군요?"

"그리 안 나가도 괜찮습네다. 둘이 벌어서 여기에 내 집을 두 개씩 가지고 있는데 뭐 하러 나갑네까. 이곳 조선족들은 돈 벌면 살기 좋은 청도(靑島)나 연태(烟台)로 나가 사는데, 청도에만 30만 넘게 살고 있습네다. 저는 연길 쪽으로 나가서 살고 싶은데, 그렇게 될라나 모르겠슴다."

 

박씨는 용정역 소화물 사무소에서 일하다가 대합실에서 한국말이 들리니까 13년째 떨어져 지내는 아내가 생각나 나온 모양이었다. 나이를 확인하다가 여성 일행이 말띠 동갑내기라며 놀라는 표정을 짓자 함께 웃으며 반가워하기도.

 

대화가 무르익어 가는데 여학생이 다가와 기념사진을 함께 찍고 싶다고 말했다. 수줍어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해서 그런지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박씨는 사람들이 재차 설명하니까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해주었다.

 

박씨는 고운 피부처럼 목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사회주의 체제의 공무원답게 말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군 장교의 설명을 듣는 것 같았는데, 행정장교가 사단장이나 부대를 찾아온 손님에게 현황을 브리핑하듯 절도(節度)가 있었다. 

 

박광춘 역무원과 헤어지기 전에 만주의 항일 독립운동사를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학교 다닐 때 영향을 받았습네다"라고 짧게 말했다. 갑자기 심각해지는 그의 표정은 역사 교과서를 통해 배우지 못하고 귀동냥, 언론이나 주변 어른들에게 얻어들은 게 많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11년 1월10일부터 17일까지 항일유적과 함께 하는 겨울 만주기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용정역, #3·13 만세운동, #만주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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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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