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작심했다. 글쓰기 아마추어들이 작정하고 덤볐다. <오마이스쿨> '세상과 소통하는 생활․취재글쓰기(광주)'를 듣는 수강생들이 '지리산 둘레길' 취재에 나섰다. 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00km를 걷는 도보길로, 현재는 남원시 주천에서 산청군 수철까지 70여km가 열려있다. 개통된 지 이제 갓 3년 됐지만, 올레길과 더불어 전국에 걷기 열풍을 주도하고 있다. 둘레길 기획 제 1부는 시범구간으로 지정돼 둘레길이 생긴 이래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매동마을에 돋보기를 들이댔고 2부에서는 매동~금계구간을 다뤘다.... 기자 주

둘레길 막걸리 취재 기행을 나섰다. 혼자 막걸리 마셔가며 인터뷰와 사진을 찍어야 한다면 기절초풍하고 뜯어 말렸을 우리 남편한테 '거짓뿌렁'까지 쳤다. 지리산 둘레길 초입으로 들어서니 비가 내린 뒤 끝이라 하얀 고추 꽃들이 고랑마다 수북수북한데, 쬐끄만 들깻 모들마저 우르르르 소풍 나온 학생들처럼 줄지어 서 있다.

농사꾼 아지메 근성이 발동해 "워메 고추 줄도 쳐야 되고 들깻 모도 시집보내야 되는디 워쪈다냐"라고 혼잣말로 '툭' 내던졌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40대 후반의 딸 넷을 둔 아줌마가 되는 동안 혼자만의 걷기 여행은 꿈도 못 꾸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옛날 고생한 이야그? 다 잊어부러야 살제"

금방 듣어온 돌미나리 먹기도 전에 막걸리 병은 비어갑니다. 국물이 끝내줘요
▲ 돌미나리 듬뿍 산채라면과 막걸리 금방 듣어온 돌미나리 먹기도 전에 막걸리 병은 비어갑니다. 국물이 끝내줘요
ⓒ 황호숙

관련사진보기


밤꽃 냄새가 산도둑처럼 고개를 지키다 화악 보쌈해 주길 기다리는 마음 가득 뚤레뚤레 걸어가는 길, 신발도 벗어 던진 체 둥당덩 둥당덩 타령도 불러 제껴본다.

"어휴 혼자 오셨어요, 부럽습니다."

나그네의 칭찬에 '낄낄낄' 웃어 불다가 길을 헤매버렸다. 실상사 작은 학교에서 밑엣길로 죽어라 내뺐더니 하황 마을인데 몸은 온통 땀에 젖어버렸다. 저 꼭대기 길을 되돌아 가야 한다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이럴 때 노오란 막걸리 주전자 한 통에 김치 '쫘악' 찢어 한 입에 넣으면 그만일 텐데.

천왕봉이 보일 듯 말 듯 젖 물린 아낙의 젖가슴 마냥 언덕엔 온통 고사리가 무리지어 피었다. 시원하게 흘러내린 약숫물에 손을 씻자니 대나무 빗자루를 만들려던 아저씨 왈.

"혼자 왔능가 봐요, 잉! 우리 엄니는 지금 고사리 끊으러 갔는데 저기서 손부터 씻고 씨원한 막걸리부터 드실라요."
"순창에서 막걸리 취재하러 왔다가 길을 헤맸더니 텁텁한 막걸리가 땡기는데 항꾼에 마셔 주시면 맛나겠는데요."

아저씨는 말 끝나자마자 득달같이 내오신다. 앗따! 막걸리 한 병에 통통한 깨들과 볶아진 고사리나물, 빨갛게 익어 버린 맛 폴폴 나는 총각김치, 풋풋한 고추와 된장, 묵은 지 볶은 것이 나오는데 첫 느낌부터 알싸하다. 새벽녘부터 모심다 말고 논두렁에 앉아서 막걸리 마시며 '껄껄껄' 웃어 제끼는 느낌으로 홀짝이며 꼬장꼬장한 척 물어봤다.

"막걸리 한 병에 이렇게 퍼주면 남는 게 있나요?"
"우리 어매가 옛날에 해묵던 식으로 반찬을 해농게 먹어 본 젊은 사람들마다 맛나다고 쬐까만 싸달라고 하는디도 인정상 마구 퍼줘요. 기냥 농사짓는 것 되파는 수준이라 아직까정 돈벌이는 안될 꺼예요, 울 엄니 맘이지라."
"말하다보니 쬐까 서울 냄새가 나는데 토박이가 맞아요?"
"하하! 막걸리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어제 날짜(7월 1일)로 귀농했어요. 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만 갔다 오면 산태미로 자갈 가져다가 붓던 추억이 있어선지 애정이 가는 곳이죠. 이 산골짝에 사는 다섯 집에서 억척으로 가꾼 곳인데 저어기 저수지도 사람 손으로 만들었어요."

막판에 고사리 끊고 돌미나리도 캐갖고 온 올해 일흔 다섯 살인 '인월떽' 김맹순씨가 수줍게 웃으며 들어섰다. "사진 쬐까 찍자"고 하니까 "못 생겨서 안 찍는다"고 손사래 몇 번 치다가 웃어 버렸다.

막걸리는 부딫혀야 맛나제.
▲ 둘레길에서 친구 만들다, 막걸리는 부딫혀야 맛나제.
ⓒ 황호숙

관련사진보기


인월떽이 들어왔다.사랑스러운 웃음에 지리산이 맛있어진다.
▲ 고사리를 끓고 수줍게 웃는 인월떽 인월떽이 들어왔다.사랑스러운 웃음에 지리산이 맛있어진다.
ⓒ 황호숙

관련사진보기


"무슨 농사 지으셔서 자식들 키우셨길래 얼굴이 고우신 거예요. 옛날엔 총각들이 따라다녔겠어요."
"여덟 마지기 농사에 고사리 밭도 있제. 고추랑 벌도 키우제. 두릅도 있어서 고상 엄청 했어. 옛날 고생한 이야그를 해 달라구야, 어떻게 말로 다하누, 다 잊어부러야 살제, 내가 저 아들을 밭 가상에다가 눕혀놓고 콩밭을 매는데 누런 구렁이가 고 옆에서 낼름낼름 거리는겨. 워메. 암 것도 안 보이더라구. 그 순간이 제일로 끔찍혔지. 나가 기쁠 때는 이 산길로 아이들이 지나감시롱 '할머니 안녕하세요'하면 '아이구 우리 강아지들 이쁜그' 할 때가 제일로 좋아."

정은 늙지도 않는가 보다. 지리산 둘레길 할머니 정이라면 더더욱 익어간다. 산채라면에 돌미나리 넣어주세요, 오이 많이 심으세요, 고구마 먹으러 올게요. 식혜 맛이 끝내줘요 하면서 등산객들이 메뉴도 만들고 자기들끼리 막걸리 동무도 만든다. 하다 보니 단골도 있단다.

마침 창원과 청주서 왔다가 둘레길 친구가 된 사람들이 술집으로 들어왔다. 싸 가지고 온 수박과 감자도 스스럼없이 내놓고 막걸리를 시키더니 역시나 막걸리는 부딪혀야 맛있다며 산사람답게 '껄껄껄' 건배한다. 정겹다. 덕분에 산채라면에 막걸리 한두 잔 더하고 다랭이 쉼터를 향하여 비틀비틀 내려오다 소낙비에 화들짝 놀랐다.

"그냥 막 퍼줘야 맴이 편하지"

막걸리 먹자고 꼬시는 어메들한테 사진 찍게 해주면 이라는 단서를 붙였더니 하하하 웃으시다가도 표정 뚝!
▲ 이런게 러브샸이여,어져 폼나 막걸리 먹자고 꼬시는 어메들한테 사진 찍게 해주면 이라는 단서를 붙였더니 하하하 웃으시다가도 표정 뚝!
ⓒ 황호숙

관련사진보기


꼬부라진 다랭이 논두렁에서 각설이가 튀어나와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에헤" 걸판지게 한가락을 불러 제낄 것 같은 곳에 평상이 있다.

"날씨가 눌러 부러, 푹푹 찌구만, 얼렁 식혜부터 먹어봐. 우리덜은 애기 때부터 언니 동상 사이여. 울 언니가 솔 나무 밑에서 함박에다 꿀을 팔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이 죽은 서방 살아오듯 반가워하는 겨. 배고프고 힘 등게 '어메, 컬컬한디 막걸리나 한잔 주소' 막걸리가 없다니께 힘이 쫙 빠져버링가벼. 고렇게 땀 흘린 사람들 보기가 영 껄쩍시러 불고 미안해 불드만. 언니네 딸네미는 죽어라고 막걸리 장사를 하지 말래는데 지리산 걸어가는 나그네들 미안시러바서 제일 먼저 시작했당게."

다랭이 쉼터 주방장 송복순(69)씨가 일장 설명을 늘어놓았다. 사장인 김순님(77)씨는 옆에서 얌전하다.

"아니, 사장 엄니는 암말도 안 하는디, 어째서 주방장 목소리가 더 쎄다요? 우렁차갖고 지리산 대변인 하셔도 되겠네요. 뭔 말씀을 고로코롬 잘하신대요."
"우린 찰떡 궁합이여, 주방장이 손님맞이는 다 허니께 동상 힘이 더 쎈게 당연하제. 울 동상이 20년 넘게 장사를 해서 아들 딸 끝내주는 학교 보내고 취직 시켜 놓을 정도로 엄청 똑똑혀부러. 여자들도 똑똑해야 혀잖여. 내는 이날 평생 장사는 한 번도 안해봐서 막걸리 파는 게 못 쓰는 걸로 안 숙맥이잖여. 기냥 막 퍼주는 게 장사 비결이여. 장에 가서 사오는 거라곤 소금과 콩나물뿐잉게 우리덜이 생산한 것 밖에 없어. 그랑게 막 퍼줘도 괜찮여, 퍼줘야 맴이 편하지, 안 퍼주면 똥 싸고 밑 안 닦응것 같이 껄적찌근혀."

"막걸리 취재 나왔는디요, 떠~억 하니 제일 맛난 걸로 상 한 번 챙겨주세요. 윗집에서 막걸리 먹어가지고 여기선 식혜만 먹어야겠어요. 죄송해요."
"워메! 우리는 기자라고 달리 주지 않아. 산채비빔밥, 비빔국수, 잔치국수, 도토리묵, 울덜이 먹어도 맛있는 파전, 부침개, 막걸리, 단술, 식혜 글구 달걀도 있어. 돈 들어가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맛있다고 하면 재미나서라도 더 해줘 뿌러. 그만 하세요 할 때까지 퍼주제, 진짜루 내 자식들 생각 혀서 퍼주는 재미로 감자고 뭐고 통째로 삶아줘 버리지. 헤헤헤 사람이 오는게 오지고 방가봐서."

김순임씨와 송복순씨는 서로 말을 주거니받거니 했다. 김순임씨에 이어 이번엔 송복순씨가 나섰다.

"근데 자네는 영축없는 농사꾼이지, 기자처럼은 안 생겼구만. 기자라는 썩을 것들이 사진을 천 번은 찍어간 것 같은데 한번도 안 갖다 줌시롱 뭣 하러 찍었쌌나 몰라. 솔직히 기자 아니제. 어쪄 같은 전라도 우리 딸 같응게 말 놓아야 쓰겄는데 괜찮제."
"하먼이라. 지도 순창 땅에서 홀시아버지 모시고 20년 넘게 살았어요. 재작년에 돌아가셨구요. 농사짓느라 시꺼멓게 타 버린거제. 이래뵈도 속살 뽀얀 서울 떡이에요. 딸만 넷인데, 저 안 닮아서 디지게 이뻐 부러요. 토종 총각한테 반해 갖고 시집옴서 친정엄마 속 무지 태웠거든요."
"아이고 잘났다. 홀시아버지 거천하기가 힘들었을텐데 애썼다. 우리가 다 행복하고 기쁘다. 언제 딸들 다 데리고 지리산 온나, 맛난 것 몽씬 해줄게. 그나저나 아야. 딸 삼았응게 까짓것 우리 셋이서 막걸리 딱 한 잔씩만 하고 가자. 잉. 대신 딴 데 가서는 술 먹지 말고 가그라, 저어기 거북이등재 가기도 전에 취해 뿔겄다. 흐흐흐 그려도 맛나제. 이 맛 땜시 살어야."

"근데 두 분의 인생에서 행복했을 때와 슬펐을 때는요?"
"아랫동네서 태어나서 윗동네로 시집와 갖고 요로코롬 썩어버링게 원통방통혀 버려. 내가 중학교만 댕겼어도 똑 부라지게 대통령 해 먹었을낀데. 요새 여자들은 행복한겨, 너처럼 기자랍시고 혼자 지리산 걷는다고 할수도 있고 말여. 긍께로 냄편한테도 잘함시롱 베풀면서 살아야 혀잉. 맴 변하지 말고 꼭 놀러 오니라. 허트루 듣지 말고 한번 인생 재미지게 살어라."

즐거운 어매들 막걸리 꼬임에 넘어가서 흐드러지는 산꽃들 냄새에 취해 흥얼흥얼 고개를 넘어갔다.

"노래 부르면 파전도 해주고 감자전도 해준당께"

상황마을 쉼터 아짐씨들. 노래부르면 파전도 주고 감자전도 부쳐준다고 하등만..
▲ 아양 떨어야 혀, 아녀 이 나이에 내가 왜 그려 하고 토론하셨단다. 상황마을 쉼터 아짐씨들. 노래부르면 파전도 주고 감자전도 부쳐준다고 하등만..
ⓒ 황호숙

관련사진보기


상황마을 쉼터에 이르러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포장마차 안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오다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나도 알싸하게 취했는데 취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돌아가야 되나 싶었다. 아녀. 비록 연습이어도 기자 근성이라는 게 있지. 부딪혀 보자하고 들어갔더니 주인 이순임씨를 비롯해 아줌마 세 분이서 도란도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어! 바깥에서 들어봉게 꼭 싸우는 소리 같던데요. 뭔 조화 속이예요."
"50대 넘어가서 부부싸움을 하다보면 마지막에는 여자가 져주는 척 하라고 하는데 왜 꼭 그래야 되는겨. 아양을 떨어야 하느냐, 이 나이에는 당당해야 되는 것 아니냐 갖고 이야기 좀 했어. 술 한 잔 들어가서 소리가 커진거구. 하하하 밖에서 쫄았나 보네요. 어찌까."

누구랄 것도 없이 묻자 한 아줌마가 말을 받았다.

"여기 오는 동안 본 포장마차들 보다 많은 식품들이 있네요. 언제부터 장사하셨어요."
"꿀을 많이 하다 보니까 한번 좌판 깔고 팔기 시작했어요. 지나다니는 사람들 발길이 하도 많길래 다라이에 펼쳤지요. 처음엔 시원한 물부터 달라고 하더니, 배고프다고 막걸리와 컵라면도 갖다 놓으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다 보니까 이것저것 갖다 놓고 팔라고 요구하는 게 많아지는 거예요. 하나 둘 팔다 보니까 도토리묵, 파전 오미자차, 엑기스, 고추장, 여기서 나는 약초랑 나물들까지 팔다 보니까 텁텁시럽게 큰 포장마차가 되어 버렸어요."

"얼굴이 꽃처럼 피어나신 걸 보니 파는 재미가 쏠쏠하신가 봐요. 토박이는 아닌것 같구요."
"계속 농사지으면서 살다가 작년부터 이렇게 시작했던 거지요. 신랑은 본토백이 상황마을 출신이구요. 하하 50대인 나보고 이쁘다니 기분은 좋네요. 아마도 공기 좋고 산세 좋은 이 마을로 시집와서 살다보니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럴 꺼예요. 음 막걸리를 시키면 집에서 따 온 상추, 김치, 된장과 고추 산나물을 즉석에서 해주지요."

알싸하게 취하셨던 아줌마는 자꾸자꾸 노래 부르면 파전도 해주고 감자전도 해준다고 말걸리 한 잔 하라고 꼬셨다. 에라! 황진이 노래 한번 뽑아봐?

"개나리도 피고 진달래도 피고 뻐꾸기가 울 텐데 그리워서 어떻게 살까."

어째 찌그러진 막걸리 주전자처럼 흔들리는 취재가 돼 가고 있다. 인연 따라 흔들리는 길, 깐닥깐닥 걷다보면 막걸리 취기도 슬금슬금 없어진다는 말에 그만 속아 넘어갔다. 워메, 푼수떼기 아줌마 막걸리 유혹에 또 속아 넘어 갔구나. 윗집 어메들이 고로코롬 말렸구만, 막걸리 취재는 물 건너가 버렸네.

"간판, 물레방아 모두 손님들이 꾸며줬어요"

너무 예쁘게 차려진 등구령 쉼터의 표지판과 물레방아.얼름송송듸운 구절초 식혜가 너무 먹고싶다.
▲ 등구령쉼터와 주인장 너무 예쁘게 차려진 등구령 쉼터의 표지판과 물레방아.얼름송송듸운 구절초 식혜가 너무 먹고싶다.
ⓒ 황호숙

관련사진보기


뜨거운 한낮에 먹는 술은 부모도 몰라본다고 했다. 터벅터벅 걷는데 쓰러져 버릴 것 같다. 아무래도 '아줌마, 막걸리에 취해 둘레길에서 쓰러지다'고 기사를 쓸 것 같다. 등구령 쉼터의 팻말을 보자 와락 반가움과 설움이 몰려 왔다. 흥보가 가락인 듯 슬금슬금 톱질소리가 들려온다.

'나홀로 다방'이라고 이쁘게 쓰여 있는 화장실을 가다보니 하우스 안을 힐끗 보았다. 비싼 물건들이라기보다 손수 솔방울과 나무들로 꾸며놓은 것이라 아기자기 꾸며진 풍경들에서 주인장의 심성이 느껴진다. 잡초를 메고있던 주인장 송계숙(49)씨가 반갑게 맞아준다. '나홀로 다방'에서 마음을 비웠더니 소박한 쟁반에 얼음 동동 띄운 구절초 식혜가 수줍은 신부처럼 연지빛으로 맞이한다.

"어떻게 이렇게 꾸며 놓을 생각을 하셨어요. 보기만 해도 정감이 가네요."
"초기에 지리산 길을 오르내리시던 분들이 제일 급하게 찾은 게 화장실이었어요. 여기서 농사짓다가 산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이런 저런 필요한 부분을 챙겨주다 보니까 쉼터가 만들어졌어요. 추운 겨울날 군산에서 오셨는데 세상에 햇반을 데우지도 않고 드시려고 하길래 집에 있던 따뜻한 밥하고 바꿔 드렸더니 이렇게 이쁜 메뉴판을 손수 써 주셨어요. 물레방아도 손님들에게 선물로 받았는데 참 재미있어 하세요. 서울 손님께서는 나무에 컵을 매다는 장식을 손수 해주셨어요."

"소중한 인연들을 보니 정이 참 많으신가 봐요?"
"한번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했더니 손님중에 한분이 진맥을 하시고 침을 놓아주시더라구요. 대전에 사시는 고마운 한의원 원장님이셨지요. 세월 흐른 어느 날 4명의 친구분 들하고 다시 지리산 둘레길에 오시면서 보약을 지어 오셨어요. 세상에, 얼마나 가슴 시리게 고마웁던지요. 여기서 채집한 산나물을 보냈더니 또 한 박스 보내주셨어요. 그런데도 친구 분들에게는 제 자랑을 엄청 치셨다고 나중에 들었어요. 간이 안 좋은 젊은 내외분이 봄에 왔었다가 이 골짝에 돌미나리가 많다고 했더니 여름에 베러 온다고 했는데 아직 안 오셔서 한편으로는 혹여 악화됐을까 걱정도 되고 기다려지네요."

"제일 맛있는 음식을 판소리가락 읊듯 불러 보세요. 얼굴 빨개서 더는 못 먹는 저 말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요."
"구절초로 만든 야생 식혜를 다섯 말씩 할 때도 있을 만큼 제일 유명해요. 막걸리 안주로는 풋고추와 상추, 야채, 된장, 김치, 산나물 두어 가지와 고춧잎 취나물 비비추 쑥부쟁이 나물 등이 그때 그때 들어가요. 우리밀 수제비와 우리밀로 만든 전이 맛있어요, 고랭지 감자중에 빨간 감자는 다이어트에 좋습니다. 전을 해 먹으면 몸에도 좋구요. 제가 논산 큰애기인데 지리산 골짝으로 시집와서 직접 청국장 뛰우고 고랭지 배추로 절임해서 김치를 담고 있는데 먹어 보신 분들은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또 찾더라구요."

구절초 식혜 값을 드리려 주섬주섬 챙기는데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치신다.

"하도 지치신 것 같아 제가 미리 얼음 송송 띄워 드린 거예요. 다음에 오시면 꼭 막걸리 드시고 가세요."

흐흐 기자 같지 않다고 하셨던 어매들도 안쓰럽다고 돈 안 받으셨는데. 죄송스런 마음이 든다.

"말 주변도 없어 보태지도 못하고 정성만"

부산에서 지리산으로 시집와서 요로코롬 이쁜 딸도 낳고 민박도 하고,빠알간 오미자 쥬스처럼 지리산도 수줍어 한다.
▲ 지리산을 뒤흔들 미소 부산에서 지리산으로 시집와서 요로코롬 이쁜 딸도 낳고 민박도 하고,빠알간 오미자 쥬스처럼 지리산도 수줍어 한다.
ⓒ 황호숙

관련사진보기


다시 길을 나서 등구재 황토방민박집에 이르렀다. 아니 이 산중에 어인 처녀들일까. 민박손님인가 살펴보니 딸들이었다. 여름 산나리꽃은 홀로 피어도 환하게 산을 물들이는데 팔 걷어붙이고 탁자 청소를 하는 딸들은 지리산을 물들일 만큼 이쁘다. 시원한 오미자차를 갖다 주시며 잠깐 쉬는 엄마를 부르는데 엉거주춤 미안했다. 시인 서정주가 읊은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의 그 누님같다. 잠깐 휴식을 취하는데 헬렐레하게 취한 나그네가 깨운 것 같아 여영 미안스럽다.

"농사일만 하셨을 소박함이 보이네요. 장사는 안 해보셨을 것 같아요."
"거짓말은 하라 캐도 못합니다. 말 주변은 더더욱 없어서 보태지도 빼지도 못합니다. 농사일 하다가 사람들이 막 지나 다니니까 얼렁뚱땅 민박집을 하게 됐어요. 올해 새롭게 집을 짓고 평상도 마련한 것인데 이쁘신가요. 3개월 밖에 안됐는데도 농사 짓는 것보다 훨씬 힘듭니다."

"둘레길 사람들은 모두 음식을 잘 하시나 봐요. 전라도 특유의 앵기는 맛이 일품이네요."
"입에 발린 소린가는 모르겠는데 오셨다 가신 분들은 꼭 다음에도 또 오세요. 머우대가 나는 계절에는 머우대 껍질을 벗기고 들깨를 갈아서 나물이나 국을 해놓으면 너무들 좋아하세요. 맛있게 드시면 보는 내가 더 행복하죠. 집에서 직접 담근 된장을 쓰는데 자꾸 자꾸 많이 담게 된다. 왜냐면 된장과 고추장을 사려 하시는 분들이 많아지거든요."

"억양이 전라도 분 같지 않으세요. 어쪄다 지리산 골짝으로 시집오신 거예요."
"후후, 부산에서 시집 왔어요. 중매로 만났는데 구불구불 산길 따라 오는데 새색시가 얼마나 막막하고 갑갑혀고 심란했는지 모를 꺼예요. 웃음이 나오는 것은 지금 부산 가서 살라고 하면 겁나서 못 살 것 같아요. 내가 푸지게 농사져서 맘대로 먹고 퍼주고 갈라도 먹고 야무지게 잘 살고 있는데요. 아이고 제발 가서 살래도 못 살겄어요. 이젠 내 고향이 여기고 묻힐 자리도 여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둘레길 자니는 사람들에게 '여기 오면 무엇이 좋다'고 자랑 좀 치실래요?"
"오시면 무조건 다 좋다고들 하세요. 직접 담근 오미자차도 좋고, 요기 밑 하우스에서 따온 상추랑 아욱이랑 고추라이 입맛을 돌려 드릴 꺼예요. 제가 산채 정식만큼은 책임지고 해 줄께요. 깔끔한 된장국과 열무김치, 방금 딴 상추랑 고추 양파에 지리산 바람으로 묵힌 정성을 가득 담아 해 드려요. 자신 있어요. 많이들 놀러오세요."

이 안주들 몽땅 싸 가지고 등구재 고개에서 맛난 이야기 풀어놓는 친구들과 한 잔 하고 싶었다. 함박눈 쏟아져 오도 가도 못하게 막혀 버렸는데도 웃음이 실실 나오는 지리산 둘레길 한복판에서 사랑타령 한 소절을 불러 제끼며 통 막걸리 가득한 사랑도 해보고 싶다.

"사-사랑을 할려면 요-요렇게 한단다. 요 내 사랑 변치말자 굳게굳게 다진 사랑."

허나 어쩔꺼나. 아줌마는 막걸리에 취해도 지리산은 취하지도 않고 고개만 옆으로 돌려 웃어분다. 가자미눈으로 째려보고 둥글둥글 걸어 창원마을에 갔다. 막걸리집은 텅 비어 있었다. 지리산이랑 막걸리 마시러 나가버린 모양이다. 이제 매동에서 금계까지의 취재구간이 끝났다. 서쪽 하늘이 붉어질 무렵, 술기운이 오를 대로 올랐는데도 빈 막걸리집을 보며 욕심은 끝이 없다.   

'나랑 항꾼에 먹지.'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지리산도 막걸리 먹으러 나갔다. 에이 나랑 항꾼에 먹지
▲ 창원마을 갈림길 주막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지리산도 막걸리 먹으러 나갔다. 에이 나랑 항꾼에 먹지
ⓒ 황호숙

관련사진보기



태그:#지리산, #둘레길, #막걸리, #금계, #매동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