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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거탑>의 장준혁
ⓒ iMBC
숱한 화제를 뿌린 드라마 <하얀거탑>이 예정된 20회를 마치고 종영했다. 일본 소설이 원작이라는 점도 주목을 끌었지만 한국 드라마의 식상함(삼각관계, 출생비밀, 연장방영 등)을 극복한 점과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는 근래 보기 드문 수작임을 증명하기에 족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얀거탑>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근원은 그 탄탄한 스토리와 치밀한 구성이다. 특히 주인공 장준혁이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잘 그려냄으로써 한국 드라마의 질을 한 단계 높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BRI@이 때문일까.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세간에는 장준혁 열풍이 여전하다. 그러나 그 양상은 예전의 드라마와는 좀 다르다. ‘악역’이라는 장준혁이 의외로 큰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장준혁은 왜 미워할 수 없는 악인인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최도영은 왜 사랑할 수 없는 선인인가.

누구나 공감하듯 <하얀거탑>은 현대 사회의 거대한 조직 속에서 얼마나 냉혹한 생존경쟁이 벌어지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장준혁은 요즘 보기 드물게 ‘개천에서 난 용’이었고, 그 살벌한 ‘거탑’ 속에서 자라 ‘거탑’의 규칙을 매우 철저하게 구현했다. 원래는 착했던 장준혁이 병원이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점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법도 하다.

그런데 장준혁에 대한 시청자의 애정을 증폭시킨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삶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첫째,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의사조차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권모술수에 능해야 하고 온갖 꼼수와 더럽고 부정한 짓을 해야만 한다는 점은 평범한 우리들에게 위안이 되는 면이 있다.

드라마 속 권력암투와 가진 자들의 더티 플레이가 우리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듯이, 현실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그 ‘잘난’, 출세가도를 달리는 누구누구 또한 장준혁처럼 뒤로는 치졸하고 비열한 처세로 일관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지 그놈이 잘 나 봐야…”하는 생각들 한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둘째로, 그와 동시에 장준혁의 이런 모습은 우리가 현실에서 ‘사소하게’ 저지르는 부도덕함에 일종의 면죄부 역할을 한다. “천하의 외과의사도 기껏 과장자리 오르려고 별의별 짓 다 하는데 그에 비하면…” 내가 줄서고 아부하고 좀 짓밟는 것쯤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장준혁을 통해 황우석을 생각하다

▲ 황우석 교수.
ⓒ 오마이뉴스 남소연
문제는 드라마를 보면서 가졌음직한 이 모든 생각들이 지극히 현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하얀 거탑보다 훨씬 더 크고 더 참혹할지도 모른다. 법치주의와 민주주의와 상식과 정의로 포장된 이면에는 힘과 돈과 기득권으로 점철된, 좀 심하게 말하자면 조폭과 다를 바 없는 암흑세계가 똬리를 틀고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나는 이 암흑의 한 단면을 지난 2005년 ‘황우석 사태’에서 절감했다. 황우석은 어찌 보면 장준혁과 닮은 점이 많다. 그 또한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고, 국내박사-농대-수의사라는, 우리 사회 비주류로서 온갖 설움과 멸시를 받고 살아왔음에 분명하다.

국내박사인 나로서도 황우석의 승승장구에 유난히 환호했다. 2000년 우연히 그의 콜로퀴움(세미나)을 들었을 때는 연구에 대한 그의 뜨거운 열정과 겸손함에 과학자로서 깊은 존경심까지 갖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끝내 그의 사진조작과 논문위조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장준혁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도 결국 그에게 애정을 줄 수 없었던 것은 장준혁의 모습 뒤로 아른거리는 황우석 때문이었다.

전공도 전혀 달랐고 아무런 인적 관계도 없었지만, 황우석 사태로 열병을 앓던 그 당시엔 과학자로서의 최소한의 내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 체감하기에 충분했다. 논문조작이 인정되었음에도 여전한 9:1의 여론을 도대체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가 ‘과학’을 한다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회사 다니는 수많은 친구들의 “그 정도 허풍이야 기업에서는 흔한 일인데…”, “수백조원의 국익을 생각하면 그쯤이야…”하는 대담함(?)에 비하면 나의 ‘과학자로서의 원칙’은 너무 순진하고 고루하며, 최도영스럽기까지 했다.

황우석은 잘못했다,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말 한마디 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나는 아마 과학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게다. 그래서 나는 배역자조차 최도영을 답답하게 여기도록 연출한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푸른거탑'의 이건희 회장과 엄석대의 창조주 이문열

▲ 이문열과 이건희
ⓒ 오마이뉴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 사회에 장준혁 열풍이 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원칙과 정의와 법치를 말하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정당하게 진지하게 또 고귀하게 여기고 있을까. 최고 부자라는 이건희 회장은 각종 불법·탈법도 모자라 검사들마저 ‘삼성장학금’으로 관리해도 그는 한국에서 황제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의 ‘푸른거탑’에 들어가는 것은 대학생 최고의 희망사항이며 신문사들은 그의 말 한마디를 금과옥조로 주워 담기에 여념이 없다. 성공만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높은 지위에 오르기만 한다면 다른 모든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에 우리는 이미 살고 있다.

장준혁을 보면서 떠오르는 또 다른 인물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엄석대와 그 창조주격인 이문열이었다. 엄석대가 2007년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장준혁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엄석대 체제가 붕괴할 때는 그의 수많은 추종자들이 등을 돌린 반면 장준혁이 몰락할 때는 그 추종자들이 끝까지 그를 지켰다는 그 차이점이, 아마도 그간 민주화와 IMF와 신자유주의 광풍을 겪은 한국사회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공교롭게도 그 작가인 이문열은 ‘혁명적 허무주의’로 이름이 높다. 그의 단편 <칼레파 타 칼라>는 내가 읽어 본 몇 안 되는 그의 작품 중에서 이 허무주의를 가장 강렬하게 보여줬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한 사회에 모순이 있어 대중이 그것을 뒤집어 봐야 혁명세력들 또한 구세력과 마찬가지로 부조리와 비리와 모순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개혁에 반대하거나 기회주의적으로 대처하거나 다소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개혁세력을 미래의 막연한 범죄자로 몰고 갈 위험을 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막연한 개연성 때문에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모순에 눈감아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예컨대, 386들이 정권 잡아도 부정부패는 여전하지 않느냐면서 그들의 민주화 운동 전체를 의문시하는 경향은 이 허무주의와 관련이 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삼국지평전>에서는 물론 현실참여적인 그의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구시대의 부조리한 사회를 떠받치는 한 기둥이었던 <조선일보>가 그를 특히 환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6년의 일제강점과 그에 맞먹는 시기의 군사독재를 겪은 데다, 그 후에도 오랜 세월 이렇게 힘 있는 자들이 이런 허무주의를 유포하며 힘센 악인들을 거탑 속에서 옹호해 왔으니 장준혁에 대한 우리의 열망은 그 뿌리가 얕지 않아 보인다.

장준혁보다 실력 없는 현실의 악인들

▲ 전두환
ⓒ 오마이뉴스 이종호
부산사람으로서 나는 합천군이 어떤 기분으로 ‘일해공원’을 전두환에게 헌정했는지 짐작이 간다. 아들의 앞날을 위해 한 시주승의 말을 듣고 곧바로 앞니 세 대를 뽑았다는 그 모친에 대한 전두환의 마음이 어찌 장준혁의 사모곡 못지않으랴.

그들에게도 전두환은 원래는 착한 사람이었고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쿠데타를 일으킨 천재군인이었으리라. 장준혁 열풍 뒤로 혹 우리 사회에 다시 파시즘의 광풍이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내 소심함이 그저 기우이기를 바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실 나는 최도영같은 원칙주의자도 아니고 그렇게 ‘답답하게’ 살고 싶지도 않다. 과학기사를 쓰더라도 이 바닥의 장준혁스러움을 ‘증언’할만한 용기도 없고 파리 목숨 같은 연구원이라 늘 교수님네 눈치 보기에 급급할 뿐이다.

다만 이론물리학자로서의 직업병 같은 것은 있는 모양이다.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던 어느 수학교수처럼 과학자들은 세상도 자연법칙처럼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돌아가리라는 강한 희망을 갖게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장준혁에게는 선뜻 정이 가질 않는다.

불행히도 현실의 악인들은 장준혁과는 달리 진정한 실력이나 강건한 프로의식조차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랬더라면 아마 이 고달픈 인생이 조금은 덜 억울하지 않을까.

태그:#하얀거탑, #장준혁, #악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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