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원년 우승팀을 결정짓는 한국시리즈 6차전. 전날까지 3승 1무 1패로 앞선 OB베어스가 9회 초 투아웃 동점 상황에서 만루를 만들어놓고 있었다. 타자는 0.334의 강타자 신경식. 투수는 이선희였다. "이선희 저거, 또 만루홈런 맞는 거 아냐?" "그러게 말야." TV 앞에 모여 앉은 사람들은 농담 삼아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어딘가 익숙한 장면이었다. 그 해 봄, MBC 이종도에게 연장 10회말 동점 상황에서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으며 요란스럽게도 프로야구의 개막을 알린 그 투수가, 바로 이선희였다. 그가 이번에는 그 해 마지막 경기에서, 또 다시 동점의 9회 투아웃 만루 상황에 몰리고 있었다. 그 순간 이선희에게도 개막전 끝내기 홈런의 기억이 악몽처럼 떠올랐을지 모른다. 아니, 그렇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래선지 그의 공은 자꾸 타자를 피해 다녔고, 결국 볼 네 개를 채우고 말았다. 8회까지의 리드를 뒤집어버린 역전 밀어내기. 다음 타석에 선 것은 김유동. 시즌 타율 0.245. 타격 순위 30위권 밖의 약체였다. 신경식이라면 몰라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순간 조금 긴장이 풀린 객석에서는 객기어린 투정이 쏟아졌다. "아이고, 선희야. 차라리 홈런을 맞아라 인마. 볼넷 밀어내기가 뭐고, 밀어내기가." 투박한 대구 쪽 사투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들 머리 속에는 벌써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 삼성이 과연 점수를 뽑아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스며들고 있었다. 새삼 마른 침을 삼키고 담뱃불을 붙여 무는 아저씨들도 곳곳에 있었다. 아직 객석은 어수선했다. 그런데 그 순간 심상치 않은 '딱' 소리가 울렸고, 하얀 공이 만드는 곡선이 동대문야구장의 하늘에 피어올랐다. 그리고 내외야 객석과 벤치, 그라운드의 수천 개 시선과 함께 펜스 넘어 깊숙한 곳에 꽂혔다. 만루홈런. 사람들은 한동안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선희가, 다시 만루홈런을 맞아버린 것이다. 맨 첫 경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맨 마지막 경기에서 말이다. 이선희는 벤치까지 들어갈 기력마저 없었는지 불펜쯤 되는 어디선가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고, 브라운관 앞의 수백만 명은 집요한 방송카메라의 인도에 따라 그를 응시했다.
 이선희 선수의 투구모습
ⓒ 라이온즈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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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프로야구의 원년이 만루홈런으로 동이 터서 만루홈런으로 저물었다고 했다. 또, 공언했던 대로 어린이에게 꿈을, 성인에게 낭만을 주었다고 인정했다. 그에 덧붙여 만인의 가슴 속에 남을 드라마까지 주었다고 해야 옳았다. 그리고 이선희에게는 한 쪽에서 질러대는 '삼성의 처음과 끝을 말아먹은 놈'이라는 비난과 다른 한 켠에서 조용히 만들어진 '비운의 스타'라는 별명이 남았다. 프로 원년 꼴찌였던 삼미 슈퍼스타즈는 일년 내내 15번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 해 삼성 라이온즈는 세 명의 15승 투수를 배출했다. 바로 이선희, 그리고 황규봉과 권영호였다. 그만큼 두터운 선수층을 가진 팀이었다. 그러나 이선희는 한국시리즈 6경기에서 무려 31과 1/3이닝을 혼자 던졌다. 절반이 훌쩍 넘는 몫이었다. 특히 5차전에서 유지훤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무너진 그에게 다시 6차전의 완투임무가 맡겨졌다. 그야말로 체력과 기력이 모두 바닥난 이선희가 마지막 회에 투아웃 만루를 만들고, 기어이 밀어내기 볼넷을 내줄 만큼 흔들렸는데도 불펜에서는 몸을 푸는 이가 없었다. 모두들 마른 침만 삼키며 이선희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1973년에 실업무대에 뛰어든 이래, 그는 의심할 바 없는 한국 최고의 투수였다. 노히트노런을 두 번이나 기록했고, 시즌을 결산해보면 투수부문에서는 항상 그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특히 실업리그 3관왕을 차지했던 1978년에는 그동안의 활약에 대한 평가로 대한민국체육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는 이선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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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국제무대에서 더 빛났다. 그는 5년 후배 최동원과 함께 70년대 후반 국가대표팀의 좌우완 에이스를 분업했고, 그 시기 국가대표팀의 거의 모든 성과들이 그 둘의 어깨로부터 시작되었다.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렸던 대륙간컵 대회에서 다승왕, 구원왕, 그리고 대회 MVP를 휩쓸며 우리나라 야구에 세계대회 첫 우승을 선사한 것은 그 결정판이었다. 특히, 일본전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일본킬러'의 명성 덕에 그를 사람들은 최동원보다도 높이 평가하곤 했었다. 그의 왼팔에서 시작해 오른손 타자의 무릎 근처로 크게 휘며 파고드는 슬라이더는 만화에서 그려지던 '마구'의 모델이었다. 그래서 1978년 이탈리아 세계 선수권대회를 앞두고 다리 부상을 입은 그를, 대표팀 감독 김응룡은 굳이 합류시켜 벤치에 앉혀놓았다. 이선희는, 벤치에 앉아만 있어도 힘이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한국시리즈 6차전 운명의 9회 초, 불펜은 텅 비어 있었다. 그 결정적인 순간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차라리 체력은 바닥이 났더라도 이선희밖에 없다는 것이 라이온즈의 코칭스태프와 동료선수들, 경기를 지켜보는 객석의 팬들, 그리고 심지어는 이선희 자신을 포함한 모두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구란 '길게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오늘 죽을 각오로 덤벼들어야 하는 것'으로 알던 시절. 그 살벌한 투혼의 전장에서 이미 9년을 내달려온 끝에 맞이한 프로 원년의 최종전에서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의식과 존재의 그 극적인 어긋남의 순간에 발생한 사건이, 바로 그 만루홈런이었다. 기록이 남기는 것은 노력이 아닐 뿐 아니라 실력도 아니다. 오직 성적일 뿐이다. 따라서 세월 흘러가고 남는 것은 결과일 뿐,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목격한 사람들은, 기록의 전횡에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딱 한 개, 아니 두 개의 만루홈런과 패전투수의 기록이 다 담지 못하는 이선희의 실력과 노력과 책임감, 그리고 그 기록이 한 순간에 가려버린 수많은 업적과 환희의 기억들을 도저히 놓아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비운의 스타'라는, 여운이 긴 별명을 붙여 그들을 세월 속에 붙잡아둔다.
 이선희 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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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 비슷한 몇 개의 이름을 떠올린다. 국제전 47연승의 신화를 이루고도 올림픽 무대에 한 번도 서지 못했던 유도의 윤동식,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다시 서고도 부상 때문에 월드컵 출전의 꿈을 다시 한 번 접어야 했던 축구의 이동국. 그리고 야구의 이선희. 물론 그들은 승리자가 아니다. 그러나 그냥, '패배자'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이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노력과 실력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비운의 스타'다. 그럼으로써 그들에 관한 기록에는, 그들이 흘렸던 땀과, 그 정직한 결과였던 실력이 채 반영되지 못했음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뭔가 기억과 이야기로 떠올려줄 가치가 있는 선수임을 알 수 있다. 야구는 모름지기 기록의 스포츠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기록이 아니라 그것이 남기는 드라마다. 그래서 종종 기록이 채 드라마를 담지 못할 때면 기억은 기록과 맞서 기억을 지키는 작은 저항의 진지를 구축하기도 한다. 예컨대 '비운의 스타' 같은 것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기억과 기록이 맞서기로 한다면, 나는 언제나 기억의 편에 있을 작정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력서의 숫자 몇 개로 낙인 찍혀 팔려 다니는 초라한 세상 속에서 야구가 따로 무슨 즐거움이 될 수 있겠는가?

덧붙이는 글 CBS라디오 표준FM '파워스포츠'(월~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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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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