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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2 사극 <성균관 스캔들>.
 KBS2 사극 <성균관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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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사극 <성균관 스캔들>에는 꽃미남 유생들이 등장한다. 1명의 남장여자를 포함해서 4명의 꽃미남 유생들로 구성된 '잘금 4인방'(믹키유천·박민영·송중기·유아인 분)은 임금의 총애를 받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동료 유생들과 일반 백성들의 주목까지 받고 있다.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역사상 꽃미남' 하면 신라 화랑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화랑(花郞)은 글자 자체가 '꽃미남'이란 뜻이다. 그런데 <성균관 스캔들>은 종래에 고리타분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던 조선시대 유생 즉 선비에 대해서까지 꽃미남의 이미지를 덧씌워 놓았다는데 의의가 있다.

사극에서까지 꽃미남을 다루는 세태를 보면서 외모 지상주의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올 법 하지만, 역사상의 사례들을 살펴보다 보면 이 정도는 '약과'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아예 따라갈 수도 없을 정도의 극단적 외모지상주의로 치달은 사례를, 13세기 몽골 침략 이전의 대리국(938~1253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 남부의 운남(윈난)에 자리 잡았던 대리국은 티베트-미얀마어 집단과 태국어 집단이 주로 살았던 지역이다. 오늘날 이곳에는 묘족(먀오족), 이족, 백족(바이족), 납서족(나시족), 태족(타이족) 등이 거주하고 있다. 13세기 후반에 이 지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서, 가히 역사상 최고라 할 수 있는 대리국의 '꽃미남 열풍'을 확인할 수 있다.

"용모가 잘생기고 점잖으며 모습이 수려한 사람이 어쩌다 이 지방을 지나다가 그곳 어느 집엔가 유숙하게 되면, 밤중에 독약이나 다른 방법으로 그를 죽인다."

잘생긴 여행객이 나타나면 밤중에 몰래 죽이는 사건이 대리국에서 자주 발생했다는 것이다. 여행객의 주머니를 노린 범죄이겠거니 하고 지레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돈을 빼앗기 위해서 그를 죽이는 것이라고는 오해하지 않기 바란다"고 마르코 폴로는 미리 못을 박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그가 지닌 훌륭한 외모와 좋은 품격과 지식과 영혼을 자기 집에 남겨두기 위해서다."

꽃미남을 과도하게 숭상하다 보니 그 영혼마저 빼앗기 위해 꽃미남을 아예 죽여 버린 대리국 사람들. 대한민국에서 꽃미남 열풍이 아무리 강해진다 해도 이렇게까지 과도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유교를 숭상한 조선시대에는 13세기 이전 대리국은 커녕 21세기 대한민국만큼의 꽃미남 열풍도 생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꽃미남 열풍을 억제하는 사상적 토대가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대리국의 영역이었던 운남 지방에 사는 묘족의 가옥. 이 건물은 복원된 것으로서, 북경 올림픽경기장 인근의 중화민족원(중화민주웬) 안에 있다.
 대리국의 영역이었던 운남 지방에 사는 묘족의 가옥. 이 건물은 복원된 것으로서, 북경 올림픽경기장 인근의 중화민족원(중화민주웬) 안에 있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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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꽃미남 열풍이 일어나기 힘들었던 데에는 근본적으로 유교의 영향이 매우 컸다. <논어> 옹야 편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공자는 "질(質)이 문(文)을 이기면 촌스럽고, 문이 질을 이기면 성의가 부족하다"며 "문과 질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군자라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질(質)은 본바탕 즉 내면을, 문(文)은 외형을 가리킨다. 청동기 시대의 토기인 무늬 없는 토기 즉 민무늬토기를 무문(無文)토기라고도 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문(文)이란 글자는 '글월'뿐만 아니라 '외면적 치장'을 가리키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문' 속에는 외모나 태도를 보기 좋게 가꾸는 것뿐만 아니라 문장을 화려하게 다듬는 것 등도 포함된다. 

공자의 메시지는 '문+질=군자'로 정리될 수 있다. 내면과 외면이 골고루 갖추어져만 군자(君子) 즉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이 메시지는, 후대의 선비들이 겉치장에 과도한 시간을 투입하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것은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사람의 겉모습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점수를 주지 않도록 하는 데에 기여한 것이다.

단 주의할 것은, 공자가 외면보다 내면을 훨씬 더 중시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내면의 아름다움과 외면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겸비한 사람만이 진정한 군자라고 보았다. 공자는 '거울은 덮어두고 책이나 열심히 들여다보라'고 가르치는 스승이 아니라 '거울을 들여다보는 만큼 책도 들여다보라'고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유학자들은 외면보다 내면을 훨씬 더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 같은 분위기를 중국 북송(960~1127년) 때의 유학자인 양시(楊時)의 <논어> 해석에서 감지할 수 있다. "문과 질이 조화를 이루어야만 군자라 할 수 있다"라는 공자의 메시지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였다.

"질이 문을 이기는 것은 마치 단맛이 (다른 맛과) 조화될 수 있고 흰색이 (다른 색과) 어울릴 수 있는 것과 같지만, 문이 질을 이겨서 없애는 것은 그 근본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문만 남는다면 어디에 쓰겠는가? 그렇다면, 성의가 부족하기보다는 차라리 촌스러운 게 나은 것이다."

문이 없고 질만 남는 것(촌스러운 상태)은 그런 대로 괜찮지만, 질이 없고 문만 남는 것(성의가 부족한 상태)은 '근본이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문만 남는다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거울은 무슨 거울! 책이나 열심히 봐라!"라는 것이었다. 

양시의 태도를 그대로 계승한 인물이 남송(1127~1279) 때의 대학자이자 주자학(성리학)의 원조인 주자였다. 주자가 논어 해설서인 <논어집주>를 집필할 때에 양시의 주석을 그대로 수용한 것은, 주자 역시 '거울' 즉 외면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한 인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면을 중시하는 태도는 물론 옳은 일이지만 외면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낮게 평가했다는 점에서, 주자는 공자의 메시지에서 일정 정도 이탈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자가 그러한 태도를 갖고 있었기에, 주자와 주자학을 숭상한 조선시대에는 꽃미남 열풍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기가 무척 힘들었다. 외면적인 치장을 극도로 혐오해서 문장력이 좋은 사람들마저 가까이 하기를 싫어한 조광조가 성균관 유생들 사이에서 매우 높은 인기를 구가한 점만 보더라도, 조선시대 엘리트들이 외면적 아름다움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유학자들이라고 해서 마음속에서까지 외면적 아름다움에 무관심했을 리는 없지만, 주자학이 지배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런 내심이 겉으로 표출되기는 쉽지 않았다.  

 주자의 영정. 경기도 강릉시 유천동 소재 회암영당에 보관되어 있다.
 주자의 영정. 경기도 강릉시 유천동 소재 회암영당에 보관되어 있다.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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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 아름다움에 대한 유학자들의 과도한 치우침은 종종 임금을 압박하는 도구로까지 활용될 정도였다. 이것은 왕권과 신권의 대결에서 신하들이 임금을 압박하는 좋은 무기로 사용되었다. 중종 12년(1517) 8월 8일 아침에 임금과 신하의 학문 토론장인 경연(經筵) 자리에서 조광조가 중종에게 훈계하는 장면에서 그런 분위기를 포착할 수 있다. <중종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임금께서 신하들을 대하실 때에는 당연히 똑바르고 엄숙하시겠지만, 깊은 궁 안에서 한가히 계실 때에는 이런 마음이 조금 해이해질 것입니다. 잠시도 해이하지 않고 우뚝하고 단정히 앉으며 (벽에) 기대어 앉지 않으시면, 간사한 생각이 들지 않아서 말과 행동이 한결같이 똑바르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 경연에서 강의할 때에 책 읽기를 힘들어 하시던데, 이는 아마도 깊은 궁 안에서 마음의 경(敬)을 미진하게 하셨기에 그러셨을 겁니다."

이 코멘트를 압축하면 '혼자 계실 때에도 딴 생각 하지 마시라! 벽에 기대어 앉지도 마시라! 며칠 전에 책 읽기를 힘들어하시던데, 요즘 마음 수양을 게을리 해서 그러시는 게 아닌가?'가 된다. 불경스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까지 조광조가 임금을 상대로 가혹한 훈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입만 열면 내면적 아름다움을 과도하게 운운하는 사회풍토가 존재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면적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내세워 임금을 압박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임금의 정책까지 좌절시키는 선비들의 풍조를 효종 10년(1659)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죽기 2개월 전인 그 해 3월 11일, 효종은 송시열과 가진 비밀독대 자리에서, 자신의 중앙군 확충계획에 대한 기득권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내가 중앙군을 확충하려는 것은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청나라를 상대로 북벌을 하기 위해서"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송시열의 글을 모은 <송서습유> '악대설화' 편에 따르면, 효종의 간청에 대한 송시열의 반응은 "북벌? 좋죠! 하지만, 마음공부나 열심히 하시죠!"로 압축된다. 전체적인 대화의 맥락을 놓고 볼 때에, 이 말은 '당신의 중앙군 확충계획에는 북벌이 아니라 왕권강화라는 욕심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으니, 당신 마음이나 잘 닦으시오'라는 뜻이었다. 내면적 아름다움을 '겸비'하라는 공자의 메시지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정치논리로까지 변용된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송시열 영정.
 송시열 영정.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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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적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극단적으로 칭송하고 이를 정치논리로까지 악용하는 분위기 속에서 꽃미남 열풍이 형성될 여지는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꽃미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도 결코 아니다. 사회 분위기 때문에 공공연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해도, 선비들을 포함해서 많은 백성들이 꽃미남에 대한 높은 관심을 표출하곤 했던 것이다.

성균관의 제도와 문화에 관해 220수의 시를 남긴 윤기의 시에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윤기의 시 중 '장의(掌議)가 향석교에서'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에 따르면, 밖에 나갔다가 성균관으로 돌아오는 장의 즉 학생회장를 맞이할 때에 "용모가 아름답고 복장이 깨끗한" 칠팔 명의 어린 하인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성균관 의식에서도 미소년들이 특별히 동원되었던 것이다. 꽃미남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아예 없었다면, 이런 문화가 생겼을 리 없다. 

제22대 주상('왕'의 공식 명칭)인 정조의 등극에 결정적 역할을 한 홍국영 역시 '꽃미남'이라는 이유로 출세를 한 인물이다. 그가 제21대 주상인 영조 때부터 두각을 보인 데에는 외모가 중요한 작용을 했다.

영조 48년(1772) 9월 21일자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과거합격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시력이 나쁜 영조가 승지(비서)에게 "(홍국영의) 용모가 어떠하냐?"고 묻자 승지는 "매우 준수합니다"라고 답했다. 영조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그가 사람을 볼 때에 얼굴 생김새를 중시했기 때문이라는 점은, 영조의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조가 홍국영을 총애한 이유를 두고, 혜경궁은 "동궁(세자, '정조' 지칭)과 나이가 비슷하고 얼굴도 예쁘고 기지가 있고 민첩"하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대표적 실학자인 박지원이 남긴 중국 여행기인 <열하일기>를 읽다 보면, 그가 꽃미남에 대해 보통 이상의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청나라의 어느 골동품 가게에 가봤더니 동업자 다섯 명이 "모두들 젊고 아름다웠다"고 한 대목도 있고, 중국인과 필담을 하는 중에 "미소년 하나가 들어와 찻잔을 받들어 (내게) 권했다"고 한 대목 등등도 있다. 박지원이 남자를 관찰할 때에 미모를 중요한 요소로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속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박지원이 실학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솔직하게 글을 썼을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열하일기> 속에서 박지원은 기존 가치관과의 충돌이 예상되는 대목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변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런데 꽃미남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는 대목에서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박지원은 꽃미남을 선호하는 자신의 모습이 기존의 가치관에 크게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음을 알 수 있다.

<한중록> 곳곳에서 자기 집안뿐만 아니라 영조와 사도세자의 체면을 유별나게 옹호한 혜경궁 홍씨도 '영조가 홍국영의 예쁜 얼굴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꽃미남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는 일이 그렇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박지원이 꽃미남에 대한 관심을 솔직하게 표출한 것은 그가 실학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은 사례들로부터, 외면의 중요성을 극단적으로 과소평가한 주자학적 풍토 속에서도 조선시대 사람들이 꽃미남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표출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나 과거의 대리국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조선시대에도 남자의 외모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존재했던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건 간에, 일상생활 중에서 부딪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그다지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한두 번의 만남으로 상대방에 대한 평가를 끝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상대방의 외모를 일차적 판단기준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은 데에는 그런 요인이 중요하게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외모지상주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인간사회의 화두로 남게 될 가능성이 높다.

모든 성인군자들이 다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이와 관련하여 공자의 메시지를 한번쯤 참고하는 것도 바람직하리라 생각한다. 공자는 '내면만 추구하고 외면을 경시하는 것은 촌스러운 일인 반면에, 외면만 추구하고 내면을 경시하는 것은 성의가 부족한 것'이라면서, '양쪽의 조화를 이루어야만 진정한 군자 즉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내면과 외면의 균형을 추구하는 사회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아는 사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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