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한국-독일과의 월드컵 준결승 장면. 이날 우리에게 꿈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 스포츠 서울

관련사진보기


<편집자 주>2002년 6월, 둥근 공을 매개로 자발적 참여와 집단신명의 굿판을 벌이며 대한민국은 꿈을 이뤘다. 1년 뒤인 지금, 여기저기서 월드컵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고, 언론에서는 6월 난장을 앞다퉈 소개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작 현재 그날의 기억 이외에 남은 것이 없다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오히려 월드컵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금까지 그 꿈은 지속되고 있을까.

그날 이후, 무엇이 바뀌었는가. 무엇이 달라지고 또한 무엇이 극복되었는가. 그날 이후, 그러나 난 착잡한 심정이다. 우리의 현실, 그것도 월드컵의 영광과 추억을 1주년이라는 시기에 적절히 맞추어 일부러 기분 좋게, 서로 격려하듯이, 때로는 ‘국민 총화’를 도모하듯이 과잉 찬사를 나누고 있는 작금의 풍경에 대하여 무척이나 생소하고 당혹스럽다. 무엇이 바뀌었는가. 아니, 적어도 변화의 조짐이나 사회적 합의라도 일궈냈는가.

잠시, 지난 2월에 빚어진 천안초교 축구부 합숙소 사고를 기억하고자 한다. 일부러 극단의 사고를 환기하여 잔치판의 기억을 뒤엎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그것은 충격의 비극적인 사고였지만 결코 ‘극단’의 것이 아니며 오히려 우리 축구계의 수많은 문제점과 모순이 집약된 사고이기 때문에 결코 잊어서는 안될, 월드컵의 감미로운 추억에 더하여 반드시 메모해야할 사항이다.

@BOX1@그 사고는 왜곡된 승리지상주의, 열악한 환경, 불합리한 축구 행정, 상명하복의 우악스런 관료주의, 요컨대 한국 축구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전근대성의 모든 문제를 농축하고 있는 사고다. 거두절미, 모든 전제를 다 무시하고 직설로 묻건대 ‘왜 9살 어린이가 합숙소에서 불에 타 죽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오로지 침묵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있는 것이다.

K리그는 또한 어떠한가. 월드컵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썰렁한 분위기에 티격태격 우격다짐의 축구가 여전하다. 과학적인 스타 마케팅은 찾아볼 수가 없다. 몇몇 월드컵 스타들이 은퇴하거나 해외로 진출한 이후 물거품처럼 월드컵 열기는 사라져 버렸고 그나마 그렇게 해외에 진출한 선수들은 안정환, 이을용, 김남일이 증명하듯이 유럽의 중위 리그에도 안착하지 못한 상황이다.

우리는 왜 월드컵에 열광했던가. 그것은 모든 외적 조건을 무시하고 보면 무엇보다 축구가 갖는 물질적 속성의 아름다움 때문이다. 경기장의 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경이로운 향기가 있다. 승패는 후반적 휘슬 이후의 일이다. 문제는 그 과정이며 그 과정의 일희일비, 내러티브가 우리를 들뜨게 만든다. 골이 터지는 순간은 1초도 안되는 순식간이지만 그 한 골을 위하여 선수들은 때로는 전후반 90분을 다 허비하도록 지구의 중력과 바람 저항과 상대 선수의 태클에 맞서나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지난 해 목격했던 축구는 오직 지지 않기 위해 철저히 '실리 축구'로 일관하는 전반적 평준화의 상황이었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프랑스, 잉글랜드 등은 극단적 실리 축구의 여실한 패배를 보여주었다. 브라질과 한국의 성취가 없었다면, 더불어 세네갈, 터키, 미국의 선전이 없었다면 지난해 월드컵은 무척 심심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브라질은 조직력에 의한 실리 축구를 가볍게 무너뜨렸다. 그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공을 차는 경우가 한차례도 없었다.

탁월한 상상력과 창의적인 몸놀림! 우리는 왜 그 육체에 대하여 경탄했던가. 실제의 삶에서 제대로 한번 그렇게 살아봤으면 원하였기 때문이다. 현대성이 강요하는 숭고한 노이로제, 그것을 잠시라도 벗고 호나우도처럼, 호나우딩요처럼 그렇게 경이롭고 탄력있는 일상을 한번쯤 누려봤으면 했던 것이다.

 최근 대구 월드컵 경기장에서의 프로축구 경기 장면. '그들만의 리그'를 보는 듯 하다. 우리의 꿈은 유효한가.
ⓒ 스포츠 서울

관련사진보기


올리버 칸, 토티, 비에이라도 탁월한 영웅에 다름아니겠으나 우주의 중력을 모조리 책임진 듯한 그같은 인상파 전사 대신, 맵시있게 네트를 넘어가는 섬세하고 탄력있는 테니스공의 매혹적인 각도처럼, 제대로 한번 일상을 누려보고 싶었던 우리의 욕망이, 브라질의 경탄할 만한 몸놀림에 매혹당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이 월드컵을 차지했을 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 점을 우리는 한국 축구의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맛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열정은 과도한 승부욕으로 변질되었고 그 상상력은 대전 시티즌, 전북 현대, 수원 삼성을 제외하면 도무지 그 팀 컬러를 찾아보기 어려운 둔탁함으로 균질화되었다. 그리고 천박한 마케팅들. 구단이 앞장서서 풍선 막대를 나눠주고(이 도구는 축구를 잘 안다면 반입금지 물품이다) 가수를 불러서 호객행위나 하고 누굴 주기에도 이상한 경품을 내걸 뿐이다.

관객이 빠져나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며 그런 상황에서 월드컵 경기장 사후 운영방안이란 ‘축구 문화’와는 전혀 관련없는 수익 구조 창출로 골몰하게 되고, 다행히 새 정부 들어 전격적인 방향 선회를 했지만 1천억에 가까운 월드컵 기념관을 짓는다는 식의 발상까지 나왔던 것이다. 그 끝에 천안초교 합숙소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상황이 변하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 ‘월드컵 1주년’이란 참으로 씁쓸한 수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변화는, 그 조짐은 있었다. 축구장 바깥으로 잠시 눈을 돌려보자. 지난 월드컵 이후, 촛불 시위가 있었고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물론 이는 역사의 우연으로 순차 진행을 한 셈일 뿐, 그 각각이 기계적 연관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월드컵 광장에 나가 공동체를 열망하고 그 힘이 촛불 시위의 근간이 되었으며 이 젊은 세대의 무혈혁명은 선거로 마무리되었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모든 것을 ‘선한 의지’로 풀이하려는 단순한 역사관에 지나지 않는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치르기 전에도 4·19, 5·18, 87년 항쟁이 있지 않았는가.

 (마우스를 사진에 대고 누르면 큰 이미지가 보입니다.)
ⓒ 노충호

관련사진보기


그러므로 촛불시위와 대선의 결과는 지난 6월의 스포츠 행사와 직접적 관련은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계기적 사건으로는 우연이지만 2002년의 역사적 조건에서는 인과율을 가지고 있다. 기계적이지 않을 뿐 상호 연관성은 존재한다. 수사로써 말하자면, 그야말로 '사람답게 사는 사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덕목에 대한, 기울어진 역사의 균형추를 바로 세우기 위한, 사람이 사람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가치의 확인이 위 세가지 사안에 공통적으로 드리워져 있다.

지난 월드컵 열기는 수많은 수사에도 불구하고, 또 더러는 매우 위험한 국가주의적 오해에도 불구하고, 궁극에 있어 한반도에서의 삶이 그런대로 살아볼 만한 삶이라는 것을 감수성의 차원에서 열망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저 60년대의 걸작 김승옥의 <무진기행>에 대하여 어느 평론가가 '감수성의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 그러나 현실의 압력에 의하여 비틀리고 왜곡되어 자폐의 밀실로 억압되었던 것, 그 유예된 감수성의 혁명이 90년대의 뚜렷한 두 변화, 즉 민주화의 더디지만 착실한 진행과 대중문화의 다양한 확산 속에서 실현된 것이다. 그 사이, 이 사회는 감수성의 혁명을 예고할 만한 변화를 겪었으며 그 계기로서 월드컵의 광장이 벌어졌다.

더욱이 광장의 축제로 나타는 그 열기는 바로 당장 어떤 현실 변화의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지만, 그와 같은 열정의 삶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는 예언적 확인으로서 소중한 것이다. 일상의 위계, 질서, 규칙 따위를 한번쯤 가볍게 거절함으로써 비일상의 일탈을 맛보는 것, 현실이 강제하는 크고작은 규칙성을 축제의 공간에서 적절히 무시함으로써 '현대'가 요구하는 '숭고한 노이로제'를 극복해나가는 계기로써 월드컵은 충분히 작용하고 있다.

다만 그 정책과 제도와 인식의 변화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다. 실질의 측면에서 월드컵 열기와 주5일 근무제는 이제 한반도에서의 삶이 ‘과도한 노동과 조직의 배려’라는 전근대의 인간관계를 사절하고 개인의 다양한 가치와 사회적 합의에 따른 공동체의 목표가 높은 차원에서 공존하는 새로운 사회 분위기로 바뀌어 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절실한 열정은 월드컵 열기로 증명되었으며 그 제도적 환기 장치는 주5일 근무제로 차츰 다가오고 있다. 인프라 또한 적절히 설비되어 있다. 다만 그 속살을 채울 콘텐츠, 어떻게 우리의 삶을 쾌적하고 슬기롭게 생산해낼 것인가 하는 진정한 ‘문화운동’은 아직 진행 중이다. 월드컵 1주년을 참답게 기억해야 한다면 우리는 문화적 삶의 콘텐츠를 어떻게 알차게 채울 것인가를 사색하는 것으로 집중해야 한다.

@BOX2@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11년 동안 한국과 미국서 기자생활을 한 뒤 지금은 제주에서 새 삶을 펼치고 있습니다. 어두움이 아닌 밝음이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실천하고 나누기 위해 하루 하루를 지내고 있답니다.

top