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의 기로에 놓인 마해영

은퇴의 기로에 놓인 마해영 ⓒ LG 트윈스


올 시즌 마해영은 지독히도 못했다. 그의 1군 성적은 11경기 28타수 2안타 타율 .071가 전부다. 못했다라기보다는 안 했다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볼품없는 기록.

안타 두 개 중에 하나가 홈런이라는 것이 한때 이 선수가 프로야구에 쩌렁 쩌렁 이름을 울리던 거포였다는 사실을 시위하는 듯 하다.

마해영,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프로야구 최고의 타자. 한때 구도 부산의 4번 타자였고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삼성 라이온즈의 중심타자였던 선수. 물론 왕년에 잘나가지 않은 선수가 어디 있겠으며 한가락 안 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마해영은 분명 한가락했던 선수였고 잘나가도 너무나 잘나가던 선수였다.

'부산의 4번 타자'  마해영

1993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롯데 자이언츠에 2차 1순위로 지명된 마해영은 상무를 먼저 다년온 후 1995년 프로무대에 발을 내딛었다. 신인시절이던 1995년 마해영이 기록한 성적은 타율 .275 18홈런 87타점. 타격은 19위였지만 131개의 안타를 때려내 최다안타 9위에 이름을 올렸으며 홈런은 8위 타점은 2위였다.

게다가 신인임에도 그해 126경기에 모두 출장을 한 5명 가운데 1명이었으니 최근의 류현진과 같은 괴물급 활약은 아니어도 돋보이는 신인시절을 보낸 것만은 분명하다.

마해영은 단 번에 부산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년차이던 1996년에는 12개의 홈런으로 주춤했지만 1997년 마해영은 25개의 홈런을 때려내며 거포로 자리를 잡았고 1999년에는 타율 .372 홈런 35개 타점 119개를 기록, 타격 1위, 홈런 6위, 타점 3위에 오르는 믿지못할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그해 마해영이 때려낸 안타는 187개였다. 아무리 '타고투저'가 극심했던 시즌이었다고 해도 마해영의 성적은 놀라운 것이었다.

1999년 지금은 고인이 된 김명성 당시 롯데 감독은 “주자가 나가있을 때 그놈(마해영)이 방망이를 들면 안심이 된다”는 이야기를 했을 정도로 마해영은 감독에게 무한한 신뢰를 받던 타자다. 감독만 그를 신뢰한 것이 아니다. 비록 한국시리즈에서 한화 이글스에 패했지만 이전 2년 동안 꼴찌에 머물렀던 롯데를 한국시리즈까지 끌어올려준 ‘1등 공신‘ 마해영에게 열광한 것은 롯데 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마해영은 그해 겨울 작은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초 포스트시즌 배당금 2억8천만원 전액을 선수단에 돌리겠다던 구단측이 정규시즌이 끝나고 선수단에 지급한 보너스 1억8천만 원을 제한 1억 원만을 보너스로 지급하겠다고 말을 바꾼 것에 항의의 표시로 전격적으로 트레이드를 요구한 것. 물론 당시 트레이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고 조용히 마무리 됐지만 마해영은 이 일로 구단의 눈 밖에 나게 된다.

2000년 마해영은 23개의 홈런과 90타점을 때려내며 롯데를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올려놓는다. 준플레이오프에서 만난 삼성에 1승 2패로 패하며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지만 이제는 롯데 팬들에게 숙원이 돼버린 '가을잔치'를 2년 연속으로 선물했으니 ‘4번 타자’ 마해영에 대한 부산 팬들의 애정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롯데가 가을잔치에 나간 것도 그해가 마지막이었고 ‘부산의 자존심’ 마해영에 열광할 수 있었던 것도 그해가 마지막이었다. 그해 겨울 이른바 선수협파동의 후폭풍으로 마해영이 삼성으로 트레이드 됐기 때문이다.

선수협 그리고 끝없는 추락

총회 참가선수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등 구단의 숱한 방해공작으로 인해 ‘프로야구선수협의회' 총회에 참석한 인원은 375명의 선수 가운데 28명뿐이었다. 그 28명 가운데 롯데의 마해영과 박정태가 있었다. 송진우가 회장을 맡았고 박정태는 감사를 마해영은 부회장을 맡았다.

'선수협 주동자' 전원 방출이라는 강경책을 들고 나왔던 구단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자 결국 선수협의 골격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사태가 해결되는 듯 보였지만 롯데는 결국 2월 12일 선수협 탄생 주동자 6인(심정수 양준혁 송진우 최태원 박충식 마해영)가운데 한 명이던 마해영을 삼성에 내주고 외야수 이계성, 유격수 김주찬을 받아들이는 1대2 트레이드를 단행해 기어코 마해영을 떠나보냈다.

그렇게 마해영의 부산 생활이 끝났다. 마해영은 새로운 팀 삼성에서 3년 동안 무려 101개의 홈런을 때려내는 대활약을 펼쳤다.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는 LG를 상대로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는 활약으로 삼성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겨주고 2003년 시즌을 끝으로 자유계약선수로 4년간 최대 28억 원의 계약을 맺고 KIA 타이거즈로 팀을 옮겼다.

그러나 마해영은 그때부터 추락했다. 마해영은 KIA에서 보낸 2년 동안 23개의 홈런을 추가하는 데 그쳤으며 LG로 트레이드 된 2006년에는 홈런이 5개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올 시즌에는 불과 11게임 출장해 7푼 1리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남긴 채 기약없는 세월을 2군에서 보내야 했다.

시즌 중 마해영은 트레이드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해영이 스스로 트레이드를 요구한 것은 지난 1999년 이후 두 번째였지만 첫 번째 트레이드 요구가 동료들을 위한 것이라면 두 번째 트레이드 요구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 달랐다. 달라진 것은 또 있다. 99년 마해영이 트레이드 시장에 나왔다면 갈 곳이 넘쳐났겠지만 지금의 마해영은 어느 구단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마해영의 소식에 소주잔을 들이키는 그들

올 시즌 장성호(KIA)가 10년 연속 100안타라는 대기록을 작성했다. 하지만 장성호가 첫 번째는 아니다. 양준혁이 그 위에 있고 그리고 마해영이 그보다 먼저 이름을 올렸다. 여전히 마해영은 한국 프로야구 역대 기록 아주 높은 곳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마해영은 이미 왕년의 마해영이 아니다. 마해영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이를 악물지만 마해영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질지도 미지수고 주어진 기회를 마해영이 살릴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소속팀 LG는 마해영과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여러차례 내비치고 있다. 어쩌면 마해영은 다시는 그라운드에 나설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놀라운 것은 마해영을 데려가려는 구단은 없어도 그를 간절하게 원하는 팬들은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더 이상 거포도 아니고 4번도 때릴 수 없을 만큼 약해져버린 한국 나이로 38살의 노장 타자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부산의 야구팬들이다.

그들은 초라해진 마해영의 모습을 견딜 수 없이 아파한다. 집 떠나간 자식을 그리는 심정으로 마해영의 소식에 소주잔을 들이키는 그들. 그들은 그 시절 마해영을 기억하고 있다. 미칠듯이 뜨거웠던 그의 야구를 기억하고 있고 그와의 의리를 잊지 못하고 있다.

이전까지의 행보를 본다면 롯데가 마해영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지만 마해영에게 부산은, 부산 팬들에게 마해영은, 끊을 수 없는 질긴 인연의 끈으로 묶여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비록 마해영의 다음 행선지가 부산은 아닐 가능성이 더 높겠지만 왠지 마해영은 부산 갈매기가 참 잘어울리는 타자라는 생각이 든다.

"부산 갈~매기 부산 갈~매기 너는 정~녕 나를 잊었나."

부산은 마해영을 아직 잊지 않았다.

마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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