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8월, 아랑 시절의 배우 황철.
해방 전 최고의 스타이자 한국연극사상 최고의 배우로 손꼽히는 황철.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활동했기에 우리에게 잊혀진 이름이지만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연극인들은 마치 전설 속 인물을 이야기하듯 그를 회고한다. 일례로 황철을 배우로 발탁한 변기종은 "한 달 동안 연극을 계속해도 목이 쉬지 않는 천부적 배우로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연극쟁이"라고 그를 평했다. 유민영은 원로 연극인들의 구술을 토대로 쓴 <한국인물연극사>에서 황철을 신파극 분야 최고의 배우로 꼽으며 배우로서 천부적이었고 지적 수준도 높았기 때문에 남한에 남아있었더라도 정통연극의 지킴이로 우뚝 서 있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무대 위에서는 제왕처럼 군림했던 황철도 스크린에서는 그 능력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는 평생 네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가 출연한 영화는 동양극장의 유명한 레퍼토리를 그대로 영화로 만들어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실패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와 친일 영화인 <젊은 모습>, 북한에서 제작된 <춘향전>과 제작 도중 전쟁으로 인해 촬영이 중지된 <땅>이다. 영화배우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뛰어났고 천부적 재능을 발휘하기 위해 평생을 부단히 노력했다. 유랑극단의 잡부에서 시작하여 북한 최고의 인민배우로 사망할 때까지 우리의 현대사가 그러했듯 그도 험난한 인생의 고비 고비를 때로는 찬사를 받으며 때로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달려갔다. 음주운전 사고가 바꿔놓은 인생 @BRI@황철은 1912년 1월 12일 청양군수를 지낸 황우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고위관리를 지냈으나 가정은 어려웠다. 춘천서 성장기를 보내고 서울의 배재고보와 춘천의 춘천고보에 다녔으나 학비가 없어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황철은 돈을 벌기 위해 자동차 운전을 배웠다. 6개월간 조수로 일하며 운전기술을 배워 정식 운전사가 되었다. 춘천과 홍천 사이를 오가며 운전사 생활을 하던 중 음주운전으로 큰 사고를 냈고 이 사고가 인생을 바꿔놓았다. 차 안에는 홍천 주재소장의 딸이 타고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일본인 주재소장은 황철에게 감옥에 가는 대신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은 자신의 딸과 결혼할 것을 명령했다. 내키지 않은 결혼을 한 황철은 결혼 직후 도망쳐 지방의 유랑극단인 벽우회에 들어가 황태철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극단 잡역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림과 글씨에 자신 있었던 황철은 극단이 서울에 올라왔을 때 몰래 빠져나와 한 간판집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황철은 극장의 간판 그림을 그렸는데 유명극단인 조선연극사의 간판 그림에 반해 조선연극사의 단장인 변기종을 찾아가 입단 허락을 받고 연구생이 된다. 지방 극단의 잡부로 출발 중앙무대에 진출한 것이었다. 조선연극사의 연구생으로 스타들을 바라보며 꾸준히 연습했던 황철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온다. 연습 중인 <청춘난영>의 주인공을 맡은 이경환이 아편 복용으로 경찰에 잡혀간 것이었다. 1932년 10월, 황철은 이경환의 대역을 맡아 변기종, 강홍식, 신은봉, 전옥 등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주역으로 무대에 섰다. 연기는 무난했다. 이후에도 계속 주역으로 출연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최고 스타인 강홍식이 지방공연을 꺼려 지방공연에서 강홍식의 역은 황철이 맡아 했기 때문이다. 황철은 꾸준한 노력과 재능으로 조선연극사의 떠오르는 스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조선연극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 연출가 홍해성이 있었다. 홍해성은 일본의 스키지(築地) 소극장에서 연극을 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스키지 소극장을 이끈 히지가타 요지(土方與志)는 모스크바에서 연극을 공부했던 인물로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술에 심취해있었다. 자연히 스키지 소극장은 스타니슬랍스키의 연기술을 연마하는 도장과 같았다. 스키지 소극장 출신의 홍해성에게 사사한 황철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1935년 <신라의 달> 공연이 문제가 되어 조선연극사의 단원 10여 명이 안동경찰서에 검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라의 달>은 독립투쟁을 하는 젊은 청년과 그를 사랑하는 처녀가 주인공인 멜로드라마였다. 서울에서 아무 일 없이 공연됐던 작품인데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공연한 카프 맹원들이 검거된 '신건설 사건'으로 검열이 강화되자 지방공연 중에 갑자기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조선연극사는 위축되었다. 또 조선연극사를 이끌기 위해 전 재산을 투자했고, 세 명의 딸마저 배우로 키웠던 지두한은 조선연극사의 인기 여배우인 장녀 지최순이 심장병과 폐결핵으로 쓰러지자 자식을 혹사해가면서 극단을 운영해야 할지 마음이 흔들렸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주인공 맡아
 동양극장 전속 극단 청춘좌 단원들.

1935년 7월, 배구자, 홍순언 부부가 연극전용극장인 동양극장을 세웠다. 조선연극사를 해산하기로 결정한 지두한은 단원 전부를 동양극장으로 보냈다. 조선연극사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황철은 동양극장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황철은 무용가 배구자가 세운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의 창단 단원이 되었다. 청춘좌에는 인기스타 심영이 있었다. 심영은 토월회 출신이었다. 지방의 유랑극단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황철에게 중앙의 신극 출신 심영은 아직 넘어야 할 산이었다. 황철과 심영은 여러 작품에서 함께 주역을 맡으며 연기 대결을 펼쳤다. <춘향전>에서 황철이 이도령, 심영이 방자였고, <단종애사>에서는 황철이 문종, 심영이 성삼문이었다. 이들의 균형은 임선규 작 1936년 7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공연되면서 깨어졌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작품에 황철이 주인공을 맡았던 것이다. 이들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월급이었는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상연 이후 황철의 월급이 심영의 월급보다 높아졌다. 황철의 독주가 시작된 것이다. 수양대군이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되는 내용인 <단종애사>가 조상을 모욕하는 내용이라는 이유로 조선왕실의 업무를 관장하던 이왕직에서 공연 중단을 요청해왔다. 공연은 갑자기 중단되었고 급하게 선택된 작품이 <사랑에서 속고 돈에 울고>인데, 임선규가 황철과 차홍녀를 염두에 두어 쓴 신파극이었다. 이 작품은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기생출신이라는 이유로 결혼 후 버림받고 살인을 저질러 순사가 된 오빠의 손에 끌려간다는 내용이었다. 이 작품의 엄청난 흥행으로 그간 적자 운영되던 동양극장은 흑자로 전환할 수 있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동양극장의 주된 관객 층인 기생들을 울렸다. 매회 공연이 끝나면 분장실 앞에는 홍도 역의 차홍녀를 만나기 위해 기생들이 줄을 섰으며, 극장 앞에는 철수 역을 맡은 황철을 모시기 위한 기생들의 인력거가 줄을 섰다. 차홍녀와 짝을 이룬 30년대 후반부는 황철의 최고 전성기였으며 그의 시대였다.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노랫말로 세상을 울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동양극장과 고려영화사 공동제작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작품은 1939년 3월 17일 동양극장과 부민관에서 동시 개봉되었다. 황철은 철수 역으로 영화에 데뷔했다.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출연한 이 작품은 실패작이었고 팬들의 외면을 받는다. 녹음이 잘못되어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로 동양극장은 큰 재정적 부담을 안았고, 황철 개인적으로는 승승장구하던 배우인생의 첫 실패를 맛보았다. 이즈음, 황철은 동양극장의 또 다른 전속 극단 호화선의 여배우 이정순과 결혼한다. 1939년, 동양극장의 지배인이자 배구자의 남편이었던 홍순언이 사망했다. 배구자는 자신이 운영하던 무용단의 공연을 중지하고 새로운 지배인 최독견과 함께 동양극장의 운영에 열중했다. 그러나 홍순언이 사망한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아 동양극장은 파산한다. 최독견은 중국으로 도망갔고 배구자는 채권단에게 동양극장을 넘겼다. 청춘좌 단원들은 동양극장의 새로운 주인을 반대하며 대거 탈퇴했다. "극단은 샀을지 모르지만 사람까지 산 것은 아니다"라는 연출가 박진의 주장에 동의하여 동양극장을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한 것이다. 최고의 스타였던 황철은 아랑의 대표가 되어 극단을 운영하게 된다. 제일극장과 동양극장의 라이벌전 아랑은 1939년 9월 27일 대구에서 <청춘극장>을 공연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황철, 차홍녀, 서일성, 박영신, 문정복 등 당대의 유명 배우를 망라한 아랑에 세인의 관심은 폭발했다. 서울 부민관에서의 창단 공연 또한 성공적이었다. 황철이 이끄는 극단 아랑은 신생 극단임에도 황철과 차홍녀라는 유명 스타와 극작가 임선규, 장치가 원우전, 연출가 박진 등 과거 청춘좌를 이끈 능력 있는 인물들로 인해 어렵지 않게 운영되었다. 아랑은 동대문 근처에 있던 제일극장을 주로 이용하였다. 아랑이 사용하던 제일극장과 서대문의 동양극장은 라이벌이 되었다. 제일극장과 동양극장의 라이벌전은 1940년 4월, 아랑의 <김옥균>과 동양극장의 <김옥균전>이 맞붙으면서 펼쳐졌다. 임선규가 여러 해 동안 다듬은 아랑의 <김옥균>은 의상, 장치비용만 8000원이 든 대작이었다. 아랑에서는 경비행기를 이용하여 서울 시내에 선전지를 뿌렸다. 황철이 김옥균 역을 맡은 아랑의 <김옥균>이 동양극장의 <김옥균전>을 흥행과 평에서 이겼음은 물론이다. 아랑은 <김옥균>으로 1940년도 극단 최고의 영예를 획득하였다. (*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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