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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없고 노력이 없고 학식이 없고 철학의 계속성이 없다면 교육이란 존재하지 않는다.-'A. 플렉스너'

성현을 따라 덕을 이루고 임금을 반들어 공을 세우기 기원하다.
▲ 동래향교 반화루 성현을 따라 덕을 이루고 임금을 반들어 공을 세우기 기원하다.
ⓒ 김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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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문, 바람의 문 속으로

요즘 며칠 날씨는 봄을 알리듯 따뜻하다. 이런 주말의 참한 날씨에 방안에 가만 있지 못하여, 오랜만에 찾아 온 어린 조카와 집을 나섰다. 해운대 바다로 갈까. 자갈치 바다로 갈까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동래 향교를 찾았다. 감수성 예민한 어린 조카에게는 황량한 겨울바다 풍경보다는 동래향교 문화탐방이 좋을 것 같았다.

동래향교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몇 미터 되지 않는다. 그러나 먼 시원의 공간처럼 자주 발길이 내딛어지지 않는 공간이다. 현실적으로 내게 절실하지 않는 동래향교란 공간이 그러나 호기심 많은 어린 조카에는 설렘 그 자체인지 깡총깡총 산토끼처럼 앞선 조카의 발걸음에 나는 신산한 2월의 바람의 문을 열고 머리에는 갓을 쓴 유생이 되어 천년의 저편 시간 속으로 들어섰다.

등걸에 기대어
▲ 은행나무 등걸에 기대어
ⓒ 김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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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의 축소판, 동래향교

맨 처음 눈에 띄는 것은 220년의 은행나무 보호수였다. 잎을 모두 떨어뜨린 은행나무 등걸에 기대서 바라보는, 동래 향교의 아담한 건물과 전경 속에서 먼 곳의 난향과 은은한 묵향과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선조들의 정신의 향기가 나를 에워싼다.

부산 동래향교는 조선 태조 1년(1392)에 교육을 널리 확산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전국의 향교를 세울 때 설립된 것. 처음 세울 시에는 현재의 동래고등학교 자리인 동래 읍성 동쪽문 밖에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옮겨 지었다가, 순조 12년(1812)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향교는 지방재정에 의해 설치·운영된 공립 중등학교격인 교육기관으로 성현을 제사 지내는 제향 기능 등 유생에게 유학을 교육하는 교학기능과 함께 지방의 문화향상 등 사회교화 기능도 갖고 있었다. 마치 중앙 성균관의 축소를 연상시킨다.

바람도 옷깃을 여미고
▲ 여기선 바람도 옷깃을 여미고
ⓒ 김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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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을 알려면 동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부산 동래는 그 옛날 부산의 중심 고장이고, 통일신라시대 때부터 동래라는 지명으로 불리었다. 동래는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경상도 남쪽 끝 지역의 행정 중심지. 해서 부산을 알려면 동래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동래구에는 동래향교 외 동래읍성지, 동래부동헌 등과 우리나라에서 축조된 성곽 중에 가장 큰 금정산성이 있다. 동래의 유적 중에 가장 큰 복천동 고분과 동래 향교의 위치는 지척이다.

1392년 조선 교육진흥책을 위해 지방에 향교를 설립함에 따라 동래에도 향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동래성 함락과 함께 안타깝게 불타버리고, 1605년(선조 38) 동래부사 홍준이 재건한 이후 여러 차례 옮겼다가 1813년(순조 13) 현재의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문향
▲ 묵향 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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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을 따라 덕을 쌓는다

동래향교 마당에 들어서면 두 눈에 확 들어오는 명륜당, 이 명륜당의 이름처럼 동래향교는 동래구 명륜동에 소재한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동래향교는 종6품의 선생님 1명과 학생 70명이 있었으며, 향교의 유지와 관리를 위해 학전(學田) 7결(結)이 지급되었다고 한다.

향교의 구조는 명륜당(明倫堂)을 중심으로 반화루(攀化樓), 동재(東齋), 서재(西齋)로 구성된 강학공간과 대성전(大成殿)을 중심으로 동무, 서무와 내·외삼문, 사주문으로 구성된 제향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적인 향교의 건물 위치는 대성전과 명륜당이 일직선상에 있는 것과 달리 동래 향교의 대성전과 명륜당의 상이한 위치에서 그 건물 양식의 특색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는 공자 이하 중국의 저명한 유현 일곱분과 우리나라의 유현 열여덟분을 모시고 있다. 대성전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에 유림들에 의해 '석전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사람들은 교육으로 치장하려 한다.
▲ 공작새는 깃털로 사람들은 교육으로 치장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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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 그리운 향교
▲ 정신의 향기, 그리운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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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틀의 자리, 교육의 자리

학생도 교수도 없는 빈 동래향교를 한바퀴 둘러나온 어린 조카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왜 이 학교는 책상과 걸상이 하나도 없어? 정말 옛날 학생들은 다리 아팠겠는 걸..."
어린 조카의 말처럼 먼 시원의 유생들은 엄격한 교수들의 가르침을 배우기 위해 마치 바늘 방석같은 불편한 맨바닥의 자리에서 공부를 했을 터이다.

요즘 세태를 풍자한 만평처럼 열 사람 중 열 사람이 박사인 이 과잉 교육의 시대. 배움이 너무 멀어서 평생 무식한 여인으로 살다가신 내 할머니와 그 어디에 빠지지 않았던 어머니의 뜨거운 교육열과 스승의 그림자는 절대 밟아서는 안된다는 말씀도 떠오른다.

그러나 현실의 소리는 '박사는 있어도 진정한 교수는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넘쳐나는 석사, 박사들... 너무나 많은 교육 정보와 지식의 정보를 안고 살아가는 지금, 명륜당 현판 앞에 서니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오솔길
▲ 배움의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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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생겨나서 배우지 않으면은
어두운 밤길을 걷는 것 같다 하였으니
어화 저 소년들아 배우기에 힘쓸지라
<지덕붕(池德鵬)>에서


태그:#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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