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시절의 김경기
ⓒ SK와이번스
1985년. 많은 인천의 야구팬들이 더 이상 야구를 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해는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이미 인천팀 슈퍼스타즈는 82년 출발부터 웬만해서는 깨지기 어려울 경악스런 패배의 기록들을 모두 세워버렸다. 그러나 83년 슈퍼스타즈가 3위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키자 인천팬들은 기대감을 갖게 되었고 이 기대감 때문에 팬들은 이듬해 팀이 다시 꼴찌로 주저앉았는데도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어떤 이는 다시 돌아온 홀수 해에는 승부가 잘 풀릴 것이라고 낙관했고, 또 다른 어떤 이는 20승에 미달한 승수만큼 벌금을 물기로 계약한 너구리 장명부가 태업을 멈추고 30승을 올렸던 83년의 위력을 다시 보여주리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85년 3월 말부터 4월 말 사이에 역사적인 18연패의 기록을 수립하면서 그런 기대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나마 질기게 남겨두고 있던 기대감은 고스란히 분노로 뒤바뀌었고, 수천 명의 인천 시민들은 사과와 해명을 요구하며 선수단 버스를 막아서기에 이르렀다. 프론트는 '차라리 화가 풀릴 때까지 나를 때려달라'며 시민들 앞에 무릎을 꿇었고, 김진영 감독은 지휘봉을 놓아야 했다.

무너진 슈퍼스타즈, 절망한 인천시민

'청보'라는 낯선 기업이 슈퍼스타즈를 사들이고 서른을 갓 넘긴 명해설가 허구연을 감독으로 영입해 핀토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지만, 기대는 크지 않았다. 더 이상 기대를 가지고 야구를 본다는 것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 번 되살아났던 희망을 짓밟히는 것은, 그렇게 잔인한 일이다. 그리고 역시 핀토스는 슈퍼스타즈가 시작한 패배의 행진을 빗나감 없이 따라 밟았다. 이제는 누가 무엇을 해도 될 것 같지 않은 느낌이 인천팬들을 사로잡았다.

그 암울하던 1985년, 인천의 야구팬들에게 위로를 준 것은 한 명의 고등학생이었다. 인천고등학교 3학년 김경기. 그 해 인천고등학교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배 고교야구 결승에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켰고, 그 중심에는 그 해 4할5푼7리의 불방망이로 이영민타격상을 수상한 4번 타자 김경기가 있었다. 몇 해 뒤 인천 프로야구팀에서 뛰게 될 소년이 전국고교무대의 마운드를 초토화시키며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따금 '짠물'이라는 칭찬을 듣기는 했지만 '거포'라는 무기를 가져보지 못했던 인천이었다. 야구가 아무리 투수놀음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한 방에 패전을 승리로 뒤집어내는 홈런의 매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모처럼 선발투수가 한 두 점으로 상대팀을 봉쇄하는 눈부신 투구를 보여줄 때조차도 승리를 낙관하지 못하고 숨죽였던 인천의 팬들은 다른 팀이 김봉연, 김우열, 이만수의 홈런으로 순식간에 승부를 뒤집어내고 환호할 때마다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입소문은 조용히 퍼져나갔고, 그 소년의 이름은 마치 머지않아 도래할 새 세상의 영도자 '아기장수'라도 되는 듯이 새겨져갔다.

"머지않아 그가 온다."

그 소년이 바로 18연패와 꼴찌의 책임을 지고 그 해 사령탑에서 물러난 김진영 감독의 아들이라는 점은 참 역설적이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김진영 감독은 '인천야구의 대부'였고, 그 아들이자 미래의 희망인 김경기는 '인천야구의 적자'였다. 아니, 어쩌면 망명지에서 해방군을 조직하고 있을 황태자 같은 존재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뒤로도 4년간, 인천 팬들에게 야구를 본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청보로 넘어갔던 팀은 88년부터 다시 태평양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고, 팀의 이름이 무엇이건 성적은 꼴찌 아니면 그 바로 위였다. 그리고 그 4년 동안도 인천 팬들의 은밀한 희망은 김경기였다.

시나브로 인천의 희망으로 떠오른 김경기

 98년, 인천구단 최초 우승의 순간
ⓒ 현대 유니콘스

고려대에 진학한 김경기는 기대대로 국가대표팀의 4번 타자로 활약했고, 그를 보는 인천 팬들은 마치 서울 명문학교에 유학중인 맏아들에게 온 희망을 걸어두고 그것을 기운삼아 피곤한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는 가난한 부모처럼 흐뭇해 했다.

1990년, 드디어 김경기가 프로무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태평양 구단 역시 그에게 동기인 LG포수 김동수보다 많은 총액 8000만원으로 예우했고, 선배들은 4번 타자의 자리를 비워주었다. 만년 꼴찌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해 인천 개막전에는 1만2000명의 관중이 몰려들었다. 그들이 보고자 했던 것은 그렇게 기다려왔던 한풀이의 불꽃놀이였다.

그 해 김경기는 전경기에 출장해서 2할8푼5리의 타율에 68개의 타점을 기록했다. 신인으로서 준수한 성적이랄 수도, 4번 타자로서 내세울 만한 기록은 아닐 수도 있었다. 물론 기다리며 꿈속에 그려왔던 것에 비하자면 어느만큼 허전한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해 신인왕 타이틀은 LG포수 김동수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원체 빈약했던 타선에다가 박정현과 정명원이 개막과 동시에 부상으로 실려 나가며 투수진마저 붕괴되어버렸던 그 해, 홀로 집중견제를 받아가며 만들어낸 신인의 기록으로는 대견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주자가 3루에 있을 때 무려 7할6푼의 득점타율을 기록할 만큼 '꼭 필요한 순간' 터뜨려주었던 한방은 김경기를 양승관의 대를 잇는 또 다른 인천야구의 상징으로 탄생시키기에 충분했다.

그 해, 태평양은 비록 5위에 머물렀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스물 일곱 번의 역전승을 일구어내며 끈끈한 근성의 팀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년간, 인천팀의 성적은 김경기의 성적과 함께 움직였다. 그 10년간 김경기는 홀수 해에 부진했고 짝수 해에 분발했다. 그래서 인천팀의 성적 역시 홀수 해에 주저앉았다가 짝수 해에 돌풍을 일으켰다.

김경기가 김기태와 홈런왕 경쟁을 벌이며 23개의 홈런을 때려내고 포스트시즌 3경기 연속홈런을 기록했던 94년에는 태평양 돌핀스가 최초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김경기는 20개의 홈런을 날리며 분발한 96년에 현대유니폼을 입고 또 한번 한국시리즈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최하위권으로 주저앉았던 팀과 함께 극심하게 부진했던 97년을 지나 18홈런으로 부활한 98년에는 드디어 인천팀 최초의 우승을 일궈내고 대표로 우승컵을 들어올리고야 말았다.

1999년은 인천 야구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해가 되었다. 최초의 우승이라는 선물이 감격스러운 것이었기에 그만큼 깊은 사랑을 주었던 현대가 그 해 겨울 서울로 연고지를 옮기기 위해 인천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인천 연고지를 물려받은 것은 신생팀 SK와이번스였다.

 김경기 선수의 타격모습
ⓒ 현대 유니콘스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고는 선동렬이나 최동원처럼 포효하지도 못하고,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넋이 빠진 표정으로 눈물을 그렁거리며 마운드에서 걸어 내려오던 98년 한국시리즈 최종전의 정민태를 보면서 눈물 젖은 환호성을 질렀던 인천팬들.

그들이 그렇게 정을 주었던 선수들은 고향을 버린 현대 유니콘스에 모여 있었고, 인천 연고권은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들을 주축으로 구성된 신생팀 SK와이번스가 가지게 되었다.

인천의 야구팬들은 셋으로 갈렸다. 새 팀 와이번스로 새로이 마음을 정한 이들, 미워도 유니콘스의 선수들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한 이들, 그리고 '환멸'이라는 글자를 떠올리며 야구를 마음 속에서 지워버린 이들. 열 번 싸워서 아홉 번을 지고, 혹은 열여덟 번을 연달아 지던 시절에도 인천 팬들은 야구를 버리지 않았었다.

"김경기를 인천으로 돌려보내라"

무관심을 가장해 상처를 달래면서도 어느 새 마음 한 쪽으로 쏠려 야구 중계방송을 곁눈질해야 했던 시절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많은 인천 팬들이 야구를 마음에서 지워버렸던 것이 바로 그 해, 99년 겨울이었다.

몇몇 인천 팬들은 현대가 경기를 벌이는 날 관중석에서 '인천의 자존심 김경기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시위를 벌였다. SK 역시 인천에 정착하기 위해 김경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미 인천을 떠난 현대에는 전성기가 지난 김경기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2000년 여름, '퇴물'이랄 수도 있는 김경기는 2억원이라는 예외적인 이적료와 함께 SK로 이적했다. 선수생활 중 단 한 번의 이적이었다. 팬들은 '김경기가 돌아왔다'고 표현했다.

SK에서 뛰었던 마지막 두 해 동안, 그는 더 이상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따금 대타로나 나서서 존재감을 시위하는 것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나타나면 항상 관중석은 달아올랐고, 또 숙연해졌다. 그는 인천팬들의 분신이었기 때문이다.

팬들이 원하는 것은 '이기는 팀'이나 '잘 하는 선수'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함께 울고 웃기에 부끄럽지 않은 팀이며 선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승리했을 때 부끄러워하고, 분전 끝에 장하게 무너져내렸을 때 오히려 감동하며 기억한다.

김경기를 하나의 신화로 부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성적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그가 인천의 야구팬들과 한 몸이 되어 슬퍼했고, 분전했으며, 또 안타까워하고 감격할 수 있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짧은 코치생활을 거쳐 잠시 미국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지금도 김경기를 기다리는 인천팬들의 마음은 85년, 그 해와 다르지 않다. 좌절에 섞인 짧은 희망이 반복되어온 인천야구. 그 애증의 역사 속에서 또 한 번의 신바람이 불어올 날이 온다면, 아마도 그 중심에는 또다시 김경기가 서있을 것이다.

 김경기 선수
ⓒ SK와이번스

덧붙이는 글 CBS라디오 표준FM (98.1MHz) '파워스포츠'(월~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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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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