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최고의 2번 타자'로 이름을 날렸던 동봉철씨와 함께 밥을 먹으면서 선수로서 경험한 최고의 감독이 누구였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선수 말년 거의 해마다 유니폼을 갈아입는 불운을 겪은 탓에, 완전히 다른 개성의 감독만 6~7명(김성근, 우용득, 백인천, 김응용, 천보성, 강병철, 이희수 등)을 겪었던 그인 만큼, 그 질문에 가장 흥미로운 답을 해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선수 입장에서 최고의 감독이 누구인지?"

자세를 고쳐가며, 한층 친밀한 눈빛으로 동봉철씨가 입을 열었다. 기대도 한층 부풀었다. 그러나 곧이어 따라 나온 답은, 내 예상과 많이 달랐다.

"선수 입장에서는요, 자기를 많이 써주는 감독이 최고의 감독이에요. 다른 거 없어요."

박찬호, 선수의 눈으로 야구를 보게 하다

그렇다. 팬의 입장에서는 이기게 해주는 감독이 최고고, 선수 입장에서는 자신을 기용해 주는 감독이 최고다. 기껏 남들과는 조금 달리 보고 지분거리는 것으로 업을 삼는 기자나 칼럼니스트 따위나 되어야 '철학'이니 '스타일'이니 따지는 것이지, 세상일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답을 듣고 보니 너무나 당연한 그 답을 두고, 우리는 왜 빙빙 돌기만 하게 되는 것인가?

어느 선수가 계약금과 연봉 몇 억을 더 챙기기 위해 팀을 옮긴다면 냉큼 '배신자'며 '돈 귀신'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된다. 또 충분한 출장기회를 보장받지 못해 반발하거나 마땅한 보직을 얻지 못해 이적을 요구한다면 당장 '팀을 생각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자'가 되어 짓밟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박찬호를 '원 포인트 릴리프'로나 돌리고 마이너리그 팀에 처박아두는 감독을 욕하고 당장 다른 팀을 알아봐야 한다고 흥분하며, 박찬호 소속팀의 선발진이 줄줄이 부상을 당해나갈 때 쾌재를 부르며 즐거워한다.

그래서 어차피 포스트시즌 진출 여부가 걸린 중요한 경기가 아니라면, 박찬호가 출전하지 않은 경기에서는 투수진이 붕괴하며 대패하기를 바라는 것이 한국의 박찬호 팬들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박찬호를 통해 정반대의 측면, 선수의 눈으로 야구 보는 법을 배운 셈이다.

저주받은 세대 92학번, 그러나 야구의 황금세대

코리안 특급 92학번 동기 박찬호는 나름의 좌절과 희열을 맛보며 그의 길을 갔다.

▲ 코리안 특급 92학번 동기 박찬호는 나름의 좌절과 희열을 맛보며 그의 길을 갔다. ⓒ LA 다저스

나는 1973년에 태어났고 1992년에 대학에 들어갔다. 군대 다녀와서 졸업하던 해 IMF를 만나 줄줄이 입사시험 합격취소 통보를 받고, 벼랑 같던 생존경쟁의 한고비를 넘어 각자 대리니 과장이니 달고 한숨 돌려보려다가 또다시 10년 만에 돌아온 금융위기 한파에 무릎을 꺾인 전설의 '저주받은 학번', 그 92학번 말이다.

그러나 어느 술자리에서 '92학번'으로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허탈한 동정의 웃음을 들어야 하는 나의 동기들이 괜히 뿌듯한 마음으로 주도하는 화제가 바로 야구다. 최동원·김시진·김용남 트로이카를 배출한 77학번 이후 최고의 야구선수들을 동기로 둔 것이 바로 우리 92학번들이기 때문이다.

임선동·조성민·손경수, 그리고 정민철·염종석·차명주·박재홍·전병호·최창양…, 그렇게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그야말로 '기라성'같은 이름들(그러고 보니, 선수는 아니지만 요즘 최고의 야구전문기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스포츠 춘추> 박동희 기자 역시 92학번이다). 바로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만루 홈런으로 떠서 만루 홈런으로 진 원년 프로야구의 감동, 그리고 82년 세계선수권대회 일본전 역전우승의 환희를 뇌와 심장을 넘어 골수 깊숙이 받아들이고 자란 황금세대.

그 중에 그리 눈에 띄지 않던 이름 '박찬호'가 미국 프로야구 전체의 역사를 통틀어서도 열일곱 번째에 불과하다는 '메이저리그 직행'의 특급대우로 태평양을 건넜다는 뉴스가 전해졌을 때, 나는 구로동 어느 아파트단지 입구 노상에서 MLB 재킷을 팔고 있었다. 하루 종일 찬바람을 맞으며 서서 메이저리그 야구단 로고가 새겨진 3만원짜리 '짝퉁' 재킷을 팔고 받는 일당은 2만원이었고, 동갑내기 박찬호가 LA다저스로부터 받은 계약금은 무려 120만 달러였다.

그 무렵, 나는 찬바람 부는 길 위에서 한 손에는 팔던 재킷을 쥔 채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내가 죽을 때까지 120만 달러를 벌 수 있을까? 아마 힘들겠지? 그렇다면, 벌써 120만 달러를 손에 쥐고 시작하는, 예컨대 박찬호라는 아이와 나의 인생은 이미 대고 견줄 것도 없이 끝나버린 게임 같은 것이 아닐까?

돈으로만 인생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건만, 더군다나 걸어온 길이든 꿈꾸고 있던 길이든 야구선수와 비교해야 할 어떤 동질적인 면도 가지지 않은 처지였건만 되는 일 없이 방황하던, 그래서 자신을 포함한 온 세상을 향해 냉소와 한숨만 쌓아가던 그 무렵의 대학교 2학년짜리 남자의 그런 기괴한 생각들로 나는 열등감과 절망감을 그렇게 한 층 더 높이 쌓아올렸었다. 그래서 박찬호가 그대로 승승장구 메이저리그에서 한국인의 저력을 보여주기를, 내가 믿고 응원했던 것만은 아니었음을 고백해 본다.

'메이저 리거'와 'IMF 리거'

국가대표 박찬호 이승엽, 이종범과 함께 대표팀의 주축을 이루었던 제 1회 WBC

▲ 국가대표 박찬호 이승엽, 이종범과 함께 대표팀의 주축을 이루었던 제 1회 WBC ⓒ 윤욱재


그러거나 말거나 박찬호는 박찬호대로 나름의 좌절과 희열을 맛보며 그의 길을 갔다. 하기야 그 역시 대한민국 전 국민의 열화 같은 응원을 받고 있다고나 생각했지, 얼간이 같은 몇몇 남자들이 단지 자기와 나이가 같다는 이유만으로 이상한 경쟁심 비슷한 걸 느끼며 삐딱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왼발을 얼굴보다도 한참 높이 차올리는 곡예 같은 투구동작과 원맨쇼 하는 듯한 삼진, 혹은 볼넷 쇼로 이목을 끌기는 했지만, 박찬호의 메이저리거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연고지에 밀집한 한인들을 위해 잠시 박찬호의 얼굴을 선보인 다저스는 이내 마이너리그로 내려 보내 본격적인 조련을 시작했다. 박찬호는 나름대로 성공과 실패의 소식을 이따금 전하며 마이너리그도 한 가지가 아니라 '싱글A·더블A·트리플A' 같은 등급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주기도 했다. 

박찬호의 입단 소식을 전할 때만 해도 '메이저리그 사상 17번째의 직행선수'임과, 메이저리그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속구'에 초점을 맞추며 당장 명예의 전당 헌액자라도 될 수 있을 듯 호들갑을 떨던 스포츠신문들은, 곧바로 '마이너리그에서 10여 년씩 머무는 선수들도 부지기수'라며 한 발 물러앉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996년, 그의 메이저리그 복귀 소식에 이어 '한국인 메이저리그 첫 승'이라는 요란한 뉴스가 전해졌고, TV뉴스에서는 마치 올림픽에서 누군가 금메달이라도 딴 날처럼 아버지와 가족들을 전화로 연결해 새삼 박찬호의 성장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법석을 떨기도 했다.

그리고 97년부터 2001년까지, 경기마다 컨디션이 좋으면 2~3점, 나쁘면 3~4점을 내주는 꾸준하고 단단한 모습으로 해마다 200이닝 안팎, 15승 안팎을 책임지는 기둥투수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와 그의 동기들은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디려고 하는 순간 IMF라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날마다 달마다 합격 취소나 회사 부도 따위 우울한 소식을 핑계 삼아 소주병을 비워대던 우리와 달리 그는 해마다 수직상승해 연봉 천만 달러를 넘보는 위치까지 오르고 있었다.  

그 시절, 나와 몇몇 친구들은 남들 출근해서 일할 평일 오전 시간 하릴없이 누구네 집에서건 모여앉아 박수를 치고 악을 써가며 박찬호를 응원했고, 경기가 끝나면 소주 한 잔을 핑계 삼기에는 아직도 길게 남은 한나절 동안 무슨 일을 하며 불안을 달랠까 고민하며 "아, 어떤 놈은 공 한 개 던질 때마다 수백만 원 씩 번다는데…"라고 자학하고 스스로를 비웃었다. 박찬호는 우리 동갑내기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던 동시에, 자꾸만 못나고 추레한 스스로를 비추어보게 만드는 눈치 없이 매끈한 거울('엄친아'라고 해야 그 느낌이 더 잘 살까?)이었던 셈이다.

2001년을 끝으로 FA자격을 얻으며 다저스와 결별한 그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무려 6500만 달러라는 기록적인 거액의 계약을 맺으며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 하지만 이내 묵혀왔던 허리 부상과 새로운 팀의 에이스로 모셔진 기대를 충족시키려는 조바심 때문에 스프링캠프에서 얻게 된 햄스트링 부상, 그리고 텍사스의 더운 날씨와 투수에게 불리한 알링톤볼파크 등 셀 수 없이 많은 구조적인 요소와 불운들이 겹치며 현기증 나는 추락을 경험해야 했다.

역대 최악의 FA로 추락한 박찬호

상상 이상의 성공, 현기증나는 추락 미국 중앙언론들은 오로지 박찬호를 비웃기 위해 기삿거리가 떨어질 때마다 '역대 최악의 FA계약'에 대한 설문지를 돌려댔다.

▲ 상상 이상의 성공, 현기증나는 추락 미국 중앙언론들은 오로지 박찬호를 비웃기 위해 기삿거리가 떨어질 때마다 '역대 최악의 FA계약'에 대한 설문지를 돌려댔다. ⓒ 텍사스 레인저스

미국 중앙언론들은 오로지 박찬호를 비웃기 위해 기삿거리가 떨어질 때마다 '역대 최악의 FA계약'에 대한 설문지를 돌려댔고, 텍사스 지역 언론들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는 박찬호의 부활이 아닌 보험금'이라며 박찬호가 사고라도 당해주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그 뒤로는 모두가 생생히 기억하듯, 해마다 반복된 '재기성공 예고-메이저리그 복귀-난타-마이너리그 강등-부상 재발'의 소식들.

그러나 한때, 저마다 인생에서 박찬호 하나를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듯 환호하던 한국인들은 그의 고행에 동행하지 않았다. 그가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2002년에는 한국 축구대표팀이 이룬 월드컵 4강의 기적을 기뻐하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또, 그의 뒤를 이어 미국 땅을 밟은 김병현, 서재응, 최희섭이 차례로 웬만한 기대와 결과를 낳으며 메이저리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과열된 관심을 연착륙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이제 더 이상 찬사와 응원이 아닌, 무관심 속에서, 그리고 가끔 화나는 일이라도 생기면 떠올려 씹혀나가는 조롱거리가 된 채 지긋지긋하게 몇 해 동안 이어진 불운을 벗어나보려 발버둥 쳤다. 그리고 나는, 그리고 아마도 꽤 많은 92학번들은, 처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박찬호를 응원하고, 박찬호와 함께 눈물 흘렸다.

저지른 것도 없이 감당해야 했던 경제위기의 수렁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문득 삼십대 중반이 되고, 이제 유망주니 꿈나무니 하는 소리 대신 책임감이니 질긴 뚝심이니 하는 거친 주문을 받아야 하는 우리 앞에, 이미 '노장'이 되어 '아름다운 퇴장'의 압박과 자존심을 건 마지막 싸움을 벌이던 박찬호는, 드디어 '거울'이 아닌 '자화상'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2005년에 다시 12승을 올리며 부활의 기미를 보이던 그는, 기세를 타 치고 올라가리라는 기대를 저버리고 다시 곤두박질친 끝에 메이저 리거 최저연봉선 가까이까지 내려앉는 신세가 되었다. 지난 2008년에는 좋은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고액연봉자'들의 눈치를 보며 마당쇠 역할로 '고참다운 기여'를 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고개 빳빳이 들고 달려라, 동기여!

놀란 라이언 그의 우상 놀란 라이언이 버릇없이 몸 쪽 공에 항의하는 아들뻘의 신예 스타플레이어 로빈 벤추라의 목을 휘어감고 주먹을 날렸듯, 그리고 그 자신이 상대 선발투수 팀 벨처에게 이단 옆차기를 선보였듯, 유니폼을 벗는 그 순간까지 고개 빳빳이 들고 큰소리치며 군림하기를 나는 그에게 원한다.

▲ 놀란 라이언 그의 우상 놀란 라이언이 버릇없이 몸 쪽 공에 항의하는 아들뻘의 신예 스타플레이어 로빈 벤추라의 목을 휘어감고 주먹을 날렸듯, 그리고 그 자신이 상대 선발투수 팀 벨처에게 이단 옆차기를 선보였듯, 유니폼을 벗는 그 순간까지 고개 빳빳이 들고 큰소리치며 군림하기를 나는 그에게 원한다. ⓒ MLB.com


한 번 멀찍이서라도 얼굴 한 번 본 적도 없이 혼자서만 동갑내기라는 동질감에 흐뭇해하고 애잔해하던 내가 그에게 바라는 것은 팀을 위한 헌신도, 국가를 위한 봉사도 아니다. 그리고 개인 기록의 욕심 버리고 마당쇠 역할이나 하면서 고참답게 나잇값 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우상 놀란 라이언이 버릇없이 몸 쪽 공에 항의하는 아들 뻘의 신예 스타플레이어 로빈 벤추라의 목을 휘어감고 주먹을 날렸듯, 그리고 그 자신이 못 돼먹은 인종차별 발언을 내뱉은 상대 선발투수 팀 벨처에게 이단 옆차기를 선보였듯, 유니폼을 벗는 그 순간까지 고개 빳빳이 들고 큰소리치며 군림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생각 같지 않은 푸대접의 서러움과 국가대표로 한 번 더 뛰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 흘리는 따위 약한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말아주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에게, 메이저리그의 무궁한 발전이라든가 세계 최강대국에서 그가 선양했다는 국위, 혹은 그가 훌륭히 수행해냈다는 민간외교관의 역할 따위와 바꿀 수 없이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마치, 그와 함께 울고 웃은 우리의 삶이 '이럴 때일수록 똘똘 뭉쳐 과시해야 할 민족의 우수성' 따위보다 수백 배 소중한 것이듯 말이다.

눈물 흘리는 박찬호 박찬호 선수가 13일 오전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WBC불참과 향후 대표팀 은퇴를 발표하며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눈물 흘리는 박찬호 박찬호 선수가 13일 오전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WBC불참과 향후 대표팀 은퇴를 발표하며 아쉬움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연합뉴스 김현태


박찬호 메이저리거 야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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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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