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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희 기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모두 역할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라서 안 된다’는 세상의 편견에 도전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겠다는 용기와 열정을 가진 사람만이 비로소 미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 <여성신문>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미래 비전적인 여성 역할모델을 보여준 ‘2030 여성 희망리더 20인’을 선정했다.

 

음악에 대한 열정만으로 소속사 지원 없이 홀로 일본으로 건너가 가수의 꿈을 이룬 20세 윤하부터 전업주부였다가 국내에서 손꼽히는 분쟁지역 취재전문 프로듀서가 된 39세 김영미씨까지, 각 분야에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온 2030세대를 대상으로 했다.

 

‘2030 여성 희망리더 20인’의 가장 큰 특징은 스포츠 선수들이 대거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한국 여자역도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역도선수 장미란(25), 역시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펜싱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획득해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을 선사한 펜싱선수 남현희(27), 국내 여성 골프선수 가운데 여섯 번째로 LPGA 메이저를 석권한 프로 골프선수 신지애(20) 등이다.

 

금녀의 벽을 깨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여성들도 주목을 받았다.

 

첫 여성 우주인 이소연(31), 첫 공군 KF-16 전투기 조종사 하정미(29), 첫 여성 화재진압대원인 소방관 박양지(35), 국내 여성 산악인 가운데 두 번째로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한 김영미(28)가 그 주인공이다.

 

이미 정상의 위치에 섰지만 끊임없는 도전정신으로 세계 최고의 자리에 도전하는 여성들도 포함됐다. 

 

영화 <밀양>으로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예쁜 배우’가 아닌 ‘연기파 배우’로 자리 매김한 영화배우 전도연(35)과 지난해 MBC <뉴스데스크> 주말 첫 여성 단독 앵커 발탁에 이어, 현재 마감뉴스 격인 <뉴스24>를 진행하며 앵커와 PD 1인 2역에 도전하고 있는 김주하(35)다.

 

이밖에도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여성 법률지원 국제기구 APWLD에서 프로그램 간사로 활동하는 우미선(31), 차세대 패션 디자이너로 주목받고 있는 박소정(23), 한국 문단을 이끌 젊은 작가로 평가받는 김애란(28), 선천성 골형성 부전증 장애에도 방송인의 영역을 개척한 ‘엄지공주’ 윤선아(29), 프리랜서 환경작가 박경화(36), 첼리스트 장한나(27) 등이 여성신문이 선정한 여성 희망리더에 뽑혔다.

 

한편 ‘2030 여성 희망리더 20인’ 선정은 여성신문 편집위원회(위원장 박혜란)가 맡았다.

 

[수상자 인터뷰] “편견과 불가능... 모두 극복했어요”

 

<여성신문>은 창간 20주년을 맞아 미래 비전적인 여성 역할모델을 보여준 ‘2030 희망 여성리더 20인’을 선정했다. 각 분야에서 ‘도전·열정·비전’을 키워드로,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여성의 영역을 확대하는 데 앞장서 온 20세부터 39세까지의 여성 리더들을 대상으로 했다. 여성신문 편집위원회는 각계 전문가들에게 추천받은 50인 가운데 두 차례의 회의를 거쳐 20인을 최종 선정했다.

 

선정위원장을 맡은 박혜란 여성신문 편집위원장(여성학자)은 “사람들은 2030 세대를 두고 ‘미래가 암울하다’는 식으로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말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본질은 이전 세대와는 다른 자질과 비전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며 “2030 세대 자체가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라고 심사 소감을 밝혔다. 여성신문이 선정한 ‘2030 희망 여성리더 20인’을 만나 소감과 포부, 미래 계획을 들어보았다.

 

한국문단 미래 이끌어갈 소설가 김애란

 

스물두 살 등단, 스물다섯에 역대 최연소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 한국 문단의 미래를 이끌 젊은 작가 등 작가 김애란(28)을 둘러싼 수식어는 다양하다.

 

이런 화려한 이력과 달리 그는 누추하지만 사소한 일상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 배경은 편의점과 원룸, 더 나아가 여인숙과 반지하 방 정도가 주를 이룬다. 이렇게 낮고 누추한 자리에서부터 그의 소설적 상상력은 가동되어 왔다.

“리더라 칭하기엔 너무 수줍고, 그저 같은 성(性), 같은 세대라는 친밀감으로 독자와 함께 나이 먹어가는 작가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2005년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신화가 아닌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고 밝힌 만큼, 수상 이후 ‘이효석문학상·이상문학상’(침이 고인다), ‘올해의 좋은 소설’(도도한 생활)에 선정되며 문단과 독자들의 꾸준한 관심을 받아오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단편 ‘칼자국’으로 사단법인 이효석문학선양회가 주최하는 제9회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하는 쾌거도 이뤘다.

 

그는 최근 인터넷 문학라디오 방송 ‘문장의 소리’(radio.munjang.or.kr) 진행자로 나서면서 독자들과의 또 다른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발랄한 문체와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작은 라디오 방에서 문학을 꽃피우고 그 진한 향기를 전달하는 일에 행복해하고 있다.

 

주목받는 20대 여성 작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에 대해 “작가가 되어 뜻밖의 팔자에 없는 일들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일들이 모여 새로운 팔자를 만들어가는 제 모습이 즐겁다”라고 전했다. 그가 현재 바라는 것은 밥 잘 먹고 튼튼해져서 장편을 잘 완성하는 것이다. 그의 지난해 작품 ‘침이 고인다’의 광고 카피는 ‘다시, 김애란이다!’였다. 그 카피문구처럼 그는 작품을 낼 때마다 독자들에게 “역시 다시 김애란이다”란 말을 듣는, 문단의 변함없는 샛별이다.

 

포기는 사치... ‘7전8기’ 산악인 김영미

 

김영미(28)씨는 국내를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이다. 남자들도 정복하기 힘들다는 에베레스트 산을 두 차례나 올랐다. 아프리카의 최고봉 킬리만자로 등반은 기본, 세계 각국의 최고봉(매킨리, 클린마운틴 K2 등)에 대한 도전도 멈추지 않았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야만 직성이 풀린다.

 

실제 그의 2006년 첫 번째, 2007년 두 번째 에베레스트 등반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완등을 위해 마지막 캠프까지 등반을 했지만, 이후 불안감을 극복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국 후 에베레스트 등반에 대한 포기를 생각한 것도 잠시, 도전의 실패 원인을 담력이라고 판단한 그는 국내 유명산들을 돌며 야간산행을 통해 자신감을 키웠다. 지칠 줄 모르는 도전과 열정, 내일을 향한 꿈을 위해선 포기도 사치에 불과했다. 이 같은 노력은 그를 2008년 국내 여성 산악인으로서 두 번째 세계 7대륙 최고봉의 완등이라는 쾌거를 가슴에 안겼다. 끊임없는 노력 지칠 줄 모르는 도전의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7대륙 최고봉 완등을 시작으로 보고 있다. 내일을 향한 꿈이 있는 한 끝이란 없다고 믿는 듯 보인다. 늘 취재기자들이 ‘여성으로서 산악인으로 사는 것이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을 할 때면 그는 항상 산악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여성의 한계는 없다고 말한다. 그에게 도전은 이미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기보다 일상생활의 일부인 것이다. 그런 그가 최근 다시 한 번 에베레스트 등반길에 올랐다.

 

국내 대표 산악인으로 불리는 박영석씨와 함께 지난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선배 산악인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나섰다. 9월 2일 출국, 11월 중순에 귀국하는 험난한 등정 길에 열 일을 마다하고 나선 김영미. 에베레스트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겠다는 꿈을 안고 나섰던 선배의 뒤를 따르는 그가 귀국 후 풀어놓게 될 보따리에는 ‘열정과 미래를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을 것이다.

 

분쟁지역 취재 전문 언론인 김영미

 

“분쟁지역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후배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앞으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가는 언론인이 되겠습니다.”

 

김영미(39)씨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분쟁지역 취재 전문 프리랜서 PD다. 1999년 동티모르를 시작으로 지난 10년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등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분쟁지역만 골라 취재해 왔다.

 

2006년 한국인 선원들이 타고 있던 동원호를 납치한 소말리아 해적들을 단독 취재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고, 최근에는 이라크 주둔 미군을 밀착 취재한 영상이 지난 9월 10일 KBS 1TV ‘수요기획’을 통해 방영됐다. 지금의 그를 만든 건 왕성한 ‘호기심’과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이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해 전업주부로 살던 그는 10년 전 인생의 전환기를 맞았다. 1999년 우연히 신문에서 동티모르 기사를 본 뒤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PD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말렸어요. 직장 경험도 없고, 언론사 공채를 치르기엔 나이도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PD가 되는 길이 공채라는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나만의 방법을 찾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긍정의 힘이 바로 제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는 자신의 정년을 60세로 정했다. 앞으로 20년 남았다. 종군기자로 뛰기엔 너무 많은 나이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취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체력을 기르면 되죠. 언론인에게 가장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진실 보도를 위해 권력의 압력과 회유를 과감히 거부할 줄 알고, 현실에 안주하는 대신 자기 성장을 위해 늘 발로 뛰는 기자정신입니다. 지난 10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세계의 최전선에서 언론인으로 살아갈 겁니다.”

 

앵커와 PD ‘두 마리 토끼’ 잡은 김주하

 

“안녕하세요, MBC 뉴스24의 김주하입니다.”

 

김주하 앵커는 매일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에 하루를 마감하는 뉴스로 시청자들을 찾아간다. 단독 진행해 오던 MBC ‘주말 뉴스데스크’ 자리에서 물러나 최연소 앵커라는 타이틀을 달고 MBC 마감뉴스 격인 ‘뉴스24’에 도전한 이유는 분명했다. 다른 프로그램과 달리 뉴스 편집권이 앵커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앵커와 PD, 1인2역에 도전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뉴스는 삶입니다. 뉴스를 보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앞으로 살아갈 세상까지 볼 수 있으니까요. 뉴스에 묻히는 앵커가 되고 싶습니다. ‘김주하’ 했을 때 뉴스가 생각나기보다 ‘뉴스’ 하면 ‘김주하’가 떠오르는 그런 앵커가 되고 싶어요.”

 

그가 여러 차례 차세대 여성 리더로 꼽혀 왔던 것도 이런 면모 때문이다. 최근엔 세계경제포럼(WEF)에서 뽑은 올해의 ‘차세대 지도자’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언론인으로서 그가 걷는 길이 더욱 빛나는 이유는, 남이 차려놓은 밥상보다 직접 밥상을 차리고 메뉴까지 직접 짜는 걸 즐기는 그의 적극성 덕분이다. 이는 그의 독보적인 행보가 증명한다.

 

1997년 아나운서로 MBC에 입사한 뒤 2000년부터 약 1년간 ‘뉴스데스크’ 앵커를 맡았다. 이때 이례적으로 사내 기자 시험을 치러 합격해 보도국 사회부·경제부 기자로 활동했고, 이후 지난해에는 ‘뉴스데스크’ 사상 첫 주말 여성 단독 앵커로 발탁돼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남녀 앵커의 일이 분담되어 왔던 관례를 깨고 뉴스 제작 시스템 전반에 참여해 단순한 ‘리더’가 아닌 ‘앵커 리포터’가 되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지금은 마감뉴스를 책임지고 기획·진행하는 앵커로서 끊임없이 공부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한국 최초 올림픽 펜싱 메달리스트 남현희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 펜싱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획득한 남현희(27·서울시청)는 올림픽 사상 여느 은메달리스트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세계인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올림픽 결승전에 ‘펜싱여제’라 불리는 이탈리아 발렌티나 베잘리에게 석패한 그는 “은메달이 무척 자랑스럽다”라며 ‘금메달보다 값진 은메달’을 우리 국민에게 선사했다.

 

패배를 인정하는 과정에서도 그는 눈물을 흘리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내 웃음을 되찾고 4년 뒤인 런던올림픽을 기약하는 의연함을 보였다. 국민들은 그런 그의 미소 속에서 ‘긍정의 힘’을 발견했다.

 

남현희는 시련 속에서 낙담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련의 고통을 승화시켜 앞으로 나아가는 에너지로 만든다. 2005년 겪은 성형파문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 오히려 성장의 계기로 삼았다고.

그는 “안 좋은 일이 오히려 성장의 계기가 됐다”며 “어떤 일이 있을 때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약점을 강점으로 만드는 장점을 보여줬다. 작은 키를 보완하기 위해 스피드를 키웠고 그것을 최고의 강점으로 만들었다. 그의 반 박자 빠른 공격에 상대 선수들은 알면서도 당할 정도로 자신을 단련시켰다. 올림픽 이후 남현희는 고질적으로 시달려온 골반과 척추 부상으로 재활훈련과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전국체전을 준비했다.

 

지난해까지 4연패를 이어온 그는 부상이 완쾌되지 않으면 무리해서 출전은 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남현희는 “세계랭킹 1위를 목표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쉽고 재미있는’ 환경문제 알림이 박경화

 

“지금처럼 멜라민 파동이 언론에 이슈화 되었을 때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환경에 관심을 갖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사그라집니다. 책을 통해 지속적으로 환경에 대한 관심을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프리랜서 환경작가 박경화(36)씨가 펜을 잡은 이유는 글로써 사람들의 생태감수성을 자극해 환경운동을 해보고 싶은 일념에서다. 박씨는 1998년부터 6년간 환경단체 녹색연합에서 발행하는 잡지 ‘작은것이 아름답다’의 기자로 활동하며 생태적인 삶을 모색하는 글을 통해 환경운동을 해왔다.

 

그는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법’(2004), ‘고릴라는 휴대폰을 미워해’(2006) 등의 환경도서를 발간하며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환경문제들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탄탈은 아프리카 콩고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 콜탄에서 뽑아냅니다. 휴대전화 수요가 급증하고 탄탈 가격이 치솟자 세계문화유산인 ‘카후지 비에가’ 국립공원이 파괴돼 공원에서 서식하는 고릴라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박씨는 한국에서 유행을 따라 쉽게 교체되는 휴대전화로 인해 아프리카 고릴라가 살 땅이 사라지는 것처럼 일상생활의 작은 습관들이 지구의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현재 청소년을 대상으로 집필활동을 하며 환경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는 박씨의 꿈은 한국의 환경역사가 담긴 책을 발간하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와 전쟁, 개발독재 시대를 거치며 먹고사는 문제에만 급급한 나머지 환경문제는 우리 역사에서 조명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환경 훼손의 역사를 책으로 엮어 어떤 식으로 환경 파괴가 일어났고, 어떤 식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희망을 그리는 차세대 패션 디자이너 박소정

 

박소정(23) 디자이너는 패션업계의 차세대 주자다. 영국 유학 시절 대학교 2학년의 어린 나이로 유명 해외 패션업체 던롭이 주최한 영디자이너 콘테스트에 참가, 여성복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귀국하자마자 ㈜수이스타 패션하우스에 입사한 그는 인천 국제공항 유니폼 총괄 디자인, 유명 백화점의 특별판매용 와인레이블 디자인, 핸드백 디자인, 매장의 최고 히트상품 디자인 등으로 ‘영’파워를 과시하고 있다. 지금은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2030 커리어우먼을 겨냥한 브랜드를 런칭할 준비에 여념이 없다. 편하고 실용적이면서도 화려한 개성을 한껏 살린 독특한 콘셉트를 추구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디자이너는 화려한 직업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고되고 깊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박소정씨가 조직관리와 마케팅의 실무을 담당하며 현장의 리더십을 익혀나가고 있는 모습은 그가 기초가 탄탄한 스타 디자이너이자 패션사업가가 될 것이란 희망을 갖게 해준다.

 

인터뷰를 위해 마주한 박소정씨는 희망리더에 선정된 주인공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수줍고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질문에도 한두 마디 간단한 대답만 하던 그에게 아버지(패션디자이너 박윤수씨)에 대해 묻자, 정적 끝에 그가 내놓은 말은 “아버지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일의 현장에서 만난 아버지는 ‘엄격한 스승이자 자상한 멘토’라고 말했다.

 

칭찬에 인색한 아버지는 딸의 실수를 무조건 감싸주기보다는 잘못된 점을 지적, 디자이너로서 중요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부분들까지도 배울 수 있게 해주었다. 그가 항상 수첩과 펜을 가지고 다니며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기록하는 습관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특유의 감각과 예술성은 부모님에게 물려받아 우연히 얻게 된 ‘재능’이 아니라 노력의 결실이었다.

 

여성 최초 화재진압 대원 박양지 소방관

 

박양지(35) 소방관과의 첫 대면은 그리 쉽지 않았다. 국내 최초 여성 화재진압대원으로서 주목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2030여성리더로 선정이 됐다는 이유로 무작정 만남을 청했고, 한사코 만남을 꺼려하던 그와의 만남은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이루어졌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부담스럽고 어색하기도 하고요. 제가 할 일을 한 것뿐인데 2030여성리더로 선정이 되니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박 소방관의 첫마디였다. 쑥스러움을 감추며 수줍게 지어 보인 미소는 최초 여성 화재진압대원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 천생 소방관이다.

 

박 소방관은 2000년 말 국내 최초 여성화재 진압대원으로 선발됐다. 여성부가 생기며 남성세계로 치부되던 소방관의 일에 여성의 참여의 길이 열렸다. 공무원으로서 사회에 봉사하고 싶은 마음에 소방관, 그것도 일선에서 활동하는 화재진압반에 자원을 했다. 그가 처음 화재진압반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당시 맞는 옷이 없었다. 작은 여성의 체구에 맞춰져 나온 방수복, 장화 없었기 때문이다. 몸에 맞지 않던 장비, 화재진압을 나온 그를 두고 꼬마아이가 나왔다고 수군대는 사람들은 그가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었다.

 

“방수복이 맞지 않아 힘들었어요. 대신 보람이 컸죠. 사회봉사를 하고 싶었고, 그 일을 하기에 일선에서 활약하는 화재진압반에서 꼭 일을 하고 싶었어요. 힘들 때면 선배들의 도움이 큰 힘이 됐고요.”

그가 소방관 생활을 시작한 지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여유가 묻어 나올 만한데 아직도 ‘군기’가 바짝 들어 있다. 여성 소방관들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게 이유다.

 

한국 바둑계 ‘여류 9단 1호’ 박지은

 

보통 사람들은 상황이 더 나빠질까봐 변화를 꺼려하고, 실패하거나 질까봐 승부를 피하려고 하지만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여성 바둑 프로기사 박지은(24·한국기원)이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는 “바둑은 변화가 무궁무진하다”며 “한 번도 같은 수가 나올 수 없는 바둑에서 재미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또 승부를 즐길 줄 안다. “내기라면 뭐든지 좋아한다”며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는 그는 18칸 바둑판 앞에서는 상대와의 싸움에서 무서운 승부욕을 보이는 노련한 승부사가 된다. 그래서 바둑계에선 그를 상대의 허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여전사’로 부른다.

 

남자 프로기사가 무색할 정도의 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하는 공격적 기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조훈현 9단에게 2전 전승을 거둔 적도 있다고. 박지은은 올해 1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1회 원양부동산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대회 결승에서 ‘반상의 철녀’라 불리는 루이나이웨이 9단을 제압하고 2-1로 역전 우승했다.

 

세계대회 우승자에게 한 계단씩 올려주는 규정에 따라 박지은은 8단에서 입신(9단의 별칭)의 경지에 올랐다. 현재 세계적으로 여성 9단은 루이나이웨이와 역시 중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 중인 펑윈에 이어 박지은이 세 번째다. 국내 여성 기사로선 유일하다.

 

열 살 때 평소 바둑 두기를 즐겨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바둑에 빠지게 됐다는 박지은은 14세에 프로에 입단했다. 프로가 되기 위해 남들처럼 중고등학교에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프로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존경하는 프로기사는 조훈현 9단을 꼽았고 그와 동갑내기 친구인 이세돌 9단만큼 실력을 키우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그랜드 슬램 달성한 ‘스타크의 여제’ 서지수

 

“유일한 여성 프로게이머라는 희소성보다는 당당히 실력으로 주목받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앞으로 남성 선수들에게 뒤지지 않는 게임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열심히 훈련하고 도전할 겁니다.”

 

서지수(24·STX소울) 선수는 한국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에 진출한 유일한 여성 프로게이머다. 17세에 프로게이머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3년 겜TV 3차 스타리그 여성부 3위 입상을 시작으로, 2005년 겜TV 4차 스타리그 여성부 우승, MBC게임 레이디스 스타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여성 선수들 중에는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각종 여성리그를 석권하며 ‘여제(女帝)’라는 별명도 얻었다. 하지만 그는 ‘최고의 여성 프로게이머’ 자리에 만족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남성 게이머들과 동등하게 경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어요. 여성리그 톱이라는 결과는 자연스럽게 따라온 거죠. 이제는 여성 프로게이머가 아닌 일반 게이머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하지만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여성 중에서는 단연 최고였지만 남성 게이머들과의 경기에선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다. 서 선수는 “유일한 여성 선수여서 주목을 받는 것도 부담이지만, 경기에서 질 때마다 ‘여자라서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것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때마다 이를 악물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 결과 서 선수는 지난 9월 21일 신예 나도항(SK텔레콤) 선수를 2-0으로 꺾으며 5년 만에 개인리그 첫 승을 거뒀다.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가 더 많지만, 이번 우승으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남성 게이머와의 실력 차를 무시할 순 없지만 나 자신을 믿으면 못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저의 활동으로 실력 있는 여성 게이머들이 프로리그에 더 많이 도전하는 계기가 마련됐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민국 간판 여성 골퍼 신지애

 

중학교 3학년.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은 아픔을 감당하기에는 벅찬 나이였다. 가정생활도 녹록치 않아 15만원의 월세방에 살면서 골프를 배운다는 것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워버리기에도 충분했다. 그러나 이도 잠시, 누구보다 밝게 웃었고 훈련도 열심히 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오히려 본인과 같은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을 돕는 데 앞장서기 위해선 남들보다 배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했다. 신지애 프로는 이렇게 말한다.

 

“골프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다. 어려웠던 환경은 오히려 나를 더 열심히, 그리고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실제 KLPGA와 LPGA를 오가며 승승장구 하고 있는 신지애는 대표적인 고진감래형 스포츠 선수로 불린다. 남들보다 어려운 시기를 겪었고, 또 남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KLPGA에서 각종 기록을 세우며 슈퍼스타로 발돋움 했고, LPGA 진출 이후 제2의 박세리로 불리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열악한 환경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꿈과 희망을 위해 정진해 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직접 소외계층으로 살아가며 꿈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란 것을 알고 있는 신 프로. 그가 데뷔 이후 줄곧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수재민을 위한 기부활동을 벌이며 아픔을 함께 나누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 프로는 “현재 장애인 고용촉진 홍보대사로 활동을 하며 사회적 편견과 고정관념은 현실이 왜곡되어 보이는 거울과도 같다고 생각했다”며 “어려운 환경이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환경으로 나약해진 마음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자신의 마음을 잘 컨트롤 하여 노력하는 사람이 된다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국제 여성 인권문제 전문가 우미선

 

“법학 공부를 접고, 국제 인권단체 활동가로 지원했을 때 법 공부하는 애가 밥 굶게 무슨 인권운동이냐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법학 지식과 실무가 함께 갈 때 인권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 태국의 치앙마이로 왔습니다.”

 

법을 통해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1986년 설립된 국체단체 APWLD(Asia Pacific Women, Law and Development)의 프로그램 간사 우미선(31)씨는 이론과 실무 능력을 고루 갖춘 국제기구 전문가로 꼽힌다.

 

우씨는 현재 태국 치앙마이에 사무국을 두고 있는 APWLD의 첫 한국인 직원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여성인권 현황을 유엔에 보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화여대와 뉴욕대에서 국제법과 인권법을 전공한 그가 인권단체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2004년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조사연구 팀장을 맡게 되면서부터.

 

우씨는 국내외 NGO 활동을 하며 여성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됐다. 난민, 이주노동, 폭력, 빈곤 등 다양한 인권문제 속에서 여성은 같은 상황에 있는 남성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동아시아나 소아시아 등 여성에 대한 법률구제 구조가 잘 갖춰지지 않은 나라에서는 아직도 가정폭력이나 성폭력 등으로 여성이 도움의 손길을 청하면 여성이 오죽 잘못했으면 맞았을까 하는 인식이 있다”고 말했다.

 

이제 서른을 갓 넘긴 우씨는 의사, 심리학자. 커피전문점 사장 등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잠을 설칠 때가 많다고 한다.

 

“지금은 국가나 지역별로 인권 상황을 조사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공익변호사로 뛰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도움을 주고 싶어요. 제가 만난 사람들의 억울한 사연들을 유엔 등의 국제기구를 통해 국제사회에 알리겠습니다.”  

 

열정으로 장애 극복 ‘엄지공주 방송인’ 윤선아

 

“제가 희망리더로 뽑혔다니 얼떨떨하네요. 보통 사람들처럼 사랑하고 사랑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고 있을 뿐인데….”

 

윤선아(29)씨는 겸손해하며 소감을 밝혔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그가 평범하게 사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시련과 수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쉽게 뼈가 으스러지는 선천성 ‘골 형성 부전증’을 앓고 있는 윤선아씨는 키가 120㎝밖에 되지 않는 자그마한 몸집 때문에 ‘엄지공주’라 불린다. 1급 신체장애를 가지고 힘겹게 살아왔을 텐데 그에게서는 도통 그늘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장애가 없는 사람들보다 더 밝은 모습으로 자신의 꿈들을 하나씩 이뤄가며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방송인을 꿈꾸던 그는 끼와 재능을 바탕으로 2004년 KBS 장애인 방송인 선발대회에서 대상을 차지, KBS 제3라디오에서 ‘윤선아의 노래선물’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방송인의 꿈을 이뤘다. 사랑하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나 결혼하고 지난 5월에는 그토록 소망하던 엄마가 되고 싶은 꿈도 이뤘다. 임신이 어려운 몸 상태였지만 인공수정을 시도, 온갖 검사와 착상 실패 등 난관을 겪으며 2년간 눈물겨운 노력 끝에 건강한 아기를 무사히 출산했다.

 

보통의 임신부보다 힘들었던 그의 임신·출산기는 MBC 휴먼 다큐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됐고 누구보다 강한 모성애는 진한 감동으로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포기할 수 없는 건 사랑이다’ 그가 전한 메시지다. 사랑만은 어떠한 장애도 없으며 꿈을 포기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해 현실로 만들어낸 밑바탕에는 바로 사랑이 있었음을 가르쳐줬다. 모두에게 희망과 깨달음을 주는 그의 도전이 진정 아름답다.

 

‘피아노 록’ 새 장르 연 한국가요 기대주 윤하

 

“제가 들어와도 되는 자리인지 모르겠어요. 대단한 선배들 사이에 끼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올해로 만 20세를 맞은 가수 윤하(본명 고윤하)는 선정된 희망리더 중 가장 어린 인물이다. 지난해 가요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신인 가수로 꼽힌 그는 ‘어린 가수’에 대한 선입견을 깨고 폭넓은 팬층을 확보했다. 피아노를 치며 뛰어난 가창력으로 노래를 부르는 그는 ‘피아노 록’이라는 새 장르를 만들어냈다.

 

보통의 ‘아이돌 가수’와는 다른 길을 걸어 온 윤하. 음악을 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로 2004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가 ‘유비키리’(약속)로 데뷔한 뒤 총 8장의 싱글과 1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2005년 오리콘차트 10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자 ‘오리콘의 혜성’이라 일컬어지며 주목받았다.

 

“어렸기 때문에 가질 수 있었던 열정과 패기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어려울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믿고 응원해준 가족의 힘이 컸죠.”

 

윤하는 최근 2집 앨범 ‘섬데이’를 발표하며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담은 2집에 대해 그는 “듣는 분들을 위해 노래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내년 초에는 일본에서 영화 개봉도 앞두고 있다. “관객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는 한국이 즐기기에 충분한 곳이라면 작은 공연 위주로 활동하는 일본은 저 자신을 채찍질 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타이틀 곡 이외의 노래들이 묻혀버리는 한국 가요계 현실이 아쉬울 때도 있다고. ‘윤하는 똑같은 모습만 보여준다’는 비판에 “앨범 전곡을 들어달라”고 주문했다. “평생을 ‘표현자’로 살고 싶어요.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나 연극, 라디오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활동하면서 보는 사람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어요.”

 

‘글로벌 여성’ 모델 제시한 우주인 이소연

 

국내 최초 여성 우주인 이소연(31)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연구원은 세계화의 대표 국내 여성 중 한 명이다. 그가 지식 얻기 위해 보이는 열정과 노력은 글로벌화로 변화는 현 시점에서 지향해야 할 지성인의 모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대의 흐름이 변해 여성에 대한 편견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암암리에 내려오던 여자는 결혼만 잘하면 된다는 식의 평가도 말끔히 깨버린 장본인도 바로 그다.

 

실제 이 연구원은 지난 4월 우주에서 일주일간의 생활이 TV를 통해 방영될 당시 원어민 못지않은 영어실력을 뽐내며 글로벌 여성으로서 위상을 보였다. 최근에는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눌 정도의 실력도 쌓았다. 러시아가 우주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벌인 만큼 더 많은 것을 배우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의 결과였다. 당초 국내 최초 우주인은 남자인 고산(33)한국항공우주연구원 연구원이 선발 됐지만 이 연구원은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수행했다.

 

실망감에 빠지기 보다는 우주에서 생활하기 위한 방법 등을 더 열심히 공부했다. 직접 겪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적과 우주활동을 해본 사람들로부터 받는 교육은 우주에 대한 그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가 만약 실의에 빠져 우주 생활에 필요한 교육들에 소홀했다면 국내 첫 우주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연구원이 국내를 대표하는 글로벌 여성으로 평가받는 까닭이다.

 

최근 국내 전반의 모든 생활은 글로벌화에 맞춰져 있다. 본인 스스로의 도전 정신과 노력 여하에 따라 맡은 바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글로벌 시대의 진정한 오피니언 리더로서 우뚝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글로벌 사회의 일원으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 이 연구원의 활동은 국내 여성 지식인, 더 나아가 지식인이 배워야 할 대표 모델이 되고 있다.

 

세계 역도사 다시 쓴 한국 여성 아이콘 장미란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빛 바벨을 번쩍 들어 올린 장미란(25) 선수. 75㎏ 이상급에 출전해 세계신기록(인상 140㎏, 용상 186㎏, 합계 326㎏)을 세우며 올림픽 여자역도 사상 한국에 첫 금메달을 안겨주는 동시에 세계 여자역도 역사를 새롭게 썼다. 이를 기념해 장 선수가 소속돼 있는 고양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역도장이 건립된다고 한다.

 

그는 이번 대회를 통해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로 우뚝 섰다. 여성이지만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먼 역도라는 스포츠에서 대단한 능력을 보여줬다. 외모로만 여성의 아름다움을 평가하고 여성스럽다고 판단하는 우리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여성이란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값진 결실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가 자신의 종목에 적합하게 발달한 몸을 가진 선수를 선정하는 ‘아름다운 챔피언의 몸매’ 5인 중 한 명으로 장 선수를 뽑은 것은 이에 대한 방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장 선수도 여자답지 못하다고 바라보는 시선에서 처음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권유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역도를 시작하게 됐는데 피아노, 발레를 하는 또래의 다른 여자애들을 보며 역도를 시킨 아버지를 원망한 적도 많았고 친구들에게 역도를 한다는 사실을 말하기도 창피했었다고. 지금은 자신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게 만들어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고 밝힌다. 이를 극복하고 자신의 영역에서 쾌거를 이뤄낸 것은 그의 긍정적인 가치관이 크게 작용했다.

 

“생각을 하고 그것을 이루고자 한다면 못 해낼 것이 없습니다. 세계기록과 관련해서는 아직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더 많은 무게를 들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 활짝 연 장유정

 

“대단하신 분들과 같은 명단에 오르게 돼서 영광입니다.”

 

쑥스러운 모습으로 소감을 밝힌 장유정(32) 연출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2학년 때 과제로 만든 뮤지컬 ‘송산야화’가 눈에 띄어 26세 어린 나이에 연출가로 데뷔한 그는 라이선스 대형 뮤지컬이 주류를 이루던 공연계에서 창작 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은 기대주다.

 

2006년 ‘오! 당신이 잠든 사이’와 2007년 ‘김종욱 찾기’로 각종 상을 휩쓸며 작품성과 흥행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장유정의 데뷔 당시 20대 여성 연출가의 등장은 공연계의 신선한 충격이었다.

 

“작품은 좋지만 연출은 남자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런 일로 내 위치를 알게 됐죠.”

 

직접 극본까지 집필하는 장유정 뮤지컬의 특징은 다양한 소재와 탄탄한 이야기 구조, 그리고 톡톡 튀는 대사다. 삼국설화를 바탕으로 한 고전 ‘송산야화’부터 색다른 로맨틱 코미디 ‘김종욱 찾기’, 정신병원을 배경으로 한 ‘오! 당신이 잠든 사이’, 장의사 형제를 소재로 한 ‘형제는 용감했다’까지. 지난해엔 국내 최초 창작 뮤지컬 작품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인정받을 수 있는 그의 극작과 연출력은 오랜 시간의 취재에서 나온 것. “한 작품을 만들어도 제대로 만들고 싶다”는 그는 성급하게 작품을 내놓지 않는다. 데뷔 초기 그는 극작과 연출, 영화 시나리오까지 넘나드는 다재다능함으로 인해 ‘대학로의 장진’이라 불렸다. 그러나 이제는 ‘제2의 장유정’을 꿈꾸는 수많은 후배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휴머니스트를 지향해요. 모든 휴머니스트는 페미니스트가 아닐까요.”

 

‘세계적 첼리스트’ 우뚝 선 연습벌레 장한나

 

첼리스트 장한나(27)의 수식어는 항상 ‘천부적인 재능’이라는 표현으로 귀결된다.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가 그의 연주를 듣고 눈물을 흘렸다니 ‘과찬’은 아닌 듯 보인다. 그런 그가 2030희망리더로 선정된 이유는 화려함 뒤에 묻혀 버린 그의 도전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 그에게 있어 음악은 오랜 반복이었다. 재능을 믿고 연습을 소홀히 했다면 세계적인 첼리스트라는 칭호를 얻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를 가르쳤던 세계적인 거장 연주가들이 장한나를 ‘연습벌레’로 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한나가 첼로를 시작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다. 세 살 때부터 시작한 피아노에 흥미를 잃을 때쯤 어머니로부터 초등학교 입학선물로 첼로를 선물 받았다. 그가 세상에 도전을 선언한 것도 이 무렵. 조그마한 초등학생 앞에 놓인 커다란 첼로는 그가 넘어서야 할 산과 같았다. 

 

이를 엿볼 수 있는 일화 한 토막. 그는 처음 첼로를 받았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첼로는 크고, 키는 작고.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첼로는 의자에 앉아 자세를 잡는 것 자체도 힘겨워 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첼로에 빠진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자크린 뒤 프레의 연주에 감동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첼로의 아름다운 소리를 통해 우리들 가슴에 감동을 전해 줄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긴 것. 그에게 있어 첼로는 단순히 연주를 해야 하는 악기를 넘어 감동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그 이상이었다. 자신이 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세계 최고의 첼리스트로 우뚝 선 장한나. 그가 보인 꿈을 위한 의지는 각종 편견에 부딪치며 몸부림치는 이들의 가슴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고 있다.

 

‘예쁜 영화배우가 성공’ 고정관념 깬 전도연

 

전도연은 국내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영화배우다. 동양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2007년 칸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강수연 이후 20년 만에 전도연이 3대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것이다.

 

그가 세계적인 영화배우로 발돋움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여성 영화배우에 대한 편견과의 도전이었다. 예쁜 여자 영화배우를 포기한 것도 이 때문. 외모보다는 실력으로서 진정한 영화배우가 되기를 원했다.

 

실제 그는 예쁜 영화배우가 되기보다는 억척스러운 주부로, 때로는 갈래머리 시골소녀로 변신에 변신을 꾀하며 꾸밈없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전도연은 첫 데뷔작인 동시에 흥행 대표작인 ‘접속’을 찍을 당시 영화배우로서의 최고의 연기를 보였지만, 매번 스태프들로부터 영화배우 한석규의 인기에 묻어가는 배우라는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다. 본인 스스로도 몇몇 언론들을 통해 당시를 회상하며 최고의 연기력을 쌓아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그래서일까. 그는 ‘밀양’의 여주인공으로 발탁, 현실감 넘치는 연기력을 선보이며 세계 3대 영화제로 불리는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 했다. 또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를 이끄는 영화배우로 우뚝 섰다. 만약 그가 편견에 사로잡혀 예쁜 배우로만 남았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과연 칸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의 수상, 한류 배우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을까.

 

일상생활에 넓게 퍼져 있는 편견에 발목이 잡혀 주저앉기보다는 의지와 노력으로 극복한 전도연. 사회적 편견에 당당히 맞서 싸운다면 누구나 제2의 영화배우 전도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집념이 만들어 낸 빨간마후라 하정미 대위

 

국내 최초 공군 KF-16전투기 여성 조종사. 하정미(29·공사50기) 대위는 국내 대표 전투기 조종사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여성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버렸다. 최고속도 마하 2.0(시속 약 2448Km), 훈련 속도 450노트(약 720Km)의 속도를 뽐내는 KF-16전투기를 제 몸 다루듯 조종한다.

 

하 대위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비행실력을 보유하고 있다. 실제 그는 2006년 보라매사격대회에 출전, 저고도 사격부문(주기종 A-37)의 최우수 조종사에 선발됐다. 또 정부가 지난 7월 3일 공군 조종사의 날 선포식에서 수많은 조종사들을 대표로 빨간 마후라를 전달 받기도 했다. 하 대위가 KF-16를 처음 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것은 공사생도 4학년 때다.

 

남자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강한 체력과 정신력을 보유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지만 최고의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은 마음에 도전을 선택했다. 실패보다는 성공할 수 있다는 강한 집념은 그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실제 그는 기존에 몰아왔던 A-37와 KF-16의 판이하게 다른 조종 환경 때문에 최초 평가에서 조건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끊임없는 노력과 훈련을 통해  KF-16 조종사로서 우뚝 섰다.

 

일례로 KF-16을 조종해 방향 조정을 할때 몸에 받게 되는 압력은 9G에 달한다. 50Kg의 조종사가 9G를 견딘다고 가정했을 때 견뎌야 하는 무게가 450Kg이라는 얘기다. 때문에 조종을 마치고 나면 팔 다리의 실핏줄이 터져 멍이 드는 일도 흔하게 발생한다. 

 

최근 그는 공군 본부를 통해 외부와의 접촉을 삼가고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에 도전하고, 실패에 굴하지 않는 한 최고의 조종사라는 자리를 굳건히 지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태그:#희망, #2030, #리더, #아이콘,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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