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거실 너머로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에 커튼이 너풀거리고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신문이 힘없이 날아간다. 베란다의 열린 문 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고, 뒤늦게 이를 발견한 여인이 문을 닫던 찰나에 넋을 잃은 듯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본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신작 <도쿄 소나타>는 그렇게 고요하고도 황망한 실내의 모습을 관조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미래는 과연 밝은가? 그 후 5년

그의 2003년 작품 <밝은 미래>는 영화에 등장하는 해파리와 오다기리 죠 만큼이나 형체 없이 자유로우며 수수께끼로 가득 찬 영화였다. 주인공 '니무라'는 현실보다는 꿈 쪽에 안착되어 있는 인물이었고 영화의 결정적인 행동과 사건에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해파리의 메타포 역시 불가해했다. 사실 제목 그 자체로서 지독한 역설이 될 수 있는 <밝은 미래>는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내러티브 영화라기보단 희미하고도 간절한 희망의 가능성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고, 또 그렇기에 느슨한 구성이 적절했다고 평할 수 있다.

영화 <밝은 미래>의 한 장면  

▲ 영화 <밝은 미래>의 한 장면   ⓒ 업링크


그에 비해 2008년 작품 <도쿄 소나타>는 조금 다른 성격의 영화다. 오프닝 장면에서 느낄 수 있다시피 영화는 일단 성실하다. 감정과 사건에 대해 <밝은 미래>가 '이해 못하면 말고' 식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면 <도쿄 소나타>는 친절하게 조근조근 설명해주는 편에 가깝다. <도쿄 소나타>는 <밝은 미래>에서 감독이 제시한 '미래는 과연 밝은가?'에 대한 의문의 연장선을 쥐고 있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서 두 영화는 이처럼 다르다. 카메라는 너무도 평범하고, 너무도 멀쩡하던(혹은 그렇게 보이고자 노력하던) 가족과 개인이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괴로울 정도로 담담히 직시하고 있다.

실직자가 된 아버지... 이젠 낯설지가 않아요

영화 <도쿄 소나타>의 한 장면  

▲ 영화 <도쿄 소나타>의 한 장면   ⓒ 스폰지


<도쿄 소나타>의 줄거리는 전형적이다. 실직을 숨기고 아침마다 출근하는 시늉을 하는 아버지, 열심히 식사 준비를 하지만 가족 모두에게 외면 받는 어머니, 패기 없는 맏아들, 그리고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하는 막내아들. 여기에서 방점은 '전형적'이라는 것에 있다. 새삼스럽게 다시 지적을 하자면, 이런 가족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낯선 모습이 아니다. 물론 90년대 전후로 사회 전반에 진행된 구조조정의 여파로 실직한 가장들의 웃을 수 없는 '가짜 출근' 소동은 당시엔 센세이션이었겠다만, 새로운 소재 찾기에 급급하던 영화, 드라마 등지에서 이를 남용(혹은 오용)하기 시작하면서 실업 대란은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되는 괴상한 현상이 만들어졌다.

그 결과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상투적'이라고 인식할 정도다. 영화에선 특정 형식이나 스타일과 같은 설정이 관습처럼 형성된 카테고리를 장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도쿄 소나타>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것이 '실직 가장 드라마'가 되었든 '가족 분규 소동극'이 되었든 실업난을 하나의 관습처럼 인식하는(사실 그것이 현실이긴 하다) 지금은 충분히 끔찍하다.

영화 속의 가족들은 저마다 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사키 집안의 아버지 류헤이의 투쟁은 주로 취직에 관한 것이다. 그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실직 당한다. 이 사실을 숨긴 채 취업알선센터와 무료급식을 배급해주는 공터를 전전하던 류헤이는 동창인 쿠로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 역시 실직자다. (이 영화에 의하면 도쿄는 실직자 천지다)

영화 <도쿄 소나타>의 한 장면  

▲ 영화 <도쿄 소나타>의 한 장면   ⓒ 스폰지


류헤이가 두려워하는 것은 실직 자체보다 그 사실을 가족들이 눈치 채는 것에 있다. 류헤이는 가부장적 남성의 전형이고 그런 그에게 권위는 필수 불가결하다. 가장을 가족 권력의 정점에 두고 다른 구성원들이 아래에서 내조하고 보좌하는 형태를 이상적으로 여기는 가부장적 남성들은 대개 상명하달의 위계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회사와 가족을 분간하지 못한다. 문제는 그러한 질서와 권위가 실직으로 말미암아 상실의 위기에 처해져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류헤이에겐 '회사원'이란 신분이야말로 권위의 근원이자 존재의 이유다. 때문에 류헤이의 투쟁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류헤이의 아내 메구미 역시 정체성을 놓고 시종 방황한다. 가부장 사회에서의 여성이 그렇듯 그녀 역시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삶 속으로 예속된다. 하지만 주부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녀의 노력은 무시당하기 일쑤다. 류헤이는 형식적으로 대화에 임하며 아들은 아예 대화에 관심이 없다. 타성에 젖어 아내와 어머니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가족들에게 있어 그녀는 소외된다. 쓰러진 메구미는 자신을 일으켜 달라고 손을 내밀지만 아무도 이에 응답하지 않는다.

사사키 가족의 장남 다카시는 현재 일본의 20대 청년을 대변해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사실 호주 출신의 작가 맥스 매닉스가 쓴 <도쿄 소나타>의 시나리오 원안에는 '다카시'란 인물이 없었다고 한다. 이 인물과 설정은 후에 각색을 맡은 구로사와 기요시가 만들었는데, 인물을 통해 던지는 물음은 <밝은 미래>와 이어져 있다. 누구의 탓이라고도 할 수 없이 패기와 미래를 잃어버린 젊은 세대는 실제의 사회에서 그렇듯이 영화 속에서도 유령처럼 묘사된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다카시는 문득 미군에 입대한다.

영화 <도쿄 소나타>의 한 장면  

▲ 영화 <도쿄 소나타>의 한 장면   ⓒ 스폰지


'미군 입대' 설정은 마찬가지로 감독이 창조한 가상의 픽션이다. 허나 감독은 "실제로 그렇게 입대가 쉬워진다면 많은 젊은이들이 자원할 것이라 생각한다"며 연출을 결정했다. 영화 속에선 미군 입대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청년들의 인터뷰가 뉴스 화면을 통해 언급되는데, 현재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한 일본 20대들의 보편적인 인식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구로사와 기요시는 말했다. "그들이 전쟁을 좋아해서가 아니다. 지금 일본의 닫혀 있는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라고.

켄지는 가족의 막내이면서도 가장 어른스러운 인물이다. 켄지의 투쟁은 곧 어른이 강요하는 억압에 대한 저항이다. 어른-남성들은 하나 같이 소통을 거부하고 일방적인 강요만 켄지를 비롯한 아이들에게 요구한다. 피아노 레슨을 둘러싼 켄지와 아버지 류헤이와의 대치가 극명한 사례다. 장남 다카시의 '실패'를 자유분방하게 키운 자신의 교육법에서 찾는 류헤이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켄지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주입하려 애쓴다. 때문에 그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켄지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켄지는 이에 정면으로 저항하고 아버지 역시 강경하게 맞선다. '대화와 소통'을 '권위의 상실'로 인식하는 어른-남성의 단면이다.

우리의 톱니바퀴는 어디부터 어긋난 걸까... 분열 끝에 얻은 희망

결론부터 말하자면 가족들의 팽팽한 투쟁은 결국 파탄으로 이어진다. 분명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갈등이 폭발하는 바로 이 순간이다. 그러나 <도쿄 소나타>가 파괴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파탄 이후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탄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인물은 엉뚱하게도 사사키 집안으로 들어온 강도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식칼로 위협하며 돈을 내놓으라는 강도를 연기한 배우는 다름 아닌 '야쿠쇼 코지'. <쉘 위 댄스>의 샐러리맨이 강도로 뒤바뀌었다는 점은 분명 의미심장하다. 생각과 행동의 앞뒤를 전혀 예측할 수 없이 엉뚱하고 '강도'로서는 너무도 어눌한 그의 존재는 테트리스처럼 정교하게 쌓인 영화의 이야기를 격렬하게 뒤흔든다.

영화 <도쿄 소나타>의 한 장면  

▲ 영화 <도쿄 소나타>의 한 장면   ⓒ 스폰지


우연의 우연을 거듭하여 메구미가 가족을 떠나 바다에 도착했을 때, 미친 듯이 거리를 헤매던 류헤이가 뺑소니를 당해 도로에 버려졌을 때, 다카시가 있는 미군이 전쟁에 투입됐을 때, 무임승차 도중 적발된 켄지가 지하 구치소에 수감될 때 관객은 아마 사사키 가족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모두 포기했을 것이다. 그 분열의 순간, 메구미와 류헤이는 애원한다. 어디부터 어긋난 걸까? 다시 시작하고 싶다― 과오와 몰이해로 점철되었던 과거를 인정한 시점부터의 미래는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한다. 가족은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다시 거실로 모인다. 그리고 밥을 먹는다. 이어지는 켄지의 피아노 연주회. 켄지는 드뷔시의 '월광'을 연주한다. 압도적인 연주가 끝나자 켄지는 부모님과 함께 교실을 빠져나가고, 사람들은 홀린 듯이 그들의 뒷모습을 좇는다. 가족이 머물고 있던 자리에 유난히 밝은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영화 <도쿄 소나타>의 한 장면  

▲ 영화 <도쿄 소나타>의 한 장면   ⓒ 스폰지


신호는 떨어졌다. 출발은 우리의 몫

감독은 결말을 통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풍비박산 직전의 가족이 우여곡절 끝에 화합하는 행복한 결말을 기대했던 관객은 여지없이 뒤통수를 맞는다. <도쿄 소나타>는 칼싸움에서 승리하고 노을이 지는 해변에서 키스를 나누는 선남선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 관한 영화다. 그런 까닭에 영화는 불편하다. 도피하고 싶었던 우리의 삶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미래는 과연 밝은가? 감독은 묻는다. 그리고 문제는 까발려졌다. 그에 대한 해결과 실천은 우리의 몫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도쿄 소나타>는 소년 무용수의 성공담 <빌리 엘리엇>보다는 사회와 집단에서 소외된 개인이 고민하고 좌절하는 과정에 주목하던 대만의 에드워드 양 작품과 일맥상통한다. 에드워드 양과 마찬가지로 구로사와 기요시 역시 '행복하고 완성된 결말'로 허황된 위로를 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영화와 현실의 경계는 무너지고 영화는 현실로 확장된다. 사사키 가족은 곧 우리 가족이자 사회의 모습이다. 그들은 아주 어렵게 길을 찾았다. 그런 의미에서 <도쿄 소나타>는 '가족 성장' 영화다. 우리는 어떤가? 사회는 무너지고 분열하고 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우두커니 고민하는 우리에게 감독은 전작과 더불어 말한다. 가라고. 신호는 오래 전에 떨어졌다. 출발은 우리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역사와 전통의 광주극장에서 현재 일본 인디필름 페스티벌을 진행하고 있다. <도쿄 소나타>를 포함한 영화가 7월 22일까지 상영한다고 하니 관심 있는 지역민은 찾아가도 좋을 듯하다. 참고로 광주극장은 단관으로 객석이 2층까지 있는 대형 극장이다.
도쿄 소나타 구로사와 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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