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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늦게 일어나 아침도 거르고 게으름을 피우는 토요일 아침. 컴퓨터를 켠 순간 확인한 비보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은 '아니겠지…'라는 것이었고 이어 든 생각은 '대통령까지 했던 분이 그럴 리가…'라는 것이었다. 이어 정신을 추스르고 나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참담한 심정'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도 얻었다. 

뉴스 밑에 달린 댓글들은 대부분 분노와 침통함이 뒤섞인 것들이다. 굳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가 아니라고 밝힌 사람들도 역시 참담한 심정을 내비치며 고인에게 애도를 표하고 있다. 공안 정국에 대한 기억은 잠시 잊은 듯 현 정부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을 쏟아내는 사람들도 많다. 

분노와 침통함 뒤에 숨은 깊은 무력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24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가  노 전 대통령의 영정사진을 분향소로 옮기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24일 오전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이해찬, 한명숙 전 총리가 노 전 대통령의 영정사진을 분향소로 옮기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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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침통한 심정을 드러내는 이유는 2009년, 민주화된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분노와 침통함에서는 깊은 무력감이 배어 나온다. 보통사람이 아닌 전직 대통령조차 힘이 없어지면 견뎌낼 수 없는 이 나라가 싫지만 너무도 평범한 자신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뉴스 밑에 댓글 몇 줄 달고, 추모 사이트에 가서 추모의 글 몇 자 적는 것이 전부다. 대한민국이 싫다고 격한 감정을 담아서 꾹꾹 눌러 몇 줄 적어보지만 자신은 어쨌든 이 나라에서 계속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무력감은 주변 사람들과 공유되면서 집단적 무력감을 형성하고 있다. 

집단적 무력감의 형성과 함께 집단적 기억도 형성되고 있다. 검찰 수사를 받다가 심리적 압박을 못 이겨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은 강한 집단적 기억의 형성에 기여할 만큼 충분히 충격적인 일이다. 분노와 침통함을 내용으로 한 이 집단적 기억은 앞으로 다양한 방식을 통해 되살려질 가능성이 많다. 당장은 추모 형식의 것일 수 있지만 해석과 의미가 추가되면서 진화할 수 있다. 

집단적 무력감과 집단적 기억은 잠복해 있다가 일정한 환경이 조성되거나 개구리가 뱀을 공격할 정도의 긴박한 상황이 되면 상호 작용을 일으키고 그 결과 행동으로 폭발되는 경우가 많다. 집단적 기억의 행동으로의 변화는 극한 경우엔 무력 대결까지 포함한 갈등을 야기하기도 하지만 변화를 위해 불가피한 사회갈등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우리가 이미 겪었거나 알고 있는 많은 사건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집단적 기억은 새로운 행동으로 진화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23일 저녁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마련된 임시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23일 저녁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마련된 임시분향소에서 시민들이 조문하기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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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패배하고 지도자를 잃었던 세르비아 민족의 집단적 기억은 600년이 지난 후 되살아나 유고 연방에 부정적인 방향으로의 일대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된 르완다 후투족의 집단적 차별의 기억 역시 부정적 힘으로 분출돼 내전과 학살의 결과를 가져왔다.

집단적 기억이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불가피하게 사회갈등을 야기하지만 그것은 사회가 성숙하기 위한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억압과 차별이라는 미국 흑인들의 오랜 집단적 기억은 로사 팍스의 불복종과 킹 목사 등 민권운동가들의 직접 행동에 자극받아 시민권 운동으로 폭발했고 결국은 시민권법과 실질적 차별의 철폐를 얻어내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절망이 되었던 17대 대통령 선거의 집단적 기억은 새로운 정부에 대한 실망, 또는 절망의 확인과 함께 집단적 무력감으로 이어졌다. 그 집단적 기억과 집단적 무력감이 잠복해 있다가 정부의 미 쇠고기 수입 부실협상이라는 조건이 주어지자 촛불집회로 폭발했다.

이번의 충격적인 집단적 기억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상황이 한 달 후, 또는 몇 달 후 발생할지, 아니면 아예 발생하지 않을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특유의 역동성 때문에 굵직한 사건들이 신속하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대한민국이라지만 이번의 집단적 기억은 그 충격이 커서 그렇게 쉽게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오늘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집단적 무력감과 집단적 기억이 긍정의 힘으로 작용해 변화의 동력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태그:#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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