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단 당시의 김응국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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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이 강한' 살림꾼에 의해 지탱되는 조직은, 역설적이지만 소리 없는 시한폭탄을 지고 가는 것과 같다. 바로 묵묵히 한 몸으로 빈틈을 메우고 있는 자의 자리, 그래서 적절한 시기에 채워 넣어야 할 빈틈이라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채 한 세대를 흘려보내고 그를 떠나보낸 뒤에야 발견하게 되는 바로 그 공백은, 그제야 채우려고 해도 채워지지 않는 커다란 구멍이 되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992년에 이미 단일구단 최초로 백만 관중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구단 자이언츠가 90년대 후반부터 겪고 있는 기나긴 침체기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윤학길이라는 존재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리 빛나지는 않았지만 가장 오랜 기간동안 가장 많은 공을 던지고 가장 많은 승리를 따냈던 그가 황급히 사라져간 97년에 뚫려버린 마운드의 공백은,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메워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의 원인을 타선에서 찾아보자면, 김응국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운드에서 윤학길이 했던 것과 꼭 같이,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오랜 기간동안 변함없이 강했던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우리 프로야구사에서 손에 꼽힐 만한 강타자였지만, 그 꾸준함에 가려 오히려 존재감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던 그가 허리와 골반 부상으로 이탈했던 것 역시 97년이었다.

마운드의 윤학길, 타선의 김응국

 김응국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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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국은 고교시절 꽤나 대접받던 투수였다. 한때 36이닝 무실점 기록을 세웠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고, 빠른 공을 던지는 왼손투수라는 희소성도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야구명문 동대문상고 3학년 때 일찌감치 고려대 입학을 확정하며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는 대학 입학 직전에 어깨를 다치며 깊은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부상도 문제였지만 어깨가 고장 난 신입생 투수에게 신경을 쓰고 기다려줄 만큼 당시 고려대 마운드가 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입학했을 때 2년 선배인 고교야구의 신화 박노준이 대학무대를 휩쓸고 있었고, 역시 부상에 시달리던 졸업반 선동열도 연세대전 같은 큰 경기는 책임을 졌다. 선배들이 지나간 뒤로는 후배 박동희가 나타나 그의 차례를 가로채기도 했다. 그는 대학 4년 동안 '무늬만 선수'로 전전해야 했다.

'출장기회'에 목말랐던 그는 프로진출을 앞두고 태평양 돌핀스의 지명을 원했다. 막연히 고향 팀이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 팀이라면 자신에게 마운드의 한 자리를 내줄 '만만한 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것마저 지나친 기대였던지, 88년을 앞둔 신인드래프트에서 그는 8개 구단 중 어느 팀의 주목도 받지 못했다. 그는 약체팀 돌핀스의 눈에도 차지 못하는 선수였다. 그나마 타향팀 롯데 자이언츠에 2차 지명 마지막 순번으로 지명된 것이 다행이었다.

실제로 그는 별 볼일 없는 투수였다. 88년과 89년, 주로 2군에서 뛰어야 했던 그가 1군 무대에서 기록한 성적은 도합 22.1이닝에 13자책점. 경기당 6점 가까이 내준 초라한 것이었다.

고교시절 나름대로 가능성 있다는 칭찬에 들뜨기도 하고, 팀을 위한 희생이라는 생각에 팔이 빠져라 무리도 해보고, 그러나 몇 해를 지나며 대학에 들어가고 프로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성공의 언저리에서 쓴맛만 보고 아쉽게 발길을 돌려야 했던 수많은 평범한 야구선수들의 길을, 그 역시 그대로 따라 걷고 있었던 것이다.

타자로서의 '가능성'에 도전하다

 은퇴식에서 그라운드에 입을 맞추는 김응국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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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 것은 2군 무대에서였다. 애초에 선수를 키워내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던 한국 프로야구 2군 팀들은 정상적인 운영이 가능한 만큼의 선수도 뽑아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타자가 부족해 투수가 타석에 서는' 웃지 못할 현상이 종종 벌어졌고, 그 바람에 엉겁결에 휘두르던 방망이질에서 마침 이성득 코치가 가능성을 발견했다.

투구가 아닌 타격이었지만, 오랜만에 들어본 '가능성'이라는 단어에 김응국은 전력을 다해 매달렸다. 아무리 부닥쳐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벽 앞에서도,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한 번 더 머리가 깨져라 덤벼들게 만드는 잔인한 희망이다. 그는 남몰래 글러브 대신 배트를 쥔 손에 더 힘을 쥐었고, 은근히 타격코치 곁을 맴돌며 방망이를 휘둘러대곤 했다.

89년 시즌 막바지에, 그는 드디어 1군 무대에 투수가 아닌 타자로서 올라섰다. 그리고 29타수 14안타. 홈런 한 개에 도루 2개. 마지막 기회를 날리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뛰었고, 감독도 인정할 만큼의 '가능성'을 그 역시 보여주었다.

경력은 짧았지만 기본기가 나쁘지 않았고, 엄청난 훈련량과 무서운 집중력이 있었다. 게다가 발이 빠른 왼손타자였다. 투수 출신의 강한 어깨가 외야수비에서 가지는 장점도 보탬이 되었다. 그는 이듬해인 90년에 곧바로 주전으로 기용되며 0.292의 타율을 기록했다. 홈런은 7개에 불과했지만 도루가 21개였다. 방망이로 안타를 만들고 빠른 발로 몇 개를 보탰으며, 일단 출루하면 투수의 속을 꽤나 긁어대는 주자였다.

미래를 내다볼 근거가 되는 '과거'가 없는 이들의 활약을 우리는 '혜성'에 비유한다. 그는 그야말로 혜성 같은 존재였다. 타점왕과 10승을 동시에 거머쥐었던 원년의 '팔방미인' 김성한 이후로 딱히 성공의 전례가 없던 '투타전업'이었다. 난다 긴다 했던 김건우나 박노준의 경우에도 그리 좋게 평가하기 어려운 경우였다. 그런데 웬만한 이들은 이름조차 들어본 바 없는 무명투수의 타자전업이었다. 그래서 밝게 타오르지만 순식간에 사라지는 혜성처럼, 그 역시 사라져갈 것으로 믿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지만 타자전업 3년차인 91년에 그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타자로 올라섰다. 드디어 3할 타자로 등극하며 더 많은 홈런과 더 많은 도루를 기록했고, 꿈의 무대인 올스타전에서 리그 최고의 투수들만을 상대하며 5타수 4안타 홈런 1개로 MVP에 뽑힌 것이다.

자이언츠의 중심타자로 확실히 자리를 잡은 그는 92년과 94년, 96년까지 한 해 걸러 한번씩 3할2푼대의 고감도 타격을 자랑했고, 그 사이사이에도 절대 2할8푼대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 꾸준함 역시 과시했다. 게다가 해마다 10개 안팎의 홈런과 20개 이상의 도루를 성공시켰고, 항상 삼진보다 많은 사사구를 얻어냈다. 특히 발이 빨라 96년에는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하기도 했고, 통산 61개의 3루타를 기록해 팀 동료였던 전준호에 이어 3루타 부문 2위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자이언츠 전성기의 디딤돌

 김응국 코치
ⓒ 현대 유니콘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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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84년 우승 이후 6년간 하위권을 맴돌았던 자이언츠는 91년 7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깨어나기 시작했고, 92년에는 꿈에 그리던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으며, 95년에도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물론 염종석과 주형광, 박동희와 전준호, 박정태 등이 그 각각의 영광을 이끌어낸 영웅들이기도 했지만, 그 모든 순간에 선배들의 디딤돌이 된 것은 윤학길, 그리고 김응국이었다.

97년을 전후해, 자이언츠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동력원이 급속히 고갈되기 시작했다. 윤학길이 단 3이닝동안 4점을 내주며 사라져 갔고, 부상을 당한 김응국이 시즌의 절반도 소화하지 못하며 2할5푼대 타자로 내려앉았다. 전준호와 이종운, 그리고 박동희를 트레이드했으며 주형광이 깊은 부진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신인 문동환, 손민한 그리고 차명주가 기대와는 달리 선배들의 자리를 채워내지 못했다.

97년과 98년, 자이언츠는 처음으로 연속 꼴찌를 경험했고, 용병 호세와 마해영의 불꽃같은 활약, 그리고 부활한 박정태의 투혼으로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섰던 99년을 지나 곧 다시 꼴찌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몇 번의 대형 FA영입이 있었지만, 뿌리 깊은 나무가 뽑혀나간 자리가 돈으로 쉽게 메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김응국은 99년, 다시 부상을 털고 3할에 가까운 타격으로 팀의 준우승에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30대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넘어가던 노장의 투혼만으로 팀을 지탱할 수는 없는 것이었고, 2003년을 마지막으로 그 역시 그라운드를 떠났다. 자이언츠에서만 보낸 16년이었다.

통산 0.293의 타율은 작년 기준으로 전체 16위에 해당한다. 그리고 전체 12위에 해당하는 1440경기에 나서 6위에 해당하는 1452개의 안타를 때렸고, 통산 11위에 해당하는 207개의 도루를 성공시켰다. 그 외에도 득점과 타점, 4사구, 2루타, 3루타 등 거의 모든 공격부문에서 그는 통산 20걸 안에 드는 타자였다.

그러나 그는 선수생활동안 단 한 번도 개인타이틀을 가져보지 못했으며, 팀의 한 해를 결산하는 자리에서도 맨 앞에 나서본 적이 없었다. 그는 늘 염종석, 박정태, 박동희 등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비롯한' 혹은 '외의 수많은' 선수들 중 하나였고, 또 그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하며 행여 그 자리 아래로 떨어질까 늦추지 않고 훈련에 집중했던 선수였다.

순전히 이름 탓에 그의 별명은 '호랑나비'였다. 그러나 그는 호랑나비춤은커녕 남들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영 서툰 사람이었다. 그저 웃음이 많고, 조용하고, 꾸준한 사람이었다.

상상을 초월해 '망가지는' 몸짓의 춤으로 보는 이들의 웃음을 끌어냈던 김흥국. 반면 묵묵하고 꾸준하고 조용한 스윙으로 팀을 떠받쳐 보는 이들을 신명나게 했던 김응국. 아주 다르지만, 또 어느 끝에선가 비슷한 면도 있었던 이름.

김응국 같은 이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한 팀의 번성기와 침체기를 모두 지켜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할 것이다.

김응국 롯데 자이언츠 김흥국 호랑나비 2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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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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