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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일본에 가기 며칠 전, 어머니께선 농담처럼 "나도 데려가" 하셨다. 뜻한 바 있어 가는 길이지만 내심 그 흔한 '효도관광' 한번 못 시켜드렸다 싶어 맘이 불편하던 차에 뭐 뀐 놈이 화낸다고 되레 짜증을 부렸다. "나 놀러 가는 거 아니거든!"

그러고 떠난 게 실은 무척 후회스러웠다. 오사카 가는 배에서 같은 객실을 쓰게 된 어머니 또래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도, 한껏 들떠 술마시고 노래하는 중년의 단체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괜스레 기분이 언짢은 게, 실은 환갑 가까운 부모님께 변변히 해드린 것 없는 자책감에서 오는 송구스러움이었다. 그래서 귀국하기 무섭게 이번 여행 준비에 착수했다.

간사이공항에 내려 전철역에 들어왔을 때 우리나라 각설이와 비슷한 분장을 한 남녀가 익살스런 몸짓과 표정으로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간사이공항에 내려 전철역에 들어왔을 때 우리나라 각설이와 비슷한 분장을 한 남녀가 익살스런 몸짓과 표정으로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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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일단 어머니를 위해선 내 여행방식에 많은 변화가 필요했다. 닷새간 어머니의 체력을 고려하며 최대한 알찬 여정을 계획할 것. 그러기 위해선 혼자 다닐 때처럼 무조건 '싸고 친환경적인' 방식만을 고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동수단은 배 대신 비행기로, 현지에선 최저가 게스트하우스 대신 깔끔한 호텔을, 배만 채우면 되는 음식에서 음식다운 음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예약은 필수!

어머니는 출발일이 다가올 수록 설레는 눈치였다. "옆동네 가는데 준비할 게 있겠어?" 하면서도 간간히 일본 다녀온 친구들이 알려주더라 하며 말을 전하기도 하고 가이드북을 뒤적이기도 하셨다. 무엇보다 본인보다 서너 배 바쁜 당신 일정을 앞당겨 소화하느라 며칠밤을 새다시피 했다. 그 결과 떠나는 당일 비행기가 이륙도 하기 전에 고개를 떨구셨다. 



첫날


출국 전 공항에서 가이드북을 읽고 있는 어머니
 출국 전 공항에서 가이드북을 읽고 있는 어머니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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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모녀여행이 시작됐다. 숙소에 도착해 일단 어머니를 쉬시게 한 뒤 오후 늦게 외출을 했다. 첫 번째 안내한 곳은 오사카성. 신이마미야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모리노미야역으로 향했다.

지난 여행 땐 오로지 자전거만으로 이동해서 일본의 지하철 시스템을 경험하는 건 나 역시 처음이었다. 살짝 긴장이 됐지만 친절한 역무원의 도움으로 가이드로서 체면을 구기지 않을 수 있었다.     

어둠이 내린 오사카성. 밤에 보는 우치보리와 소톤보리 두 해자와 거석으로 쌓은 성벽은 낮과는 달리 사실적인 비장함 같은 게 느껴졌다. 반대로 조명에 휩싸인 오사카성은 세월의 흔적이 지워져 다소 시시하게 보였다.

성 주변에 군집한 벚나무들은 이미 꽃을 떨구고 무성한 녹색잎으로 옷을 바꿨다. 어머니는 "봄에 와도 참 좋겠네" 하시면서 길고 깊은 해자와 길 곳곳에 웅장하게 조성된 정원들을 보며 "대단하네" 감탄사를 연발하셨다.

이날 하늘엔 내 평생 본 것 중에 가장 크고 둥근 달이 떠 있었다. 그 달빛 아래서 어머니와 단 둘이 손을 잡고 걸었다.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오사카성 성벽의 축조방식도 상상해보고 폭정 아래 서민들 삶을 얘기하다 제법 진지한 정치 이야기도 나누고 달을 따라 걷다 등지고 뛰어봤다 하며 장난도 쳤다. 편안한 꿈같이 몽롱한 가운데 손 안에 어머니 체온만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겸허한 맘으로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둘째날

오늘 목적지는 교토다. 이번 여행을 결심케 한 결정적 장소라 하겠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으로 느껴질 만큼 도심 곳곳에 옛모습 그대로의 유적이 보존돼 있고, 무엇보다 불교신자인 어머니께서 관심을 가질 만한 일본 불교문화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해서다. 나는 한 주간 머물며 숨가쁘게 둘러봤던 이 곳을 단 하루 만에 안내하기 위해 일찌감치 '엑기스 관광' 루트를 계획했다.  

교토 가는 열차 안 풍경이 정겹다
 교토 가는 열차 안 풍경이 정겹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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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식사는 근처 시장 안에 있는 우동집에서 해결했다(지난 번 소개한 맛집. 어머니도 이 곳의 정갈함과 음식맛을 인정하셨다). 그리고 곧바로 지하철을 탔다. 교토의 '관광허브'에 이르려면 출발지인 도부츠엔마에역에서 키타하마역까지 가서 환승해 시치쵸역에 내려야 했다. 철도 안에선 제복을 입은 역무원이 일일이 표검사를 하고 앳되 뵈는 학생들이 드문드문 서 있는데 문득 대학 2학년 때 신촌역에서 비둘기호를 타고 엠티가던 때가 떠올랐다.   

시치쵸역에 도착해 밖으로 나오니 주변 지리가 익숙했다. 자전거로 너댓 번도 넘게 지나다닌 곳이었다. 길 건너 첫 번째로 향한 곳은 '산주산겐도', 1266년에 재건한 천태종 사찰로 본당 안에 3.4미터 높이의 천수관음좌상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 어른 키 만한 관음상 500구씩이 안치돼 있다. 입장료를 내야 하는 본당은 한 번 본 걸로 족하다 싶어 어머니만 들어가시게 했다. 잠시 후에 관람을 마치고 온 어머니가 일본인 스님께 한국돈을 주고 초를 사서 소원을 빌었다 하셨다. "인류평화와 가족건강" 내 기도와 정확히 일치했다.  

산주산겐도 앞에서
 산주산겐도 앞에서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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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곧바로 '미미즈카'로 향했다. 산주산겐도에서 길 건너 교토국립박물관을 따라 아랫길로 가서 첫 번째 모퉁이에서 우측으로 꺾어지면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가 나오고, 그 정면에 있는 놀이터 옆에 미미즈카 3층 석탑이 보인다. 미미즈카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의 지시 하에 일본군이 병사한 우리 조상들의 귀와 코를 잘라 매장한 무덤이다. 어머니는 무덤 앞에서 오래도록 머리숙여 절을 올리셨다. 

지난 여행 때 바로 이 곳에서 교코 아줌마를 만났다. 미미즈카를 보고 다소 격분한 내가 마침 근처에 있던 아줌마에게 다가가 "저게 뭔 줄 아냐(미미즈카를 가리키며)"고 따지듯 물었을 때 그녀가 대뜸 내 손을 잡으며 "I'm so sorry(정말 미안하다)"라며 사과했었다. 고운 미소에 만개한 자목련을 닮았던 교코 씨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우연은 일어나지 않았다. 

귀무덤 앞에서 오래도록 기도를 올리시던 어머니
 귀무덤 앞에서 오래도록 기도를 올리시던 어머니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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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즈카에서 나와 왼쪽 골목길을 따라 기요미즈데라로 향했다. 기요미즈데라로 가는 차완자카길에서 아기자기한 도자기 가게와 이색적인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주홍색 인왕문 앞에 도착했다.

본당인 기요미즈데라엔 입장료를 내고 어머니와 함께 들어갔다. 일본 조경의 섬세함과 웅장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오쿠노인의 풍광을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였다. 한눈에 펼쳐진 교토 시내를 배경으로 체격 좋은 외국인에게 부탁해 기념촬영도 했다. 

오쿠노인에서 나와 자연히 '신넨자카'와 '니넨자카'로 발길을 옮겼다. 내리막길 초입에서 차가운 슈크림이 가득 든 공갈빵 비슷한 걸 사먹었는데 이것이 내 입엔 참으로 맛있었다.점심식사는 '철학의 길'을 걷다 활짝 열린 목조대문 안에 정원이 곱게 가꿔진 음식점을 택했다.

혼자 다닐 땐 감히 쳐다보지도 않던 곳이지만 어머니와 있을 때 만큼은 이런 호사를 함께 누리기로 했다. 점심값으로 만 엔짜리 지폐를 천 엔으로 착각해 내는 아찔한 실수를 했지만 정직한 주인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다.

헤이안진자 신엔에서 어머니가 찍은 오리 가족
 헤이안진자 신엔에서 어머니가 찍은 오리 가족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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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끝내고 주인에게 부탁해 물병에 차(茶)를 채워 다시 출발. 오후 관광의 시작은 '지온인'이다. 지온인 역시 웅장한 불교사찰인데 어머니는 반나절 만에 절 구경에 신물이 난듯 "절은 이제 그만 보자" 하셨다. 교토에 와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무리 불심이 깊은들 교토 같은 도시에서 하루종일 사찰과 신사에 둘러싸여 있다보면 정말이지 지긋지긋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지온인은 겉만 보고 통과.

이어서 어여쁜 네네길을 지나 거대한 도리이가 있는 '헤이안진구'에 도착했다. 600엔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헤이안진구 내 신엔(정원)은 역시 어머니만 들어가시게 했다. 이미 한번 본 데다 입장료가 비싼 이유도 있었지만 더 걸을 기력이 없었다.

어머니만을 위한 가이드 역할에 충실하려다 보니 혼자 다닐 때보다 에너지 소모가 심했다. 구경을 마치고 온 어머니도 지친 표정으로 "이제 그만 갈까?" 하셨지만 이날 여정의 끝은 모래정원으로 유명한 '긴카쿠지'에서였다. 오후 5시까지만 입장을 허락하는 곳이라 부랴부랴 택시까지 타고 가서 구경했다. 

이렇게 해서 10시간여에 걸친 가열찬 교토 관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시간이 많으면 이런 무리한 여정을 감행할 이유가 없지만 어머니와 함께 있는 동안 되도록 많은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 욕심을 부렸다. 오늘 하루 여행에서만큼은 역시 우리 모녀가 찰떡궁합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내일은 혼슈에서 규슈로 대륙을 이동한다. 개인적으로 내 두 번째 일본여행의 목적이 이곳에 있다. 이제부턴 나도 초행길이므로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남은 여정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오늘은 이만 잠자리에 든다. 

<현지 정보>

모래정원으로 유명한 긴카쿠지(은각사). 킨카쿠지(금각사)와 혼동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모래정원으로 유명한 긴카쿠지(은각사). 킨카쿠지(금각사)와 혼동하는 사람이 종종 있다.
ⓒ 이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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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긴카쿠지와 킨카쿠지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말로 모래정원이 있는 긴카쿠지가 은각사이고, 화려한 금박으로 유명한 킨카쿠지가 금각사이다. 현지에서 길을 묻거나 찾아갈 때 긴카쿠지와 킨카쿠지를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덧붙이는 글 | 모녀여행, 남은 사흘간의 여정이 곧 이어집니다.



태그:#일본여행, #어머니, #교토관광, #간사이공항,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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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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